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추리드라마의 신기한 반격

등록 2007-04-20 00:00 수정 2020-05-03 04:24

한국방송 에서 작가주의 장르 드라마의 독특한 과도기를 발견하다

▣ 강명석 기획위원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많이 작업했었고, 오직 그것밖에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한국방송 에서 서해인(신민아)은 카를 구스타프 융의 책 의 한 문장을 읽는다. 화면에 이 문장이 잡히는 시간은 불과 2~3초 남짓. 그런데 신기하기도 하지. 의 이 문장은 에서 ‘범인’ 시점의 이야기를 그대로 함축한다. 의 범인은 강력반 형사 강오수(엄태웅)가 연루된 12년 전의 한 살인사건에 대한 복수를 꿈꾸고, 연쇄살인 사건을 일으킨다. 그는 그것을 위해 사건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에 대해 조사하고, 강오수의 성장 과정을 모두 사진으로 찍었으며, 그의 주변 사람들을 모두 조사해 자신이 전혀 손대지 않고 연쇄살인 복수극을 진행시킨다. 의 문장 그대로, 의 범인은 “내가 할 수 있는 한 많이 작업”했고, “오직 그것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순간, 의 스토리와 의 문장이 합쳐질 때, 은 한국 드라마 사상 가장 ‘신기한’ 추리 드라마가 된다.

스토리와 절묘하게 연결되는 대사들

강오수와 그 주변 인물들, 그리고 아직 정체가 모호한 변호사 오승하(주지훈)를 둘러싼 연쇄살인 사건은 그 자체로 복잡한 추리물이다. 범인은 의도적으로 자신에 대한 단서를 드러내고, 관련 인물들 역시 범인이 어떤 사람일 것이라는 짐작을 한다. 그러나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확실한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시청자들은 범인이 흘린 증거들을 조합해 ‘심증’이 어떻게 ‘물증’으로 굳어질 수 있는가를 쫓아가야 한다. 그러나 의 진짜 추리는 단지 스토리를 이해하고, 범인의 트릭을 발견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강오수의 강력반 상사는 용의자의 집을 뒤지기 위한 수색영장을 내려면 증거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 자체로는 직면한 상황을 설명하는 것뿐이지만, 동시에 어떤 물증도 정확히 만들지 않고 교묘하게 법망을 피해가는 범인의 이야기도 되고, 더 거슬러 올라가 확실한 증거가 없어 혐의에서 벗어난 강오수의 이야기도 될 수 있다. 또 증거를 남기지 않고 완전범죄를 꿈꾸는 범인을 잡으려는 강오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진실”을 옹호하지만, 12년 전 강오수와 관련된 사건에서 한 사람이 칼에 찔려 죽었음에도 돈과 권력을 가진 강오수의 아버지의 힘 때문에 아무도 처벌받지 않은 그 사건을 알고 있는 오승하는 “눈에 보이는 진실”에 대한 증명부터 요구한다.

마치 의 한 문장처럼, 의 김지우 작가는 지나가는 문장과 대사를 통해 스토리에 대한 복선을 깔아놓고, 그것들이 스토리와 절묘하게 연결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래서 시청자는 범인의 범행 과정을 추리하는 재미뿐만 아니라 작가가 던져놓은 복선을 발견하고, 그것을 통해 추리한 내용들이 실제 스토리와 맞아떨어지는가에 대한 ‘제2의 추리’를 하는 짜릿한 경험을 할 수 있다. 기존 한국의 추리 드라마가 그 수도 적었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 범인이 ‘누구냐’에 초점을 맞췄다면 은 범인의 정체를 스스로 서서히 밝혀나가는 대신 범인이 ‘어떻게’ 그런 트릭을 보여줬는지 추리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며, 그 이상으로 스토리와 작가가 깔아놓은 작은 복선들을 더해 이 그려내는 ‘모든 것’을 발견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에서 이미 이야기의 시작과 끝이 모두 완결되는 치밀한 스토리 구조 안에서 종교적인 죄와 복수, 속죄의 과정을 그렸던 박찬홍 PD와 김지우 작가는 에서 그것을 더욱 치밀하게 이뤄내면서 추리 드라마에 ‘추리 이상’의 것을 불어넣고 있다. 에서 설사 범인이 잡힌다 해도 과연 자신의 죄 때문에 모든 것이 시작됐다는 것을 알게 된 강오수는 진실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을까. 또 그 범인의 복수의 동기와 방법론의 문제는 과연 윤리적이라 할 수 있을까.

