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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클한 고전미, <사랑과 야망>

등록 2006-03-10 00:00 수정 2020-05-03 04:24

20년만의 리바이벌로 ‘현대극’에서 ‘시대극’이 된 김수현표 드라마
차화연-한고은과 이덕화-이훈, 배우들의 운명은 비교를 피할 수 없네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20년 만의 리메이크다. <사랑과 야망> 원작은 1986년 방영되기 시작했고, <사랑과 야망> 리메이크작은 2006년 방영되고 있다. 사실 리메이크라기보다는 리바이벌에 가깝다. 줄거리도 그대로고, 캐릭터도 변함없고, 시대 배경도 유사하다. 김수현 작가, 곽영범 PD의 호흡도 그대로다. 물론 연기자는 바뀌었다. 시대 배경도 60년대부터 80년대까지에서 90년대로 확장되고, 결말도 애증에서 화해로 바뀐다고 한다. 그래도 혹은 그래서 시청자들은 20년 만의 드라마를 보면서 20년 전을 떠올린다.

“정애리와 조민기는 부부 같다”

<사랑과 야망>의 시청자 게시판에는 중·장년 시청자들의 소감이 심심찮게 올라온다. 이들은 드라마를 보면서 지금은 떠난 사람을 떠올린다. 20년 전 할머니와 함께 보던 추억에 젖고, 이제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고, 오래전의 일기장을 꺼내어본다.

“4회를 보고 서랍 깊숙이 넣어두었던 나의 스무 살의 기록들을 들여다보았다, “할머니는 돌아가셨지만, 할머니와 함께 보던 <사랑과 야망>을 다시 보게 돼서 감회가 새롭네요”(당시 초등학생 시청자), “드라마를 보지 않습니다… 그러던 제가 <사랑과 야망>만은 손꼽아 기다리면서 시청하게 됐습니다”(중년 사내도 보는 사랑과 야망). 매체의 특성상, 추억의 영화는 다시 재생해서 볼 수 있지만 추억의 드라마를 다시 보기는 어렵다. <사랑과 야망>은 원작 같은 리메이크로 시청자들의 향수를 자극하고 있다. 시청률 15%를 넘나들고 있는 <사랑과 야망>은 시청률 40%를 넘는 드라마가 되기는 힘들다. 10~20대 시청자들을 끌어당기는 드라마는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30대 이상의 마니아 드라마로 시작한 <사랑과 야망>은 중·장년층을 브라운관 앞으로 모으고 있다.

배우들은 비교의 운명을 감수해야 한다. 시청자들은 미자 역의 한고은을 보면서 원작의 차화연을 그리워하고, 태수를 연기하는 이훈을 보면서 이덕화의 카리스마를 떠올린다. 조민기(태준)는 남성훈, 정애리(어머니)는 김용림과 비교를 피해갈 수 없다. 시청자들은 오늘의 배우를 보면서 옛 배우의 그림자도 겹쳐본다. 게시판의 관심사도 배우들의 연기다. 일단은 리메이크작 배우들의 연기가 원작 배우들의 연기에 미치지 못하지만, 조금 더 기다려보자는 평가다.

