경주에서 ‘진리의 빛 비로자나 부처’전 보고 늦봄 불교미술 답사를 떠나볼까
▣ 경주=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비로자나 부처? 석가모니 부처 말고 다른 부처님이 또 있어? 나라 안 곳곳의 절간에 들렀다가 이런 질문을 하는 문외한들이 꽤 있을 법하다. 손을 모으거나 한 손을 땅에 슬쩍 댄 석가모니 부처 말고도 왼손 검지를 추켜세운 뒤 오른손으로 감싼 손짓을 한 부처를 이 땅의 절 법당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대적광전 혹은 비로전에 모신다는 그 비로자나 부처다. 인도말 ‘바이로카나’를 음역한 말인 비로자나 부처는 빛이자 태양이란 뜻인데, 비로자나 부처는 태양 혹은 달빛, 석가모니 부처는 그 그림자로 비유되곤 한다. 이 땅의 절에서 비로자나 부처는 석가모니 이상으로 존경하며 떠받드는 최고 숭배 대상인 까닭이다.
우리 민족의 특질 드러낸 비로자나 부처
비로자나 부처는 인도 힌두 신화의 태양신 비슈누 혹은 빛의 신 아수라에서 유래한다. 가장 위계가 높은 법신이자 우주 만물의 진리 자체이기에 원래 형상이 없는 절대신이다. ‘허공같이 끝없어 어느 곳에나 두루 가득 찼다’는 의미의 편일체처(遍一切處), ‘빛이 온 세계 온 생명에게 비친다’는 의미의 광명편조(光明遍照)라고도 했다. 흥미로운 것은 비로자나 부처가 이 땅의 미술 역사에서 우리 민족의 특질을 본격적으로 종교예술에 드러내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는 점이다. 그 주역은 호국 불법에 기대어 삼국을 통일한 신라인들이었다. 부처의 진리, 법을 만지고 볼 수 있는 실체로 숭배하려 했던 옛 통일신라의 사람들은 부처님의 몸에 이렇게 왼손 검지를 감싼 손 모양(지권인)을 한 비로자나불의 실체를 빚어냈다. 본디 시각적 이미지에 민감하고 실천적 신앙세계에 민감했던 선조들은 당시 불교계를 지배하던 화엄종 교리에 바탕해 아시아 유일의 석가여래가 지권인을 한 형식의 비로자나 부처 양식을 디자인한 것이다.
한국은 물론 동양 조각사에서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이 땅의 비로자나 불상만 국내 최초로 모은 의미심장한 기획전이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 국내에서 처음 마련된 걸작 비로자나불들의 전시 마당이다. 이름하여 ‘진리의 빛 비로자나 부처’전. 지난 5월8일 개막해 6월17일까지 열리는 특집전이다. 통일신라부터 고려·조선시대까지의 비로자나 부처상들이 등장한 이 전시는 국보 1점, 보물 2점을 포함해 약 25점의 불상 유물들이 나왔다. 전시는 아담한 40여 평의 공간에 차려져 있다. 통일신라인들이 만든 최초의 비로자나 불상들을 중심으로 우주적 진리를 상징하는 비로자나불의 의미와 표현방식, 고려·조선시대까지의 불상 변천사 등을 소략하게 알 수 있도록 꾸몄다. 석가여래에 비로자나불 이미지를 만든 신라인들의 종교적 신앙심과 우리 고유의 비로자나불 도상이 형성된 과정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 땅의 비로자나 부처는 중국, 일본의 불상과는 전혀 다르다.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 머리에 관을 쓴 보살의 모습에 지권인의 손 모양을 한다. 반면 이 땅의 비로자나불은 부처 여래의 모습에 지권인을 한다. 중국, 일본은 밀교 경전에 묘사된 비로자나 부처의 모습을 따른 것이나, 이 땅에서는 우주의 근본적 진리와 깨달음을 구하는 화엄종에 심취해 석가여래의 몸으로 비로자나 부처를 표현했다. 이런 비로자나 부처 가운데 가장 이른 상은 766년 만든 석남암사(경남 산청 내원사) 비로자나 부처다. 워낙 영험한 효험이 있었던 탓인지 9세기에 들어 화엄종 사찰은 물론 선종 사찰에서도 비로자나 부처를 유행처럼 만들어 모시게 된다. 고려·조선시대에는 귀족 왕실 발원으로 불화, 사경 그림 등의 다른 장르에 비로자나 부처를 그려넣기도 했다.
