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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의 사공, 배우에게 맡겨라.

등록 2006-03-03 00:00 수정 2020-05-03 04:24

연출가전과 작가전 잇는 세번째 연극 실험 축제 ‘2006 시선집중-배우전’
순웅·김정은·고재경·임형택, 네 배우가 만든 지극히 주관적인 무대들

▣ 양기찬/ 연극평론가·수원대 교수

‘2006 시선집중-배우전’(이하 배우전)은 ‘2004 시선집중-연출가전’ 그리고 ‘2005 시선집중-작가전’을 잇는 세 번째 ‘연극 축제’이다. 앞서 2004년과 2005년에서 보여준 ‘시선집중 연출가전과 작가전’처럼 이번 ‘배우전’도 연극의 시야를 현재보다 더 넓혀가려는 실험적인 주제를 택했다는 것에서 그 의의를 찾아야 한다. ‘시선집중’ 시리즈가 무대에서의 다양한 실험을 통해 극의 새로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올해의 축제 역시 연극 지평을 확장시키는 데 기여하고 있다. 연극을 구성하는 하나하나의 요소들에 대한 고찰과 조명을 기초로 하는 시선집중의 기획은 연극 전체 영역의 확대로 이전되며, 구성 요소의 각각의 중요성과 한 작품 안에서 조화된 세밀한 구실을 엿보게 한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연극을 축제의 자리에서 만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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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장 별오름극장… 작가도 연출가도 잊고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연극 요소들을 어떤 관점에서 접근하느냐에 따라 작품의 색채는 각각 다르게 나타난다. 이번 ‘배우전’은 연극의 근간을 이루는 배우들이 그들만의 특색을 마음껏 발산할 수 있도록 마련됐으며, 관객 또한 그것을 즐기며 참여할 수 있도록 준비된 자리이다. 우리 연극계에서 실험적이고 모험적인 시도라고 할 수 있는 ‘시선집중’전은 특정한 하나의 관점에서 공연을 풀어감으로써, 필수적인 연극 요소들의 조화를 재조명하고, 그에 대한 가치를 부여하는 축제이다. 이는 극의 새로운 시도와 작업, 이해 그리고 각 요소들만의 독특함을 분출시키는 힘이 되었으며, 각 분야의 새로운 발판을 구축하는 구실을 지난 축제 동안 해왔다. 그래서 해마다 ‘시선집중’이 지니는 공연의 의미는 그 중요성을 더해간다.

이번 ‘배우전’은 배우들의 특성을 통해 그들이 바라보는 작품과 세상을 관객에게 보여주고자 했다. 배우들만의 독특한 작품 읽기와 해석, 등장인물의 재구성을 시도하기도 했다. 배우와 등장인물이 일치되는 그들만의 세상인 또 다른 하나의 세상을 무대에서 창조해내는 것이다. 배우들은 연출의 의도와 작품의 흐름에 따른 움직임이나 인물 구현이 아닌 배우들 자신이 만들어내는 개성 있는 인물을 보여주려고 한다. 관객은 배우들의 많은 노력과 연습에 의해 만들어진 등장인물을 보지만, 무대 위에서 보여지는 등장인물은 주로 작가나 연출가 등 제3자의 처지에서 객관적으로 보일 수 있도록 만들어진 인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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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전통적이며 일상적인 연극 제작 행위에 직접 배우가 참여해서 자신의 인물을 구현한다는 것은 신선한 시도이다. 여기에서 관객은 배우들의 감춰진 놀라운 능력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으며, 배우는 자신의 역량을 재발견하고 과시할 수도 있다. 이처럼 연극은 누구 한 명만이 책임을 지는 작품이 아닌 모든 참여자들의 기여를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측면을 고려할 때, ‘배우전’은 앞선 두 번의 ‘시선집중’들처럼 새로운 가능성을 확인시켜주는 하나의 지평을 여는 구실을 충분히 수행하고 있다.

올해 ‘배우전’은 국립극장 별오름극장에서 모습을 드러내 막바지를 향해 치닫고 있다. 모두 4개의 작품을 선보이는데, 세 번째 작품인 고재경의 <기다리는 마음 외>(고재경 연출·작, 고재경·박이정화 출연, 2월23~26일)의 뒤를 이어 네 번째 작품인 임형택의 2인극 <아일랜드>(최용훈 연출, 아돌 후가드 작, 임형택·유하복 출연, 3월2~5일)가 ‘배우전’을 마무리한다. ‘배우전’의 첫 두 작품인 유순웅의 <염쟁이 유씨>(박세환 연출, 김인경 작, 유순웅 출연, 2월9∼12일)와 김정은의 <레티스 & 러비지>(문삼화 연출, 피터 셰퍼 작, 김정은·문형주·김세환 출연, 2월16~19일)는 실험극의 현주소를 가감 없이 보여준 공연이었다.

