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문화포커스- ‘발레리노 부대’를 찾습니다

등록 2004-06-02 00:00 수정 2020-05-03 04:23

병역특례 위해 국내대회에 목숨 건 남성 무용수들… 왜 음악분야처럼 국제대회 입상자엔 혜택 안 주나


발레리노 단 4명만이 병역특례로 무용수 생명을 연장할 수 있다. 많은 국제음악제 수상자들이 혜택을 받는 음악계와는 차이가 크다.


글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 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제34회 동아무용콩쿠르가 치러진 5월20일, 유니버설발레단 홍보담당 김부경씨는 오랜만에 두 발 뻗고 잠을 잤다. 이날 대회에서 발레단의 차세대 스타무용수 민홍일(25)씨가 금상을 거머쥔 것이다. 단원이 콩쿠르에 나가는 일에 홍보팀 직원이 밤잠을 설쳐야 할 이유가 있을까? 김부경씨는 “그럴 수밖에 없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2003년 유니버설발레단에 들어와 주요 솔로 역할을 맡으며 한창 기량을 키워가고 있던 민홍일씨는, 이미 한달 전에 병무청으로부터 5월17일 입대하라는 입영통지서를 받아둔 상태였기 때문이다. “입대 소식을 전해듣곤 지금부터 무용수로서 빛이 날 때인데 군대에 가게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더욱더 동아무용콩쿠르에 목을 맸다”고 김부경씨는 전한다.

매해 수상자 4명만 공익요원

우리나라에서 군입대를 면제받는 발레리노들은 한해 4명이다. 정확히 말하면 ‘면제’가 아니라 ‘예술·체육 분야 공익근무요원’인데, 이들은 발레단에서 직업 무용수로서 일하는 것으로 군복무를 대신하게 된다. 이 4명의 선발기준은 병역법 제26조 및 병역법 시행령 40조에서 정하고 있는데, 동아무용콩쿠르, 서울무용제, 전국무용제, 전국신인무용경연대회의 1위 수상자에 한해 혜택을 주고 있다. 그나마 전국무용제는 서울-지방 격차를 해소한다는 이유로 수상자를 서울에 주소지를 두지 않은 경우로 제한하고 있어 실제론 대부분 서울에서 활약하는 발레리노들에겐 3번의 기회밖에 없는 셈이다.

다른 무용수에 비해 비교적 이른 나이인 13살 때부터 발레를 시작한 민홍일씨는 선화예술중·고를 거쳐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진학했고 워싱턴 유니버설 발레아카데미와 러시아 바가노바 발레아카데미에서 연수한 재원이다. 뛰어난 기량에도 불구하고 민씨는 5년 전부터 동아무용콩쿠르에 도전한 끝에 올해 드디어 금상의 영예를 안았다. 미소년 특유의 섬세한 얼굴선을 지닌 민씨는 외모만큼이나 섬세하고도 곡진한 표현력이 뛰어나다. “남자 무용수들에겐, 국내 무용콩쿠르는 어떤 의미에서 보면 국제 콩쿠르보다 더 경쟁이 치열해요. 아무리 이름난 국제대회에서 1등을 한다고 해도 병역 혜택이 전혀 없거든요. 군대에 안 갈 수 있는 국내대회에선 정말 목숨 걸고 춤을 추지요.”

현재 병역법과 시행령에선 남자 발레 무용수들이 ‘예술·체육 분야 공익근무요원’으로 일할 수 있는 자격을 국내대회로만 제한하고 있다. 음악분야에선 유네스코가 인정하는 119개 국제 콩쿠르에서 2위 이상 입상자까지 병역 혜택을 주는 것과 비교하면 천양지차다. 음악분야는 알렉산드리아국제클래식기타콩쿠르, 벤프국제현악4중주콩쿠르, 샤르트르국제오르간콩쿠르, 이스라엘국제하프경연대회, 고베국제플루트콩쿠르 등 특정 악기를 중심으로 한 국제 콩쿠르부터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개최하는 우니사트란스넷국제음악콩쿠르 같은 낯선 대회까지 포괄하고 있다.

무용이 음악에 비해 현저하게 혜택이 적은 것은 우리나라 발레가 국제적인 기준에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이 몇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97년 김용걸씨가 모스크바 국제 콩쿠르에서 3위 입상한 것을 기점으로 드디어 우리나라 발레는 대한민국과 아시아의 울타리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2001년엔 룩셈부르크 콩쿠르 2인무 부문에서 유니버설발레단 엄재용·김세연씨가 금상 수상자 없는 은상을 받았고, 2003년엔 유니버설발레단 김광현씨가 룩셈부르크 시니어 남자 솔로부문에서 금상을 차지했다. 김혜식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교수는 “클래식 음악과 달리 연원이 짧다 보니 병역 혜택 같은 국가적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시간도 짧았고 무용협회 등 유관단체의 파워가 클래식 음악계에 비해 현저히 밀렸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군대와 무용의 ‘근육’은 다르다

