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파리 오르세미술관 기획전 ‘과 거장들의 영혼’
▣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광고
화폭 위에는 아름답고도 섬뜩한 그리스 신화의 잔혹극이 펼쳐진다. 리라를 즐겨 켰던 음악의 대가 오르페우스. 그는 자신을 숭배하던 무녀들의 구애를 거절했다가 그네들 손에 몸이 갈가리 찢기고 머리통이 잘렸다. 한 여인이 강에 떠내려온 오르페우스의 머리와 그의 리라를 건져올린 뒤 애틋한 눈길로 어둠 속에서 내려다본다. 이젠 늦었다. 사랑하는 아내 에우리디케를 지옥에서 구출해오다 뒤를 돌아보는 바람에 끝내 부인과 영영 이별해버린 슬픔을 그는 벗어날 수 없었다. 리라 위에 눈 감고 놓인 오르페우스의 머리통, 여인 옷의 신비스런 장식, 명암의 대비가 극명한 배경 등이 어우러져 사랑이 증오로 변하면서 빚어진 환상적 비극, 엽기의 신화를 펼쳐놓는다. 19세기 중엽 프랑스 상징주의 그림의 거장 구스타브 모로가 그린 다.
‘먹을 것 없는 소문난 잔치’는 비켜가
역대 최고의 명화 잔치라는 홍보 아래 지난 4월21일부터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막을 올린 프랑스 파리 오르세미술관 전 ‘과 거장들의 영혼’(9월2일까지)의 들머리를 모로의 이 그림이 장식하고 있다. 음울한 색조의 는 운을 떼자마자 곧장 인상파 거장 작품들의 찬란한 색채에 뒤덮여버린다. 블록버스터 전시라지만, 전체 출품된 그림은 불과 44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전시 출품작의 무게감은 여느 블록버스터 전시보다 크다고 주최 쪽은 강조한다. 모로의 작품에 뒤이어 출품되는 작품들은 의 밀레와 의 마네를 비롯해 고흐, 고갱, 세잔, 피사로, 보나르 등 대부분 미술사 교과서나 개론서에 흔히 나오는 작가들의 1급 명작들이 상당수를 차지한다.
작품을 출품한 오르세 미술관은 1986년 역 건물을 고쳐 개관한 이래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초까지 프랑스 인상파, 신인상파 그림의 성소로 자리잡은 세계적 컬렉션이다. 그래서인지 보험평가액 8000억여원으로 국내 전시 사상 최고를 기록한 이 블록버스터급 기획전은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속설을 슬쩍 비켜간다. 사실 3층 한 공간에만 구획된 전시장은 얼개만으로는 옹색해 보이고, 출품작들을 하나로 꿰어줄 전시 연출은 기대를 아예 않는 편이 낫다. 별다른 연출 장식 없이 벽 공간마다 구획을 지어 명품들을 다소곳이 감상하기 좋게 걸어놓은 것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전시장의 구색으로는 어디서도 풍성하고 화려한 오르세 미술관의 19세기 컬렉션의 위광을 느껴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런 허전함을 메워주는 건 작품들의 압도적인 색감과 절묘한 구도로 채워진 화면 그 자체일 것이다.
광고
작품들은 크게 2개의 방으로 구분된다. 첫째 방은 19세기 중엽의 전원 자연주의 미술인 바르비종파부터 인상파의 대표적인 작가들을, 2부에 해당하는 후미의 방은 고흐, 고갱, 루소, 시냐크 등 후기 인상파 계열 작가들, 그리고 보나르, 뷔야르, 드니, 세잔 등 반인상파 계열의 작품들을 전시한다. 작품 그 자체의 배열로 거칠게나마 19세기 인상파 미술사의 흐름이 잡힌다. 지난 3월까지 일본 도쿄에서 열린 오르세 순회전 ‘화가들의 천국’ 전시의 출품작들이 주류이고, 한국 기획사의 요청으로 지고의 명작인 과 은 아예 파리에서 공수해왔다.
