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6호 글에 대한 619호 김남수씨의 ‘춤의 바깥으로 눈을 떠라’ 반론의 재반론… 외국의 인정을 과하게 받아들이지 말길… 춤·삶·몸으로 사유하자는 데는 동감
▣ 이지현 무용평론가 amooni@hanmail.net
자고 일어나니 뻔한 인상 비평만 하는 주류 비평가가 되어 있다. 한편으로는 어이없는 실소가, 또 한편으로는 가슴 한쪽이 아리다. 춤 예술을 기반으로 충분히 주류인 사람조차도 주류 언론이 손을 안 들어줬다고 비주류라서 불공평하다고 섭섭해하는 세상이 하도 이상해, 작품을 열심히 보고도 감흥이 안 일어나서 가슴을 끙끙 앓으며 글을 썼다가 반박문을 받았다.
‘새로운 의미의 생산’을 제안하기까지
나에게 주류는 목에 힘을 준 교수님과 왠지 무서워 보이는 평론가 선생님들, 그리고 언론의 적당한 조명과 찬사를 받는 멋져 보이는 무용가들이었다. 분명 과거에는 그랬다.
근데 요즘은 사는 일이 더 팍팍해졌는지, 경쟁이 더 치열해진 건지, 욕심이 더 많아진 건지 분석 안 되는 상황이다. 즉, 그럴듯해 보이는데도 더 진한 미사여구로 세상을 다 구원할 거 같은 예술로 칭송을 하고 칭송받는 풍토를 받아들이기 어려워 새로운 예술춤의 현상으로 고민을 해보자 했다가 세상 돌아가는 것 모르는 주류 비평가로 지목되고 말았다.
나는 어릴 때부터 세상에서 보낸 시간보다 무용실에서 보낸 시간이 더 많은, 전형적인 무용을 배워서 익힌 춤 전공자 출신이다. ‘춤은 모든 예술의 어머니’란 경구를 유일한 자부심으로 삼으며 춤을 배웠고, 열심히 연습을 하면 좋은 무용가가 되는 줄로만 알았던 순진한 아이였다. 주류 교육을 해주신 부모님 덕일까? 대학의 전공자가 되었고, 무용실 밖 세상을 보기 시작했다.
춤으로 돈을 버는 일을 죄악시한 20대를 보낸 대가로 마흔이 넘은 나이까지 변변히 내세울 게 없다. 그럼에도 어쩌다 정말 우연으로 ‘평론가’란 직함을 갖게 되었지만 무용과의 대학 교육에서는 춤 이론을 배울 수 없었다. 이리저리 학문적 동냥을 하고 다녔지만 변변히 춤에 대해 토론이나 연구를 해볼 기회를 갖지 못한 게 사실이다. 그저 춤을 춰본 경험으로, 춤을 만들고 공연해본 경험으로, 또 하나 춤이 좀더 우리네 세상살이와 가까이 있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단순한 희망에 평론가 직함을 달고 글을 써온 것은 정말 순진하고 무지한 생각이었던 거 같다.
그런 자세에 문제가 있음을 통감한다. 무용평론가 김남수씨의 글을 통해 나는 비평 일에 전면적으로 몰두하지 못한 채 비평 작업을 해온 내 게으름과 무성의를 깊이 반성하고 논리와 고민의 빈약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예술춤이 제도적 속성들과 길항하며 자기만의 고유한 세계를 일궈가야 한다는 믿음으로 작은 노력을 하는 무용가들이 있다면 그 족적을 글로 다시 표현해주거나 그들의 고민을 확대해주고자 했다. 무용가의 작은 노력들을 흔드는 큰 힘들에 대해서는 있는 힘을 다해 객관적으로 비판해주거나 춤의 소소하고 구체적인 문제들을 같이 고민해보는 것을 나의 구실로 생각한 것이다. 때론 그런 생각을 잘 드러내지 못하는 모자라는 글을 쓰고 행동을 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런 고민과 방향은 예술춤이 제도와 사조에서 벗어나 사유와 철학의 대상이 되리라고 전망한 아서 단토의 견해에 동감하게 했고, 그러기 위한 하나의 경로로 춤이 자신의 의미 집적의 역사 속에서 ‘새로운 의미의 생산’을 향해 나아가야 함을 제안한 것이다.