지난해 룩셈부르크 국제발레콩쿠르에서 금상을 받은 김광현(24)씨는 해외에서 큰 상을 받았지만 외려 동료들로부터는 “상복이 없다”는 말을 듣는다. 병역 혜택이 있는 국내 콩쿠르에서 상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올해 동아콩쿠르 본선에 올랐으나 입상하지 못했다. “동아콩쿠르와 신인무용경연대회 합쳐서 9번째 도전했지요. 군대 때문에 1학점만 남기고 5학기째 휴학 중입니다. 이제 휴학 한도도 끝났기 때문에 올 가을엔 학점을 마저 채우고 졸업할 생각이에요. 앞으로는 대학원에 적을 두어 입영 시기를 늦출 생각입니다.” 그는 연봉의 절반인 1천여만원을 대학원 등록금으로 날리더라도 군대 가기 전까지 시간을 벌 계획이다.

그렇다면 왜 발레리노들은 이처럼 군대를 ‘기피’하는 것일까?

박재근 상명대 무용학과 교수는 “정형화된 동작을 쉬지 않고 계속해야 하는 발레의 특성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하루를 쉬면 자기가 알고 이틀을 쉬면 선생이 알고 사흘을 쉬면 관객이 안다’는 춤판의 ‘불문율’을 굳이 들추지 않더라도 연습량이 ‘절대적으로’ 기량을 좌우하는 발레는 ‘휴식’이 허용되지 않는다. 김광현씨는 “일상에서 사용되는 근육과 발레 동작에서 사용하는 근육은 다르다”고 말한다. 흔히 군을 제대한 젊은이들이 체격이 변한다고 하면 밖으로 돌출되는 근육이 붙어서 나오기 마련인데 발레리노들은 연습을 계속하면 이와 달리 안으로 매끈하게 붙는 잔근육이 붙는다. 우리가 무대 위에 오른 발레리노들을 보며 남성적인 근육질을 느끼기보다는 물 흐르듯 유연한 몸매에 감탄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군대에 다녀와서 유연성이 한참 떨어진 몸매를 추스르고 슬럼프를 극복하며 직업 무용수의 길로 나아가기란 쉽지 않다. 직업 무용수로 생활한다 해도 이미 ‘끝발’이 오르는 시기를 놓쳐 솔리스트나 주연으로 활동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현재 전국의 이름난 발레단 가운데 현역병 출신으로 솔리스트·주연을 맡은 경우는 1명도 없다. 발레리노들이 군대를 가겠다고 결심할 때엔, 이미 춤 말고 또 다른 삶의 방편을 결심한 이후에나 가능한 일이다.

통통 튀는 공처럼 2m 높이까지 탄력 있는 점프를 구사해 감탄을 자아내는 김인경(28)씨는 지난해 서울공연예술제에서 연기상을 받았으나 무용협회의 내부 문제로 병역 혜택을 받지 못했다. 그는 “발레리노들의 입대 문제와 관련해선 컨설턴트 수준”이라고 자평할 정도로, 그동안 입대를 늦추기 위해 법이 허용하는 한도 안에서 몸부림쳐왔다. 이유는 “계속 춤추고 싶다”는 것, 한 가지였다. 24살까지는 여러 차례 휴학을 통해 재학 시기를 늘려 군입대를 늦췄고 이후엔 공연 출연 등 갖가지 이유를 방패막으로 써왔다. 심지어 국가고시로 인정되는 요리사 자격증 시험을 신청해 ‘급한 불’을 껐을 정도다. “이 나이까지 버텨왔다는 데 대해 병무청 직원들까지도 감탄한다”는 김씨는 그럼에도 “아직도 군 문제로 고심하고 있는 자신이 행여 후배들에게 누가 될까봐 미안하다”고 말한다. 병역 혜택이 있는 국내 콩쿠르의 경우, 아무래도 남자 무용수들에겐 생사가 걸린 문제이니만큼 심사위원들이 ‘알아서’ 나이가 많은 참가자에게 금상을 주는 분위기가 있기 때문이다. 올해 동아무용콩쿠르에서 은상을 받은 그는 8월까지 계속되는 미국 공연을 마친 뒤 무용협회가 주최하는 신인무용경연대회에 재도전할 생각이다.

“군악대처럼 군 무용단 신설해야”

대한민국의 모든 젊은이들에게 군입대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일상을 단절시킬 수밖에 없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어린 가장도 어쩔 수 없이 군대에 가야 하고, ‘국민적 기대’에 부응할 정도는 아니지만 자신의 재능을 전문 분야에서 발휘해야 하는 청년도 입영통지서를 받는다. 발레리노들만 이런 사례에서 예외를 바라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해도, 발레리노들에겐 ‘인생은 길고 예술은 짧다’. 장르의 성격상 스무살 즈음에 춤의 도약을 시작해서 서른 중반엔 어쩔 수 없이 ‘착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박재근 교수는 한 가지 대안을 제시한다. 발레리노들이 춤을 계속할 수 있는 군 무용단의 신설이다. 박 교수는 “연주자들이 계속 활동할 수 있는 군악대도 있지 않는가. 군대의 정서 함양을 위해서라도 군 무용단을 신설해 기량을 닦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