인상파 거장들의 순간 포착이란!
광고
기획의 힘이나 연출의 흥미를 느끼기는 어려워도, 눈과 머리로 되새김할 감상의 여물들은 꽤 많다. 정말 인상파 거장들은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즉흥적인 찰나의 순간 포착에만 능했을까. 현란한 빛과 색채의 향연만 즐긴 이들일까. 출품작들은 이런 선입관을 단호히 깨뜨려준다. 첫째 방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으로 다가오는 것은 사실 최고의 명화로 꼽히는 밀레의 보다는 과 동료 화가 베르트 모리조를 그린 마네, 모네, 그리고 드가의 그림들이다. 그 그림들은 찬란하고 화려한 이미지라기보다는 숨길 수 없는 19세기 시민사회 특유의 명쾌하고 당당한 필치로 그린 인물과 일상 풍경을 내보인다. 환상적인 파스텔톤 발레리나 그림으로 유명한 드가는 정장한 그의 누이동생을 그린 에서는 똑 부러진 표정과 윤곽이 뚜렷한 피라미드 구도의 인물상을, 에서는 환상적인 무대 아래 연주자들의 숨막히는 긴장감을 명확하고 생생한 구도로 그렸다. 의 마네는 더욱 노골적이다. 스페인의 거장 벨라스케스와 고야의 생생한 인물 묘사에서 영감을 받은 이 거장은 전쟁고아 출신 소년병의 연주 장면을 마냥 회색빛으로만 채워진 배경 속에 생동하듯 묘사한다. 검은 상의, 빨간 바지, 검은 신발, 흰색의 어깨띠와 신발띠는 그 소년의 내면과 존재를 발라내듯 드러낸다. 검은 모자와 외투를 걸친 동료 여성 화가의 순간적 인상을 담은 에서도 마네는 특유의 직설적 시선을 그대로 살려내고 있다. 어둠 속에 푸르스름한 빛이 비쳐들어오는 문 안 거실 모습을 담은 모네의 도 걸작이다. 미묘하게 번지는 빛 속에 잠긴 아이와 여인이 있는 실내를 보여주는 이 작품은 인상파의 세계로 관객을 초대하는 알림장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것은 한국에는 낯선 인상파 화가인 바지르의 작업실(아틀리에) 그림이다. 바지르는 30대에 요절해 유명세는 떨어졌으나, 당시 모네·마네·르누아르 등 청년 인상파 화가들이 담소하고 작품을 분석하는 등의 교류상을 엿볼 수 있는 아틀리에 풍경으로 미술사에 남았다.

인상파보다 앞선 자연주의 전원 미술을 추구했던 밀레의 명화는 인상파 그림 맞은편 벽에 외톨이처럼 홀로 걸려 있다. 밀레의 은 실제 크기가 가로세로 50~60cm 안팎으로 뜻밖에도 매우 소담하다. 워낙 대형 복제 이미지로 많이 등장했던 명화여서 얼핏 봐서는 쉽게 감동의 크기가 짚이지 않는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기도하는 부부의 빵덩어리같이 두툼한 신발, 촌부의 경건한 얼굴 표정, 노을 지는 지평선과 석양을 나는 새떼의 절묘한 화면 배치에 탄복하게 된다. 그냥 흘러가며 보았던 복제와 원본 이미지의 차이를 색다르게 되짚어보는 것도 흥미롭다. 인상파 화가 중 그림 기법에 관한한 가장 학구적이었다는 피사로의 시골 풍경 그림 또한 형상의 윤곽에 대한 진지한 사색이 묻어나오는 작품이다.
