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전업작가는 무엇으로 사는가

등록 2005-04-07 00:00 수정 2020-05-03 04:24

<font color="darkblue">시장 기능 작동하지 못하는 국내 미술계… 화랑 중심의 작품 유통 통로 ‘미술은행’이 돌파할까</font>

▣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4월8일부터 한달 동안 경기도 용인시 기흥읍에 있는 이영미술관에서 ‘숲 사이, 너머’전을 여는 화가 이재삼씨. 그가 아주 특별한 재료로 작품 세계를 일구고 있다. 일반적으로 드로잉이나 밑그림에 쓰이는 ‘목탄’으로 오브제 작업을 하다가 특유의 질감이 캔버스에서 살아나도록 하는 것이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목탄을 회화의 재료로 삼은 작가라 하겠다. 그는 목탄가루가 캔버스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직접 접착제를 고안해 여러 겹으로 밀착시켜 그림을 완성한다. 그의 ‘목탄화’는 넓이가 6~10m에 이르는 대작이라 넓은 전시장이 아니라면 걸리기 힘들다. 그의 작품이 미술시장에 진입하는 통로가 비좁을 수밖에 없는 건 당연하다.

[%%IMAGE1%%]

큰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화가 이재삼

그렇다고 이재삼씨의 작품이 미술계에서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지난해 그의 열네 번째 개인전 메인 작품이었던 7.7m 크기의 <저 너머>가 국립현대미술관의 소장품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문화 자산을 확보하고 현대미술을 활성화하기 위해 해마다 작품을 수집하고 있다. 지난해만 해도 50억원 이상의 예산으로 국내 작품 107점(31억5천만원), 해외 작품 8점(17억7천만원)을 모았다. 여기에 그의 작품이 선정된 것은 여러 의미가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 이추영 학예사는 “근현대 미술사에서 거론해야 할 작품들을 수집하고 있다. 이를 통해 작가의 작품활동을 지원하는 의미도 있다”고 말한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은 모두 5404점에 이른다. 이 가운데 구입한 작품은 2338점이고 나머지는 기증(2874점)과 관리전환(192점)된 작품이다. 과학적인 보존 처리를 마친 뒤 영구 소장되는 이들은 미술사 연구와 교육 자료로 쓰이며 다양한 전시회를 통해 일반에 공개된다. 국립현대미술관이나 리움미술관 등이 자신의 작품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기분 좋은 일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소장품에도 등급은 있게 마련이다. 스페인 출신의 화가 안토니 파티에스의 작품은 무려 5억8천만원을 들여 구입하는가 하면 국내 작가의 작품은 100만원 수준에서 가격이 결정되기도 한다.

그나마 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되거나 일정 계약을 맺은 작가라면 사정이 나은 편이다. 어떤 식으로든 작품성을 인정받아 이런저런 기회를 얻는 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기업형 화랑은 ‘전속 작가’를 두고 생활비와 작품활동 경비 등과 함께 작업실을 제공하기도 한다. 이런 지원은 ‘예술가의 집단화’라는 폐해에도 불구하고 해당 작가에게 유용한 게 사실이다. 이색적인 오븐점토 ‘스컬피’(Sculpey) 작품을 선보인 이동욱씨는 30대 초반의 젊은 작가로는 드물게 충남 천안시에 있는 아라리오갤러리의 전속작가로 뽑혀 매달 300여만원을 지원받고 있다. 지난해 국립현대미술관의 ‘일상의 연금술’전에 선보인 그의 작품이 가능성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IMAGE2%%]

그동안 작가들을 활발하게 지원한 화랑으로는 가나아트센터를 꼽을 수 있다. 가나아트센터는 2002년 2월 서울 종로구 평창동에 작가스튜디오를 개관하면서 작가들에게 ‘아틀리에’를 제공했다. 지난해 4월 2기 작가 9명이 입주했다. 가나아트센터는 평창동의 ‘가나 아틀리에’와 함께 안성·양평·파리 아틀리에를 운영하고 있다. 아틀리에에 입주한 사람들은 대부분 국내에서 명성을 얻은 중견 작가들로 정기적으로 ‘아틀리에 사람들’전에 참여하며 개인전을 열기도 한다. 이렇게 작가들을 지원하는 화랑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리 갤러리를 기웃대도 전시장에 작품을 선보일 기회가 막힌 작가들이 수두룩하다.

