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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첫 영화에 오로라를 주소서

등록 2005-09-30 00:00 수정 2020-05-03 04:24

5년만에 스릴러 드라마 <오로라 공주> 완성한 배우 출신 감독 방은진
배우 엄정화가 맡은 여성 연쇄살인범의 심리 변화를 숨가쁘게 추적

▣ 김은형 기자/ 한겨레 문화생활부 dmsgud@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감독 방은진(40). 아직은 배우 방은진이라는 직함보다 어색하게 들릴 수 있다. 그러나 다음달이면 극장에서 방은진 감독이라는 크레딧을 만나게 된다. 5년간의 준비 끝에 탄생한 <오로라 공주>(이스트필름 제작)가 10월 말 관객을 찾아간다. 단편 연출을 했던 유지태 등 배우 출신 감독이 한국에 없었던 건 아니지만 장편 개봉영화 감독으로는 충무로 1호다. 개봉을 한달 앞두고 마지막 후반작업이 한창인 방은진 감독을 만났다.

시나리오 여럿 엎고 단편 연출한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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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된 메이킹 필름을 보니까 언제 저런 일이 있었나 싶더라고요. 왜 저렇게 선머슴처럼 뛰어다닐까 우습기도 하고 기분이 이상해요. 좀 두렵기도 하고.” 5년 만의 결실을 목전에 둔 소감이 의외로 담담하다. 속사정을 모르는 사람은 알려진 배우 출신이라는 게 감독 데뷔에 프리미엄으로 작용했을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 역시 여느 신인 감독들처럼 <떨림> <첼로> 등 직접 쓴 시나리오가 여러 번 엎어지는 좌절을 맛본 뒤에야 메가폰을 잡을 수 있었다. 1999년 단편 <장롱> 조감독을 비롯해 <엄마, 미안해>(2003), <파출부, 아니다>(2004) 등의 단편을 만들어온 그의 연출 이력을 보면 그의 감독 데뷔는 어느 날 갑자기 이뤄진 사건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직접 시나리오를 써왔기 때문에 처음엔 다른 사람이 쓴 시나리오를 받아들고는 많은 고민을 했어요. 스릴러라는 장르도 낯설고 여기에 내가 맞출 수 있을까 자신이 없어 불안했죠.”

<오로라 공주>는 여성 연쇄살인범의 행적을 쫓는 스릴러 드라마다. 비교적 ‘안전하다’고 할 수 있는 코미디나 멜로에 비해 아직 한국에서는 까다롭게 여겨지는 스릴러 드라마에 도전하는 그의 용기가 참신해 보인다. 여성이 주인공이라는 점, 그를 통해 장르적인 드라마 구조에서 젠더의 문제를 건드릴 수 있다는 게 그의 흥미를 끌지 않았을까. 그는 “물론”이라고 대답한다. 조금만 더 영화에 대한 소개를 하자면 이 영화는 살인범을 잡는 과정에 중심을 둔 여느 연쇄살인범 소재 영화와 달리 처음부터 범인을 공개하고 평범한 여성이 어떻게 지독한 살인을 감행하게 되는지 밝혀내는 데 초점을 맞춘다. “물론 살인이라는 게 어떤 이유로든 합리화될 수는 없겠지만, 그걸 논외로 한다면 자기에게 주어진 과제를 직접 풀어내는 여성의 행동하는 모습을 그리고 싶었어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몰려 충동적인 살인을 하는 <몬스터>의 여주인공과도 다른 여성이죠. <오로라 공주>를 한줄로 요약한다면 한 여자의 집념으로 읽혔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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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수록 내가 못돼지더라고요"

<오로라 공주>는 방은진 감독의 첫 장편 데뷔작이기도 하지만 배우 엄정화의 첫 단독 주연 영화이기도 하다. 언뜻 화려하고 발랄한 이미지의 엄정화와 차가운 연쇄살인범의 이미지는 어울려 보이지 않는다. 방 감독은 이 캐스팅을 “감독의 고집이 배우를 설득한 것이 아니라 배우의 열정이 감독을 설득한 경우”로 설명한다. “처음에는 엄정화의 이미지와 캐릭터가 맞을까 고민을 했어요. 그런데 시나리오를 먼저 본 엄정화가 적극적으로 나선 거죠. 같은 소속사인 설경구와 우리 영화 음악감독인 정재영까지 동원해서 역을 따내기 위해 애썼죠. 그만큼 잘해야 한다는 부담이 본인에게 컸겠죠. 군더더기가 없는 배우예요. 촬영하고 내 표정 한번 쓱 보고는 다시 해야겠구나 이러면서 카메라 앞에 다시 서곤 했죠. 마음고생도 꽤 컸을 거예요.”