한고은은 미자 역할로 시험에 들었다. 시청자 임정아씨는 게시판에 올린 글에서 “<사랑과 야망>에는 미자가 안 보인다”며 “미자를 안간힘으로 연기하는 연기자 한고은이 보일 뿐”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이훈은 이덕화를 흉내내는 듯 보이지만 카리스마는 이덕화에 견줘 2% 부족하다. 정애리의 억척 어멈 연기는 무난하다면 무난하지만, 억척 어멈은 무릇 이러해야 한다는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가늘고 높은 목소리로 사사건건 독을 품는 정애리씨의 목소리도 좀 부담스럽다”는 평이 나온다. 조민기는 호평을 받지만, 40대 배우가 연기하는 대학생 연기는 감정이입을 방해한다(원작의 남성훈도 40대였다. 김수현 작가의 취향이다). 정애리와 조민기가 밥상에 마주 앉으면 모자가 아니라 부부 같다는 혹평도 나온다. 다만 태수의 동생 선희를 연기하는 이유리의 연기가 원작을 뛰어넘는다는 호평을 받고 있다. 그래도 세월이 약이다. 극중에서 세월이 흐르면 조민기의 나이는 극중의 나이와 비슷해질 것이고, 한고은의 안간힘도 정애리의 목소리도 서서히 안정을 찾을 가능성이 크다. 벌써 이훈은 모처럼 적역을 맡아서 전작들의 ‘오버’를 벗어나고 있다. 무엇보다 <사랑과 야망>의 캐릭터들이 내뿜는 매력은 연기의 부족을 메우고 있다.

80년대의 <사랑과 야망>이 동시대와 맞닿은 현대극이었다면, 2000년대의 <사랑과 야망>은 시대극으로 소비된다. 먼저 연극배우 같은 김수현식 발성에 김수현식 고어가 얹혀진다. 무언가를 잘못하면 “맹추 같은 것”이라는 말을 듣고, 청소하라는 말을 “소제해라”고 표현하고, 타박하던 어머니가 잘해주면 “그 노인네 개심하셨나”라는 대사가 나온다. 배우의 목소리만 들으면 예전의 라디오 드라마 같다. 미자의 표정과 동작에는 70~80년대 한국 영화의 여주인공들의 연기를 떠올리게 하는 과장이 묻어 있다.

게다가 미자의 스타킹 위로 겹쳐 입은 흰 양말 패션, 태수의 야전점퍼에 군화를 고수하는 군복 패션, 태준의 대학생 교복 패션도 시대극의 느낌을 더한다. 인물의 관계도 원형질 그대로 단순하다. 오빠는 동생을 사랑하고, 동생은 오빠를 따른다. 고향을 떠나는 태수와 동생 선희의 이별은 연인의 이별 못지않게 애달프다. 친구는 친구에게 무엇이든 바친다. 태수는 친구 성균을 두고 “이 자식 내가 필요하다면 불로초도 구해올걸”이라고 웃으며 말한다. 악역은 지독한 악역이지만, 악역을 제외하면 선한 의지가 가득하다. 하지만 촌스러운 캐릭터와 고전적인 연기는 오히려 드라마의 매력으로 느껴진다. 쿨하지 못해 안달하는 드라마들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사랑과 야망>은 모처럼 만의 고전미를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2000년대에도 여전히 <사랑과 야망>이 매력적인 이유다. 고전은 힘이 세다.

야망이 살아있던 ‘다이내믹 코리아’

<사랑과 야망>은 태준과 태수 형제의 대립, 태준과 미자의 애증을 줄기로 한다. 태준은 외무고시에 합격하고, 태수는 건설업자로 성공한다. 태준이 화이트칼라를 상징한다면, 태수는 블루칼라를 은유한다. 탈 많고 정 많은 태수와 냉정하면서 쌀쌀맞은 태준의 대립은 근대의 합리성과 한국적 정서가 대립하는 양상을 대변한다. <사랑과 야망>은 여성의 야망에도 눈을 돌린다. 시골처녀 미자는 혈혈단신 상경해 영화배우로 성공한다. 하지만 미자의 성공에도 우여곡절은 끝나지 않는다. <사랑과 야망>은 애증을 불러일으키는 미자를 통해 여성의 성공을 바라보는 한국인의 심리를 드러낸다. <사랑과 야망>은 야망을 위해서라면 사랑 따위는 버려야 하는 시대를 살았던 청춘들을 통해 한국의 현대가 어떻게 구축됐는지를 보여준다. 그래도 그때는 야망이 살아 있는 ‘다이내믹 코리아’였던 것이다. 청춘의 야망이 사라져가는 21세기에 <사랑과 야망>을 보면서 새삼 떠오르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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