전속작가 1500명… 화랑과 타협하라?

현재 국내에서 ‘전업작가’로 활동하며 한국전업미술가협회(이사장 김춘옥)에 가입한 사람만 해도 1500여명이나 된다. 이들은 지난 3월19일부터 열흘간 서울 서초동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2005 KPAM(Korea Professional Art Mall) 미술제’를 마련했다. 이 행사는 전업작가들의 자생적인 미술제로 열렸다. 당시 비슷한 경향의 작품으로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여러 작가에게 미술시장의 좁은 문을 열었다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지난해 협회가 회원들을 대상으로 한 ‘한국 전업미술가 실태조사’는 전업작가들의 열악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줬다. 예컨대 응답자의 96%가 창작 수입만으로는 생계 유지가 불가능하다고 대답했다.

사정이 이렇기에 이재삼씨는 ‘전업작가’라는 말에 심한 거부감을 느낀다. 애당초 그는 작품활동만으로 생계를 해결할 수 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미술시장의 흐름에 민감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디자인 프리랜서로 생활비를 충당하고 있다. 거칠게 말하면 ‘염불보다 잿밥’에 관심을 갖지 않고 자신의 세계를 일구려는 것이다. “국내에서 전업작가는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한번도 미술시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우리 실정에서 작품을 팔아서 작품활동을 할 수 없다. 이런 실정에서 작가가 작품을 파는 데 신경쓰다 보면 작가의 영혼이 망가질 수도 있다.”

[%%IMAGE3%%]

한때 이재삼씨도 화랑과의 상생관계를 도모했다. 화랑을 통하지 않으면 자신의 작품이 작업실 밖으로 나가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국내에서 화랑의 생존 기반이 작가를 ‘이용’하는 데 치우쳐 있기 때문이다. 화랑과 작가가 서로를 위해 ‘윈윈’하기보다는 화랑의 입맛에 맞는 작품을 ‘생산’하면서 관계를 유지해야 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세계를 대작 중심으로 펼치고 싶었다. 하지만 화랑으로서는 전시 공간도 마땅치 않은 대작만 취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그는 유명 화랑의 제의를 마다하고 조건 없이 작업실을 제공한 이영미술관에 입주해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물론 작가와 관계를 맺는 화랑은 상업적인 판단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기업형 화랑은 작가의 매니저 구실을 한다. 만일 작품이 괜찮고 상품성이 있다면 해외의 아트페어에 진출할 기회도 제공한다. 여기에는 다양한 형식으로 경제적 부담이 따르게 마련이다. 이런 상황에서 지명도가 높지 않은 작가에게 일방적인 지원만 하기는 힘들다. 예술적 경향이 두드러진 국제갤러리의 손성옥 큐레이터는 “화랑마다 관심을 갖는 분야가 다르고 좋아하는 작품 분위기가 따로 있다. 그래서 알려진 작가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고 젊은 작가들에게 눈을 돌려도 이미지가 화랑과 어울려야 한다. 작품을 구매하려는 사람도 화랑의 분위기를 중시한다”고 말한다.

아트펀드의 등장과 세계시장의 조짐

해마다 대학에서는 수많은 예비작가들을 배출한다. 이들이 상업적인 화랑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기도 어렵다. 아무리 각종 예술상과 공모전에서 ‘검증’을 받은 작가라 해도 생존의 기반을 닦을 수는 없다. 미국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피카소의 <파이프를 든 소년>이 1억400만달러에, 조선자기가 수백만달러에 거래되더라도 그림의 떡일 뿐이다. 서울옥션하우스에서 열리는 한국 근현대 및 고미술 경매는 국내 대가의 공인된 작품이 아니라면 목록에 오르기도 힘겹다. 최근 서울옥션이 젊은 작가들의 온라인 거래시장으로 마련한 작가관에서 10여일 만에 3500만원 상당의 거래실적을 올린 것을 위안으로 삼을 만하다.