배우 출신 감독이라 배우들의 연기지도가 좀더 수월한 장점이 있지 않을까? “다들 알아서 준비를 해오니까 특별한 연기지도를 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그래도 내가 배우를 해봤으니까 배우들의 감정 변화 같은 걸 빨리 알아차리는 좋은 점은 있었어요. 배우들이 고생스러워할 때 ‘얼마나 힘들까’ 하는 공감이 더 많이 되죠. 배우들이 감정적으로 힘들어하면 나도 힘들고.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내가) 못돼지더라고요.” (웃음) 영화에서 연쇄살인범을 쫓는 형사이자 살인범 정순정의 남편으로 문성근씨가 출연한다. 인생의 모서리를 향해 달려가는 순정의 정반대편에 있는 무기력한 인물로 문씨가 주로 연기했던 날 선 인물들과는 거리가 있다. “지식인과는 거리가 먼 인물인데, 문 선배님은 조금만 방심하면 ‘고뇌하는 지식인’이 나와요. (웃음) 방송 내레이션 같은 걸 하고 오시면 대사에 ‘논조’가 생기죠. 그래서 가끔 핀잔을 들으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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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라 공주>는 지난 3월부터 7월까지 5개월간 촬영을 했다. 장마 때문에 계획했던 촬영회차에서 3회가 늘었고, 1시간40분으로 준비했던 러닝타임이 5분 정도 늘었다. 추가 촬영이 많아지거나 예상치보다 훨씬 긴 필름을 만들어내는 따위의 신인 감독들이 자주 범하는 오류를 피해간 셈이다. “편집실에서 저보고 꼭 제작자 같다고 그래요. 보통 감독들은 더 붙이자고 하는데 오히려 나는 재미없지 않냐, 잘라내자고 자주 이야기하니까요.” 찍어놓은 장면들에 욕심이 나지 않더냐고 물으니 “나는 보여줄 게 없으니까”라는 겸손하고 간결한 대답을 들려준다. “물론 편집본을 보면서 좀더 멋을 부릴 걸 그랬나 하는 아쉬움도 있었어요. 그렇지만 전문적인 연출을 오랫동안 공부해온 사람이 아니니까 스타일은 아직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볼거리보다는 인물을 중심에 놓았어요. 어떻게 인물들을 돋보이게 할 것인가, 인물들의 심리 변화를 어떻게 화면에 드러낼 것인가를 촬영감독과 가장 많이 이야기했어요. 마지막 장면에서 순정의 모습이 가장 예쁘게 나오는데 꽤 근사해요.” (웃음)

1989년 연극 무대로 데뷔한 뒤 영화 출연 이력만 10년. 배우를 하면서도 연기뿐 아니라 감독, 스태프들과 영화에 대한 큰그림을 이야기하기 즐겨하면서 그는 ‘영화는 결국 감독의 것’이라는 생각을 해왔다. 이제 수많은 스태프들과 한편의 장편영화를 완성한 뒤 그의 생각은 좀 바뀌었다. “그 자리(감독) 꽤 괜찮은 자리예요. (웃음) 그만큼 책임도 많아서 돌아버리는 자리이기도 하죠. 그런데 감독을 하고 보니까 영화가 과연 감독의 것이냐 하는 의문이 들어요. 배우로 출연할 때는 저쪽 조명기 끝에서 분투하는 막내 스태프들을 보면서 왜 저렇게 빛도 안 나는 자리에서 고생들을 할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작품을 끝내고 나니 막상 떠오르는 얼굴들은 이런 친구들이예요. 이 친구들 없으면 영화가 완성될 수 없었거든요. 결국 영화는 감독의 것이 아니라 이 까다롭고 골치 아픈 작업에 참여한 모두의 것인 것 같아요.”

조명기 끝 막내 스태프가 떠올라

어떤 사람들이 내 영화를 보러 올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극장을 찾을까 하는 궁금증과 긴장이 조금씩 다가올 무렵이다. “관객의 취향이나 입맛을 맞춘다는 건 모순인 것같아요. 객관적으로 데이타화할 수 없는 기준이고, 또 누구나 영화를 만들면 결국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싶어하니까요. 그러나 재미있다는 게 뭘까 하는 고민은 영화를 만드는 내내 했던 것 같아요. 어차피 재미나 취향이라는 게 딱 떨어지는 정답이 없는 거라면 최소한 영화를 가지고 사기치지는 말자고 다짐했죠. <오로라 공주>가 어떤 반응을 얻을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영화를 보고 ‘속았네’라는 이야기는 듣지 말자는 게 저와 배우들, 그리고 스태프들의 공통된 바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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