통통한 볼, 왜 이렇게 귀여울까
출품작들은 볼수록 재미있다. 불교 최고의 법신인 비로자나 부처가 왜 이렇게 귀여울까. 경주박물관이 비장한 8세기의 12cm짜리 금동 비로자나 부처는 수줍은 소년의 모양새다. 튼실한 양감, 몸매에는 탄력이 붙었다. 이 미소년불의 눈빛과 표정은 한없이 깊은 우물처럼 조명 속에서 윤곽을 드러낸다. 통일신라인들이 독실한 불자이면서도 미려하고 구체적인 감각에 충실했던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단박에 느낄 수 있는 순간이다. 34.5cm짜리의 또 다른 금동 비로자나 부처 입상은 은은한 표정과 더불어 어딘지 모르게 삐져나오는 익살스런 느낌이 각별히 정이 간다. 평화스런 미소 한편으로 “너희가 정말 우주의 진리를 알까” 하고 떠보는 듯한 장난기가 떠도는 것이다. 100여 년 지난 뒤 빚은 통일신라 하대의 9세기 말~10세기 초 비로자나 부처 입상은 우량아의 상이다. ‘슈퍼베이비’같이 통통하게 살이 오른 볼, 어딘지 모르게 투박하고 둔중한 듯한 외모, 왼손 검지를 쥐지 않은 특이한 지권인, 금도금 하지 않고 금박만 슬쩍 입힌 모양새 등이 흥미롭다. 비로자나불의 신앙이 점차 민중의 소박한 생활 불교로 정착돼간다는 것을 직감하게 된다. 비슷한 시기 돌로 만든 경북 영양 출토 비로자나 부처나 영남대 박물관 소장 비로자나 부처의 모습도 통통하거나 둥글둥글한 몸매에 양손 맞잡고 선 모습으로 다른 비로자나 부처와 다른 서민상을 보여준다. 고려 후기 귀족들의 주문 작업으로 보이는 13~14세기의 원숙한 여인 같은 동제 비로자나 부처상은 그 우아한 자태를 낯선 즐거움으로 감상하게 된다. 통일신라시대의 슈퍼베이비 같은 통통한 부처, 고려시대 귀족불교의 냄새가 엿보이는 비로자나 부처까지 다기한 한국미의 모습을 예상하지 못했던 장소에서 확인하는 기쁨이 남다르다.
출품된 석제, 금속제 비로자나 부처상들은 손 모양, 얼굴 표정, 몸체의 ‘포즈’ 등이 딱히 법식에 정해진 바 없다. 지역, 시대에 따라 다르고 통일된 규격이 없다. 그렇다고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으로 마구잡이 조형을 한 것은 결코 아니며 일정한 시대정신이 각기 녹아 흐르는 불상들이다. 그것은 불교미술사가인 강우방 전 국립경주박물관장이 말한 대로 “예술과 종교가 한 몸이 되는 진리의 감각적 인식”이며 “보이지 않는 것이 무한한 형식으로 회통되고 융합되는 상징”이다.
소유권 갈등에 핵심 유물 출품 좌절
미술사적 무게감이 돋보이는 기획전이지만, 비로자나 부처전은 문화재 동네에서 온전히 축복을 받지 못한 채 불과 40여 평의 좁은 특별실 공간에서 시작됐다. 경주 석가탑의 사리구 유물 반환을 둘러싼 국립중앙박물관과 조계종의 소유권 갈등으로 사찰에 소장된 상당수 명품 비로자나 부처상들이 전시에 나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국내 최고의 나무불상으로 판명되어 장안을 떠들썩하게 만든 해인사 대적광전, 법보전 비로자나불, 영탑사 비로자나 삼신불, 통도사 대광명전의 삼신불도 등 핵심 유물들이 양자 간 기싸움의 여파로 결국 경주박물관에 모이지 못했다. 박물관 쪽은 “국민적 관심을 모은 해인사 비로자나 불상과 통도사 불화는 성사 직전에 절 쪽의 불허로 출품이 좌절돼 안타깝다”고 했다. 일본 도쿄 국립박물관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비로자나 부처 입상이나 영탑사 삼존상, 조선시대 명작인 수종사 비로자나 부처상 등은 서울 견지동 조계종 중앙박물관의 특별전에 가서 봐야 한다. 뒤늦으나마 겨우 집약한 불교 문화유산 걸작들을 정치적 기싸움의 여파 때문에 옹색하게 보게 된 현실을 안타까워하는 목소리가 높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올해 늦봄은 찬란한 불교미술의 광채를 느낄 수 있는 전시회 답사길이 곳곳에 마련되어 있다. 경주보다 더 남쪽인 경남 양산 통도사 성보박물관(055-382-1001)은 불교회화의 세계적 컬렉션이다. 여기 가면 세로 길이만 8m를 넘는 거대한 부처님 걸개그림을 만날 수 있다. 전북 진안 금당사에서 17세기 말 부처가 영기를 발산하며 홀로 서 있는 모습을 담은 괘불탱을 10월18일까지 특별 공개 중이다. 갖가지 오색 장식이 달린 예복을 입고 연꽃 봉황에 싸인 보관을 쓴 부처상의 새침하면서도 환상적인 표정이 돋보인다. 상설전시실에서는 경주의 비로자나불전에 출품하지 못한 대광명전 삼신불도를 비롯한 불교 탱화의 걸작 600여 점을 교체 전시하고 있다. 서울의 조계종 불교중앙박물관의 개관전(24일까지·02-2011-1960)은 18일부터 관심의 초점인 불국사 석가탑 출토 사리기를 추가로 전시할 계획이다. 동양 사리예술의 걸작으로 꼽히는 석가탑 사리기는 현 소장자인 국립중앙박물관과 소유권 논란을 빚었다가 최근 문화재위원회가 전시에 대여할 것을 의결한 바 있다. 전시장에는 경주박물관의 비로자나불 전시에 빠진 일본 도쿄박물관 소장 비로자나불 입상, 영탑사 삼존불,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불상인 서울 개운사 소장 목조아미타불 좌상 등의 불교미술 명품들이 수두룩하다. 티베트 불화(탕카)의 보고를 자처하는 서울 평창동 화정박물관(02-2075-0114)도 석가모니를 그린 탕카들만 모아 ‘석가여래도’란 제목으로 10월28일까지 기획전을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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