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 물든 아일랜드 데리시의 하루, 영화 를 본 1980년 전남대생과 계엄군의 제안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1972년 1월31일 북아일랜드 데리시의 하루를 꼬박 담은 영화 (폴 그린그래스 감독)가 지난 6월18일 국내에서 개봉됐다. 1월30일 자정 굿나잇 키스에서 시작된 화면은 분노한 청년들이 아일랜드공화군(IRA)에 입단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평화롭던 도시가 피로 물들게 되는 24시간의 기록은 1980년 5월의 광주를 그대로 빼닮았다. 스크린에 등장하는 군중과 공수부대, 돌멩이·실탄 등은 24년 전 그날을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하다. 서로 다른 자리에서 목격한 광주의 기억을 오롯이 간직한 두 사람이 영화사 ‘백두대간’의 초청으로 지난 6월22일 씨네큐브에서 를 보았다. 계엄군으로 출동한 이경남 목사(당시 11공수여단 63대대 9지역대 소속 계엄군)와 아스팔트에 나뒹구는 주검을 목격한 박몽구 시인(당시 전남대 영문과 재학). 이들이 제안하는 ‘광주 영화’는 어떤 모습일까.
수백명의 증언… 기록은 영화를 만들고
그날 아무도 미워하지 않던 시민 열네명이 평화시위 과정에서 영국군의 총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또 13명은 부상을 당했다. 영화는 30년 전에 데리시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완벽하게 재현해냈다. 마치 당시의 현장에 카메라를 들이댄 것처럼 현장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돈 뮬란이 수백명의 증언을 채록한 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영국 정부가 조사위원회에 제출된 서류마저 묵살하며 그토록 숨기고 싶어했던 진실이 거기에 있었다. 우리에게 광주의 기록은 얼마나 진실을 보여주는 것일까.
이경남(이하 이): 기록이 없어서 ‘광주’를 본격적으로 다루지 못한 것은 아닐 것이다. 광주항쟁 당시부터 광주는 기록되고 있었다. 다만 오랫동안 가해자의 증언은 제대로 조명하지 못한 게 사실이었다. 그래서 나는 4년 전 를 발표했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시각은 있지만 ‘거대한 음모’를 기획한 자들의 양심고백이 없는 것은 아쉽다.
박몽구(이하 박): 광주는 학생에서 하층민, 노동자 등 모든 계층의 연합 드라마다. 때문에 몇 사람의 목격담과 증언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광주민중항쟁을 다룬 나의 연작 장시 ‘십자가의 꿈’은 문학적 증언록이다. 도 많은 사람들의 피어린 증언집이다. 광주를 다룬다면 정말 입을 닫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증언을 해주어, 그야말로 대인간 서사시를 쓸 수 있을 것이다.
‘피의 일요일’을 재현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제작비 500만달러를 끌어모으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촬영 장소를 찾아 영국 전체를 둘러본 제작진은 더블린 북쪽의 발리문 지역을 촬영지로 선택했다. 이 지역은 70년대 데리시 구교도 구역인 보그사이드의 황폐한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제작진은 그곳에 빅토리아풍의 건물을 짓고 행진로를 다듬었다. 문제는 1만여명의 군중과 3천명의 군중을 모으는 것이었다. 이 문제는 데리 시민들이 촬영지까지 이동하는 것으로 ‘간단히’ 해결됐다. 이들은 아마추어 배우로서 울분과 통곡으로 30년 전의 기억을 깨웠다. 진압군 출연자들의 상당수는 실제 공수부대원 출신들로 현실감을 높였다.
박: 광주는 도청 등 몇몇 지역이 아니라 광주·전남 전역의 대하드라마이므로 얼마든지 좋은 앵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광주를 제대로 그려내려는 의지이다. 그동안 광주를 언뜻 다룬 여타 영화들처럼 흥행에만 관심을 갖지 말고, 꾸준히 영상 작업을 하고 증언을 채록하는 등 사전작업을 충실히 해야 한다. 아직도 묻힌 증언이 많다. 또 도청 이전 계획 등으로 유적지가 훼손되기 전에 실제를 오롯이 보여주는 영상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본다.
이: 피의 일요일은 신·구교도간의 갈등이라는 역사적 근원에 비위생적 환경을 개선하자는 시민권 요구가 결합되면서 불거졌다. 이에 비해 광주에서는 시민들이 무엇을 얻어내려는 게 아니었다. 오로지 인간에 대한 무자비한 살육에 저항하려는 자기 희생적 결단만 있었을 뿐이다. 이런 점에서 광주는 훨씬 더 인간적인 드라마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싸움과 대립을 내세우기보다는 진정한 인간적 가치를 드러내는 게 중요하다.
