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과 국가의 정체성을 흔든 남자의 욕망
▣ 이성욱/ 기자 lewook@cine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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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글은 지칠 줄 모르고 넓어져만 간다. 생존욕구가 불러온, 아니 거대해지려는 욕망이 불러내는 싸움판의 크기는 자꾸 커져만 간다. 때로 민족이나 국가의 이름으로 맞서기도 하나 끝내 그곳은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과의 싸움이 돼버린다. 무력전쟁이건 경제전쟁이건 스포츠전쟁이건 혹은 문화전쟁이건. 한국 영화가 한국이란 테두리를 좁다고 여기는 순간, 역도산을 불러내는 건 운명이었을 것이다. 조선이 조선이 아닐 때 지배자의 나라로 건너가 자신의 상품가치를 부단히 높여가야 했던 인물. 자신의 욕망을 불살라버리지 않는 한, 역도산(혹은 한국 영화)이 민족 혹은 국가라는 호명에 얽매이지 않으려는 건 운명이다. “난 일본이고, 조선이고, 그런 거 몰라. 난 역도산이고, 난 세계인이다”라고, 또 “딱 한번 사는 인생, 착한 척할 시간이 어디 있냐”라고 뇌까리는 역도산의 생존 이데올로기가 설경구의 입에서 흘러나올 때 묘한 ‘착시’ 현상이 일어난다. 그냥 스크린으로 끌어들인 한 실존인물의 투쟁기라기보다, 100억원을 넘긴 한·일 합작의 오락용 블록버스터라기보다 우리에게 민족과 국가가 무슨 의미냐고, 당신은 도대체 무엇으로 사느냐고 묻는 거대한 질문서 같다. 은 지금까지의 그 어느 블록버스터보다도 현실이란 땅에 바짝 엎드린 채 한국 영화 스스로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묻는 희귀한 영화다.
답을 명확히 할 수 없는 현실 때문이었을까, 의 이 남자는 영웅과 사기꾼, 신의와 비열함 사이의 어느 한쪽에 정착하지 못하고 자꾸 떠다닌다. 1963년 늦은 밤 도쿄의 화사한 클럽에서 자신을 없애고 싶다면 링으로 올라오라고 멋진 말을 남겨놓고는 돌아오는 차 안에서 피 흘리며 자문한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어찌된 거야?” 이렇게 시작된 영화는 시간을 다시 거슬러 올라가 스스로 답을 찾으라고 권한다. 순수 일본인이 아니면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없는 현실에 스모를 포기하는 순간, 술과 싸움으로 나날을 보내다 일본이 아닌 세계를 겨냥할 수 있는 프로레슬링을 발견하고 미국으로 건너가는 순간, 패전국의 참담함을 대리해 미국의 거인을 꺼꾸러뜨리며 일본의 영웅이 되는 역사적 순간, 그리고 영웅의 자리를 지키려 막후에서 밀어준 후원자와 결별하고 비극을 맞이하기까지가 파노라마처럼 흐른다.
무모하게도 그 남자는 승부수를 던져 얻어낸 모든 것과 싸우고 결별한다. 자신을 알아준 야쿠자 보스이자 스모 후원자 칸노 회장(후지 다쓰야)과도, 깊은 사랑과 헌신으로 정서적 버팀목이 되어준 여인 아야(나카타니 미키)와도, 그에 앞서 자신을 끔찍한 정글로 보내버린 조국과도 선을 그어버리고 만다. 그의 유일한 파트너는 도박사 같은 승부근성으로 드러나는, 멈춰설 줄 모르는 욕망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대사가 일본어로 진행되다 잠깐 흘러나오는 ‘어머니!’라는 탄식, ‘성공하자, 성공하면 웃을 수 있다. 아니 웃으려면 성공하자’는 소망이 내비춰질 때 역도산의 진짜 얼굴이 드러나기는커녕 오히려 알아볼 수 없게 흐려져버린다. 그것이 이 영화의 장점이자 단점이 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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