지금까지 선보인 ‘배우전’은 성과와 한계가 뚜렷했다. 유순웅의 <염쟁이 유씨>가 1인극이었던 반면 김정은의 <레티스 & 러비지>는 김정은이 주연을 맡은 3인 전통적 극이었다. 이 두 극을 통해 유순웅과 김정은이 각각 보여준 유씨의 역할과 레티스의 역할은 배우들이 분석하고 만들어낸 인물을 근간으로 작품 전체를 끌고 나아가 관객에게 전달해주는 데 문제가 없음을 보여주었다. 물론 1인극의 전형적인 형태를 갖춘 <염쟁이 유씨>에서 유순웅이 유씨 연기에 몰입해 때때로 감정에 치우쳐 놓쳤던 부분이 있었다. 공연의 흐름에 필요한 감정의 절제가 약간 미흡하기도 하였다.

<레티스 & 러비지>가 아쉽고도 반가운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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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티스 & 러비지>에서는 작품을 하나의 배역에서만 바라보는 시각의 문제점 등을 지적할 수 있다. 즉, 유순웅은 우리 전통의 해학적 기능을 가진 마당극 형식을 취해 죽음에 대하여 편하게 접근해보고자 한 의도와는 달리 감정적으로 극의 흐름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빠져들어 극의 흐름이 심각하고 무겁게 느껴지게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김정은은 인생을 하나의 연극으로 상상 속에서 살아가는 레티스의 시각에서 전체적인 작품을 해석하다 보니 작품이 담고 있었던 삶에 대한 순박하고 해학적인 부분이 극의 전반적인 색채를 결정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철학적인 이해와 고찰을 담고 있어야 할 부분이 공연을 통해 크게 부각되지 못하게 됐다.

이같은 두 작품의 아쉬운 부분은 어디에 원인이 있을까. 아마도 배우를 통해 구체화된 인물들의 형상화에 한계를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배우는 자신들이 원하는 배역을 완벽하게 관객에게 전달하려는 욕망이 있게 마련이다. 배우의 몫은 무대에서 자신이 맡은 배역이 살아 있는 형상으로 관객에게 다가서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물들의 삶이 무대 위에 머무는 양상을 관객에게 여과 없이 전달하는 게 배우의 숙명이다. 그러므로 유순웅과 김정은이 만들어낸 그들만의 해석을 토대로 한 인물들은 어쩌면 객관성이 결핍되어 보인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객관성의 결핍이 오히려 현실적인 인물을 만들기도 한다. 연출과 제3자의 시각을 의식해 만들어진 또는 이야기의 구조에 알맞게 형성된 인물들이 표면적이라면, 배우들의 해석을 통해 만들어진 인물들의 깊이는 삶의 한 단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세 번째 공연인 고재경의 <기다리는 마음 외>는 옴니버스 형식의 공연으로 마임을 통해 관객이 잊고 지내던 자연스러운 일상 속에 숨쉬는 웃음과 유머로 새로운 희망을 그려냈다. 그리고 ‘배우전’의 대미를 장식할 작품인 임형택의 <아일랜드>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무거운 과거를 통해 인간의 존엄성을 보여준다. 이 두 작품 역시 배우의 작품 해석과 움직임 그리고 연기력 등에 따라 관객에게 절대적으로 전달되는 부분의 편차가 크게 나타날 수 있다. 그럼에도 배우들의 도전을 취지로 하는 이번 무대에서의 실험은 어쩌면 ‘시선집중’의 다양한 ‘예술가’들의 시선을 다시금 결집했다는 의미에서 성공적이라 할 수 있다.

이번 ‘배우전’은 확장된 다양한 연극 세계를 보여준다. 연극의 총책임자로 연출을 지목하는 현 시점에서 배우들 또한 연출만큼 연극에서 핵심 부분을 차지한다. 그런 의미에서 ‘배우전’은 관객들에게 작품의 매개체 구실을 하는 배우의 중요성을 다시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실 ‘배우전’에서 만난 배우들은 널리 알려진 이들이 아니다. 이름으로 연기를 하거나 연기를 흉내내는 배우가 아니라는 말이다. 진짜 연기를 하는 배우들의 자리가 넓어질 때 우리 연극은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다. ‘배우전’은 배우에 의한 연극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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