특히 강오수가 권력자의 아들이면서도 지적으로 부족한 형사고, 오승하가 자수성가한 인물이면서도 사법고시를 수석으로 합격한 인물이라는 설정은 흥미롭다.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의 학력이 바뀌고, 가난한 자는 어려운 여건에서 뛰어난 지성을 바탕으로 위에 있는 사람과 대립각을 세운다. 더 이상 ‘개천의 용’이 나기 어려울 만큼 빈부 격차가 고착화되고 있는 한국에서, 상반된 설정을 가진 두 사람의 모습은 두 사람이 짊어진 윤리적 문제와 함께 에 더 깊은 메시지의 힘을 실어줄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부자와 가난한 자, 복수하는 자와 복수를 당해야 할 자, 그중 누가 옳고 그른 것인가. 아니면 이들의 화합 가능성은 존재하는가. 이는 가난했던 주인공이 쌍둥이 동생의 신분을 빌려 권력자들에게 복수를 벌인 의 그것과 비슷한 구조다. 그러나 이 상대적으로 더 뚜렷한 선악 구도 안에서 막강한 재력을 가지게 된 주인공이 마치 전지전능에 가까운 능력을 발휘하며 복수를 했다면, 에서 복수를 벌이는 자는 동시에 ‘범인’이기도 하며, 돈 대신 12년의 시간 동안 발로 뛰는 노력을 통해 “할 수 있는 한 많이 작업”하여 복수를 실행한다.

12년의 시간을 쏟아부은 복수 작업

은 마치 신과 같은 심판자의 입장에 선 주인공을 중심으로 성경 구절을 인용하고, 은 선과 악 사이에서 고뇌했던 근대적 인간이 등장한 (!)의 구절을 인용한다. 그리고 그만큼 은 보다 더욱 복잡한 문제들을 더욱 풍부한 지적 유희와 함께 진행하고 있다. 물론 아직 전체 방영분의 반이 채 지나지 않았지만, 지금의 흐름을 그대로 유지한다면 은 한국 추리 드라마가 드디어 범인이나 반전이 무엇이냐는 것과 관계없이 그 과정에 치밀하게 깔린 모든 것들을 즐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작품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것은 현재 독특한 과도기를 맞이하고 있는 한국 드라마가 보여주는 ‘신기한’ 가능성이다.

‘한국산’ 특성 살린 20시간짜리 추리물

한류의 붐과 함께 드라마 산업은 놀라울 정도로 성장했고, 국내에서도 드라마 시장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사람과 돈 모두가 드라마로 몰려들고 있다. 한국 드라마는 아직 시즌제나 사전제작제 드라마 제작이 불투명한 상태이며, 이런 상황에서 한국 드라마는 해외의 〈CSI〉처럼 완전한 장르 드라마이자 시즌제 드라마를 만들어내기 어렵지만, 제작진의 역량에 따라 시대의 평균적인 수준을 벗어난 ‘기괴한 시도’를 할 수도 있다. 만약 한국에서 철저한 사전제작제가 가능했다면 드라마의 시작부터 끝까지 단 한 회, 단 한 장면도 놓치면 어딘가 이가 빠지는 것 같은 이나 같은 추리 드라마는 제작되기 어렵다. 아직 국내의 장르 드라마에 대한 대중적인 표준이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은 성장한 드라마 산업과 제작진의 역량이 만나 결코 ‘산업화’될 수 없는, ‘작가주의’에 가까운 미니시리즈를 만들어냈다. 이는 한국식 장르 드라마의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준다.