방 안 가득한 고흐, 고갱의 카리스마
두 번째 방에선 고갱, 고흐의 유명한 소품 그림들부터 보게 된다. 반 고흐의 그림인 과 은 처음부터 끝까지 어딘가 불안하다. 이미 그의 영혼을 잠식하고 있던 정신병의 실체가 그림에 나타나고 있다. 은 지극히 평면적인 일본의 우키요에 판화를 양화풍으로 탈바꿈시킨 듯한 느낌을 준다. 무도회장을 채운 남녀들의 떠들썩한 분위기를 전달하면서도 세부적인 표정을 지우고, 색면 색점 등을 강조해 어딘지 모르게 차분한 듯한 느낌도 전달한다. 화면 전면은 머리를 틀어올린 여성들의 뒷모습을 잡은 순간적인 장면으로 채운다. 너무도 유명한 은 원근법을 무시한 채 각기 다른 시선으로 쳐다보는 듯한 탁자, 의자, 침대의 가구와 그의 붓질이 뚝뚝 묻어나오는 듯한 바닥의 핍진한 색감이 그의 소용돌이치는 정신세계를 엿보게 한다.
흔히 고흐와 단짝으로 소개되는 고갱의 카리스마 넘치는 단단한 붓질을 실제 그림으로 재발견하는 것도 전시 감상의 기쁨 가운데 하나다. 논란을 일으킨 황색의 예수그리스도 그림을 배경으로 그린 그의 자화상은 구축적이고 단단하게 형상화한 얼굴의 윤곽과 명료한 표정 등에서 기본기와 내공이 충실했던 그의 이면을 보여준다. 주황, 분홍, 노랑 등이 물결치는 타히티 여인들의 그림은 마티스가 대표하는 야수파 화풍의 전조를 보여주는 것이다. 두번째 방의 또 다른 핵심은 색점을 사용한 신인상파와 반인상파의 작업들이다. 이런 후기 인상파 작가들의 흐름은 인상파의 즉흥적 붓질과 자연주의에 반대하며 철저히 주관적인 색채와 명료한 형상으로 장식적 화면을 추구했던 뷔야르, 보나르, 드니, 크로스의 세련된 인물, 풍경 그림으로 이어진다. 모자이크 벽화 같은 크로스의 색점화 과 일본 판화 같은 보나르의 , 드니의 드가 초상화 등이 눈길을 붙잡는다. 상상의 원시적 자연세계를 일러스트처럼 묘사하며 독창적인 화풍을 추구한 세관원 출신 화가 루소의 〈M부인의 초상〉은 얼굴, 몸 비례가 제각각인 만화 같으면서도 수수께끼 가득한 여인상이 신비스런 감흥을 선사한다. 감상 말미에는 유명한 풍경화가 코로를 찍은 희귀 사진, 미국의 사진 거장 에드워드 스타이켄이 찍은 빅토르 위고 조각상 앞의 거장 로댕의 회화 같은 사진 등이 후식처럼 눈맛을 다독여주고 있다. 02-322-0071, 2113-3476, www.orsay2007.co.kr
광고
한겨레21 인기기사
광고
한겨레 인기기사
산 정상에 기름을 통째로…경찰, 화성 태행산 용의자 추적
[포토] 시민 100만명, 꽃샘추위에도 ‘윤석열 탄핵’ 대행진
“더는 못 기다린다 탄핵이 답”…시민들, 헌재 앞 간절한 외침
권성동 “이재명·김어준·민주당 초선 72명 내란 음모죄 고발”
4월 탄핵 선고 3가지 시나리오…윤석열 파면·복귀, 아니면 헌재 불능
한국도 못 만든 첫 조기경보기 공개한 북한…제 구실은 할까
최상목, 2억 상당 ‘미 국채’ 매수…야당 “환율방어 사령관이 제정신이냐”
영남 산불 9일째, 사망 30명·부상 43명…주택 3285채 불 타
냉장고-벽 사이에 82세 어르신 주검…“얼마나 뜨거우셨으면”
용인 지하주차장 화재, 주차 차량 내부서 ‘최초 발화’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