과연 춤의 안쪽에 움집을 지었나
과연 김남수씨가 말하듯이 의미를 생산하는 일이 무용계가 여태껏 해온 일이며, 그래서 하나도 대안적이지 못할 뿐 아니라 춤의 내재적 변화만을 중요시하는, 밖을 보지 않고 “춤의 안쪽에 움집을 짓는” 또 하나의 행위인가? 그것을 고민하는 것은 “자족적인 내면으로 스스로 소외”시키는 일에 지나지 않은 것일까. 김남수씨는 이 지점에서 대중이라는 개념을 놓치고 있다. 대중을 떠올리지 않고 의미를 생각하면 그것은 예술가의 머릿속에만 있는 예술적 의미의 고민으로 추락하게 된다. 그런 고민은 어제나 오늘이나 예술적 고민이었고, 춤의 내부적 규칙에만 집착한다는 우려를 낳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춤이 의미를 나눠온 대상은 그것을 수용한 대중이었고, 의미는 대중에 의해 걸러지고 대중 속에 내장돼왔다. 좁은 제도 예술계의 생존 논리에 의해 조작되는 의미가 아니라 대중 속에 살아 있어 대중에게 기억되고 이해되는 역사적 의미를 말한다. 그런 의미를 새롭게 창조하기 위해 춤 예술가들은 우리 춤의 역사를 대중적 관점으로 되짚어 춤언어의 의미들을 다시 들춰봐야 하며, 독특한 의미 집적 과정과 패턴을 짚을 수 있는 안목을 갈고 닦아야 할 것이다.
새로운 안목의 언어를 지금의 춤예술로 가져오기 위해서는 춤으로 사유하는 방식을 배우고 그 전체를 담아낼 자유분방한 춤놀이를 거침없이 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과거에서 현재와 미래까지를 담아내는 거침없는 수직적 속도감과 현재에 정지해 언제라도 한판 벌려 춤으로 놀 수 있는 판벌림의 신명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 전체 과정이 발레라는 형식에 잘 축적돼 있는 보리스 에이프만의 작품을 부러워했던 게 사실이다. 정영두의 춤을 주목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춤놀이의 신명이 미약한 우리 풍토에서 새로운 단계 진입을 위한 정영두의 고민이 엿보였던 것이다.
나는 예술춤에 대안적으로 서구의 사조들이 모델로 제시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예술가의 살아 있는 감각이 우선시되지 않고 거대한 모델이 사조로서 버티고 있을 때 그 예술은 또 하나의 형식을 복제하거나 의미를 반복 생산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김남수씨가 현란한 무대공학이나 지엽적인 표현에 주눅들지 말라 하면서 그것을 방향성으로 제시하는 것은 문제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습작의 시절에 부분적으로 지금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여러 형식들을 체험하는 공부를 하는 것도 좋고 세계에 열린 마음을 갖는 것도 좋다. 하지만 그것이 작품 판단의 잣대로 작용하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나아가 우리 젊은 예술가들에게 지침이 될까 걱정스럽다. 게다가 외국에서 인정받으면 훌륭한 작품이 되는 식의 경로를 만들고 평론이 이를 과하게 해석한다면 예술가들을 소진하게 만들 ‘불건강의 사례’가 만들어질 것이다. 소진한 예술가가 다른 보상을 바라지 않을까 두렵기도 하다.
내부로 향하는 시선 놓치지 말아야
많은 얘기를 작은 지면에 담으려는 욕심이 설명 부족한 문장을 만들었고 그것이 오해를 낳은 거 같다. 그러나 김남수씨의 주장과 나의 글에서 많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일단 춤과 삶과 몸으로 사유하고 철학하자는 표현들이 그렇고, 지금의 예술춤이 고립적이고 폐쇄적이어서 빨리 세상으로, 대중과 함께하러 벽을 깨고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그렇다. 나는 김남수씨 표현대로 춤이 “이 대지 위에서 길어올린 성찰 속에서 몸과 삶을 사유하고 몸으로 철학”하기를 바란다. “우리 무용가들이 이 세계와의 전면적인 관계를 회복”하기도 바란다. 거기에 하나 더, 외부의 세계를 예민하게 직감하는 한편 외롭더라도 담담히 춤의 길에 몰두하며 자신의 내면에 귀기울이는 내부로 향하는 시선도 놓치지 않길 바란다. 밖으로는 역사와 대중, 안으로는 자신의 현재성을 놓치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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