지난 몇 년간 한국에서는〈CSI〉와 , 혹은 〈ER〉를 모범으로 한 수사와 의학 드라마를 만들려 했다. 그러나 제작 여건과 시청자의 정서가 모두 다른 상황에서 〈CSI〉와 는 일종의 이상에 가까웠다. 오히려 한국의 장르 드라마에 필요한 것은 굳이 ‘한국산’임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산’의 특징을 최대한 살리는 것이었다. 이외에도 최근 대중성과 작품성 어느 한쪽이라도 일정 이상의 성과를 거둔 작품들은 모두 이 ‘한국식 장르 드라마’의 특징을 담고 있다. 이 일주일에 2회씩 방영되는 한국 미니시리즈의 특성 안에서 스토리 하나가 끝까지 이어지는 20시간짜리 추리 드라마를 만들었다면, 문화방송 은 20부 분량의 미니시리즈 안에서 메디컬 드라마의 형식을 통해 지금의 한국 사회에 대한 매우 뚜렷한 어떤 관점을 제시했다. 에서 장준혁(김명민)을 통해 묘사되는 인간 군상의 모습은 바로 지금 한국 사회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고, 이것은 시청자에게 을 통해 바로 지금 자신의 문제에 대해 ‘철학’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멜로 강조하며 4회씩 스토리 끊은

반면, 문화방송 는 한국 드라마의 특성과 미국 수사 드라마의 중간에서 적절한 타협점을 찾았다. 는 기존 미니시리즈처럼 주인공 차수경(고현정)을 중심으로 한 메인 스토리가 있고, 차수경과 김재윤(하정우)의 멜로가 강조되는 한편, 각각의 사건을 4회 정도로 끊으면서 미국식 수사 드라마의 특성을 가져오기도 한다. 에는 〈CSI〉처럼 과학수사가 등장하기도 하지만, 수사의 핵심에는 ‘발로 뛰는 수사’를 내세우고, 범인을 잡겠다는 사명감보다는 개개인의 복잡한 사정에 괴로워하며, 멋진 수트 대신 낡은 점퍼를 입고 뛰어다니는 ‘한국식’ 강력반 형사들이 있다. 한국방송 이나 문화방송 등 〈CSI〉처럼 과학수사의 디테일이 부각됐던 작품들이 뛰어난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저조한 반응을 거둔 것은 현재 한국 시청자가 장르 드라마에서 무엇을 원하는지 보여준다. 메디컬 드라마 SBS 역시 매회 각기 다른 환자의 에피소드를 다루면서 와 같은 해외 의학 드라마와 유사한 구성을 취하지만, 그 중심에는 4각관계와 출생의 비밀 등 한국 드라마의 익숙한 설정들을 넣어 더 대중적인 안전장치를 마련했다. 물론 의 표절설과 출생의 비밀 같은 진부한 설정과 지나친 우연의 남발은 충분히 비판받아야 하지만, 가 20%를 넘는 시청률을 올리며 대중적인 성공을 거둔 것은 지금 한국 장르 드라마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즉, 지금 한국의 장르 드라마는 완성된 상태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혼란스러운 과도기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수사와 의학 드라마로 대표되는 한국의 장르 드라마는 매우 독특한 과도기를 통해 한국식 장르 드라마의 형식을 실험하는 과정일 수도 있다.

배짱 부리며 독특함 작품 만들어가길

미국의 〈CSI〉나 처럼 엄청난 제작비를 들여 완벽한 디테일을 만들어내기 힘들고, 또 한 회를 놓치면 그 다음 회를 보기 어려울 만큼 에피소드보다는 전체적인 스토리가 강한 것이 한국 장르 드라마의 특징이다. 하지만 미국처럼 에피소드 위주의 장르 드라마를 만들기는 어려울지라도, 한국 드라마는 그 상황 안에서 나 처럼 한국인에게 익숙하거나, 혹은 처럼 한국 아니면 어디서도 이런 ‘배짱’을 부리기 어려운 독특한 작품을 만들어내고 있다. 물론 한국 장르 드라마가 정착하기 위해서는 매끈하게 잘 만들어진 대중적인 장르 드라마가 더 많이 만들어져야 하고, 미니시리즈 대신 시즌제 드라마가 정착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설사 그 시대가 오지 않는다 해도 무슨 상관일까. 바로 지금, 이미 한국의 장르 드라마는 이나 처럼 “할 수 있는 한 많이 작업”하여 “오직 그것밖에” 생각할 수 없는 작품들을 만들어내고 있으니 말이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