1만명 이상의 데리 시민들 자원해서 출연
영화는 네개의 서로 다른 관점을 교차하며 속도감 있게 전개된다. 아일랜드 하원의원 아이반 쿠퍼, 17살 소년 제리, 젊은 공수부대 병사, 상황실의 영국군 준장 패트릭 매클레란 등의 시선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군홧발’로 상징되는 공수부대는 데리시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상황실에 있는 지도부의 통제를 의도적으로 벗어나기도 한다. “사정없이 반격해 무조건 잡아들여 따끔한 맛을 보여줘 공수부대의 진가를 확인하자”고 말하던 그들. 언뜻 고뇌를 하면서도 시위대가 먼저 총격을 진술했다는 그들에게서 진실을 발견하기는 힘들다. 전직 영국군이었던 출연자들은 촬영지에서도 피의 일요일 전말을 놓고 격론을 벌였다고 한다. 그만큼 아일랜드와 영국이 생각하는 ‘피의 진실’은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이: 80년 5월 비상 계엄이 선포되기 며칠 전 특전사령관이 모든 부대에 하사금을 보내 돼지를 잡아 회식을 하기도 했다. 광주에 들어가기 전 부마사태 관련 지휘관이 무자비한 진압을 자랑하는 정신교육도 했다. 지휘관은 전쟁 상황을 강조했고, 북한군이 철책선을 걷고 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이렇게 안보논리를 ‘세뇌’받은 진압군은 무차별 ‘작전’ 뒤 회식을 즐기기까지 했다. 끔찍한 진압의 후유증이 지금까지 지속되리라 생각한 진압군은 없었을 것이다.
박: 이 영화는 오염된 권력이 군대를 이용해 자신들의 야망을 달성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광주와 닮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광주는 우발을 가장한 총격으로 시작된 데리시보다 훨씬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 공수여단 등을 사육에 가깝게 훈련시킨 뒤 광주에 투입한 증거가 속속 나오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처음에 참여를 망설이던 시민들이 공수부대의 만행을 보면서 공분해 일어나는 과정을 그리면 영화적 장치 면에서 더욱 설득력 있을 것이다.
는 감정의 과잉을 요구하지 않는다. “왜 그들은…”이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으며 그저 현장을 끊임없이 보여주기만 한다. 감독의 관점에서 사건을 해석하려고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관객들은 네 가지의 관점을 수시로 이동하면서 각각의 모습을 일정한 거리에서 지켜보면 그날의 진실을 한폭의 그림으로 바라볼 수 있다. 마치 흐트러진 실타래를 네 방향에서 풀어낸 뒤 이를 엮는 식이다. 30년 전에 가족을 잃은 시민이 주검이 있는 알트나켈빈 병원에서 오열하는 모습은 더 이상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시위 참가자가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이다”라고 말한 까닭을 굳이 듣지 않아도 된다. 이미 관객들은 그들의 속내를 짐작하고도 남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피의 일요일’을 30년 동안 담금질한 영화 의 힘이다.
박: 는 시종 진지하고도 냉정한 시각으로 접근한 영상이 돋보인다. 투쟁 못지않게 종교 갈등으로 수십년 동안 숨어 만나는 연인, 뜻하지 않은 총격에 애인을 잃은 여성, 외아들을 잃고 절망하는 부모 등 인간적인 면에 초점을 맞춰 국제적 공감대를 이뤄냈다. 광주도 증언과 고발 못지않게 진압군 조기 진주를 막은 이성학 장로, 유류탱크를 개방한 주유소 주인 등 양심을 버린 권력에 맞서 끝까지 인간애를 지킨 사람들의 드라마를 통해 전 지구촌적 공감을 끌어내야 한다.
이: 는 단편소설을 영화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대하소설에 가까운 광주는 훨씬 많은 영화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 얼마든지 인물을 실감나게 그려낼 수 있을 것이다. 공수부대원을 중심으로 공격성의 뿌리에 접근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영화가 될 것이라 본다. 사건을 은폐 조작하는 과정도 훨씬 주도면밀했다. 단 하루 동안의 이야기로 를 만들어 베를린 영화제에서 ‘금곰상’을 수상하기도 했는데, 광주를 제대로만 만들면 ‘다이아몬드 곰상’을 받을 게 틀림없다.
“광주, 세계적 공감 더 끌어낼 수 있어”
이날 자리를 같이한 이경남 목사와 박몽구 시인은 ‘구면’이었다. 22년 전인 1982년 말 두 사람은 민중신학의 산실 구실을 하던 기장선교교육원에서 만났다. 이 목사는 특전사에서 전역해 목원대 신학과 4학년에 다니던 상태였고, 박 시인은 학교에서 제적된 뒤 선교교육원에서 새 길을 모색하던 시기였다. 당시 만난 사람들은 밤을 새워 ‘광주’를 이야기했다. 진압군이던 이 목사는 “군인도 잘못이지만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고 말했고, 학생운동의 핵심에 있었던 박 시인은 “진실은 그게 아니다”고 맞서기도 했다. 하지만 22년이 지난 뒤 두 사람은 를 보며 서로 다르지 않은 광주를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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