요즘 세계 미술시장은 되살아나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지난해 세계 주요 미술 경매시장에서 현대미술 거래액이 7억5천만달러에 이르렀다. 요즘 세계 경제의 위축으로 뭉칫돈이 미술시장에 몰려들어 ‘아트펀드’가 조성되는 흐름을 반영한 것이다. 게다가 세계 대형 미술관들이 각국에 분관을 세우며 ‘문화의 세계화’를 이끌고 있다. 이미 스페인의 빌바오, 이탈리아의 베니스, 독일의 베를린 등지에 분관을 세운 구겐하임미술관은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를 비롯해 홍콩과 대만의 타이중 등지에 분관을 세우려 하며 프랑스 루브르박물관과 뉴욕 모아도 분관을 준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작가의 작품이 해외에서 거래되기도 한다. 지난해 홍콩에서 열린 크리스티의 ‘아시아 현대미술 경매’에서 국내의 젊은 작가 6명의 작품이 낙찰되는 성과를 올렸다. 이미 해외에 진출한 화랑도 있다. 하지만 이들은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많다. 국내 작가들의 작품을 프로모션하기보다는 해외 작가들의 작품을 국내에 들여오는 데 충실할 뿐이다. 지명도가 높은 해외 작가들의 작품을 들여오기만 하면 장사가 되기 때문이다. 이는 기업형 화랑들이 해외 작가를 중심으로 전시회 일정을 짜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일부 화랑은 국내 작가의 전시 일정을 끼워넣기식으로 배치하기도 한다.

[%%IMAGE4%%]

그렇다면 국내의 전업작가들은 무엇으로 살아야 할까. 아예 이재삼씨처럼 전업작가를 꿈꾸지 않고 생계를 위한 자구책을 마련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을 전업작가를 소망하는 사람들이 모두 감당하기는 힘들다. 물론 영국의 진취적 작가 발굴을 위한 ‘터너상’(Turner prize) 같은 제도를 도입해 세계 시장에서 통할 만한 예술품을 내놓는 게 급선무다. 여기에 작가들을 위한 지원 시스템이 작동한다면 금상첨화다. 파리 화단을 경험한 가나아트센터 양평 아틀리에의 작가 유선태씨는 “국내에도 좋은 작가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국가와 기업, 화랑 등을 중심으로 전문적인 사람이 작가를 발굴·후원하는 제도가 취약하다. 작가에 대한 지원은 저작권료로 알 수 있듯 국가적 이익으로 환원된다”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정부가 올해 25억원의 국고를 투입해 신진작가를 지원하는 ‘미술은행’(Art bank)에 대한 기대가 크다. 그동안 정부는 공공미술이라는 형식으로 건축비의 1%를 공공미술품 설치 규정을 두어 작가를 돕도록 한 바 있다. 하지만 일부 대학과 공무원의 결탁으로 애초의 취지가 시들해진 지 오래다. 이처럼 정부의 지원책이 한계가 있는 상황에서 추진되는 미술은행은 30여년 전에 설립된 프랑스의 ‘국립현대미술재단’(FNAC) 같은 미술작가 지원 제도로서 오는 2007년 사단법인 출범까지 국립현대미술관이 운영을 맡을 예정이다. 이달 중순 합동설명회를 앞둔 미술은행 운영위원회(위원장 민경갑)는 작품 추천·심의·가격심의 위원을 선정하는 절차를 밟고 있다.

국고 25억원으로 신진작가 지원 나선다

앞으로 미술은행은 추천·공모·현장구입 등으로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사들여 공공건물에 전시하거나 기업이나 개인에게 대여할 예정이다. 미술계의 큰손 노릇을 하는 기업들이 미술품 양도세 폐지에도 움직임이 시원치 않은 상황에서 미술은행은 젊은 작가들의 작품활동에 쏠쏠한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예산을 30억원으로 늘려도 구입 작품은 수백점 범위를 넘지 못한다. 이로 인해 구입 작품 선정을 둘러싼 논란이 위원회 구성 단계에서 불거질 수도 있다. 40대 중반의 이재삼씨가 “예술가는 고독이라는 짐을 짊어지고 갈 수밖에 없다”며 어설픈 생존구조 속에 들어가기를 꺼리는 ‘소인배 같은 선비’로 남으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