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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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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축제는 몸으로 즐기는 것

등록 2002-07-03 00:00 수정 2020-05-02 04:22

쾌도난담으로 정리해보는 붉은 카니발- 어떻게 하면 우리는 더 잘 놀 수 있는가

한국만큼 6월 한달을 잘 놀아버린 나라가 있을까. 한국에서 이때만큼 신나게 놀아본 적이 있었을까. 축제는 계속돼야 한다는 말이 그래서 참명제처럼 힘을 얻고, 축제의 공간을 마련하려는 움직임도 거세다. ‘잘 논다’는 말은 비하에서 칭찬의 뜻으로 바뀌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 잘 놀 줄 아는 걸까? ‘어떻게 하면 잘 놀 수 있을까’라는 질문 앞에 20·30·40대의 3명이 쾌도난담을 벌였다. 평소 ‘나난’이란 애칭으로 불리며 무가지 을 펴내는 문화 콘텐츠 생산업체 ‘나난’의 대표 강민정(23)씨, ‘퍼포먼스 반지하’라는 문화표현단체를 이끌며 최근에는 아내와 함께 안티월드컵 사이트를 운영해온 드라마고(30)씨, 붉은악마와 함께 ‘비 더 레즈(Be The Reds)’ 붉은 티셔츠 입기운동을 펼치기도 했던 디지털위성방송 종합가이드 편집장 김미경(42)씨가 머리를 맞댔다. 드라마고씨는 문화운동에 좀더 열성을 기하고자 두달 전 미술교사를 그만뒀고, 아예 이름까지 바꿨다.

강민정(이하 나난) 전 축구에 대해 아무 생각도 없었어요. 오프사이드나 오버헤드킥이 뭔지도 몰랐다니까요. 개인적으로 6월은 늘 마가 낀 징크스의 달이었어요. 그래서 6월이 되면 항상 마음의 준비를 하는데, 이번에는 월드컵이 있었고 징크스를 깨려고 진짜 열심히 응원하며 놀았어요. 태극기와 공사장 표지인 빨간 삼각대를 이용해 복장을 꾸미고, 지나가는 차 위에 마구 올라가고…. 너무 열심히 노는 바람에 마감을 못 지켜 잡지가 늦게 나오기까지 했으니까. 그래도 너무 즐거웠어요. 홍대 앞 레이브신(테크노 음악에 맞춰 춤추며 놀기)에서 복장을 맞춰입고 와서 파티를 즐기는 데 익숙해지기는 했지만, 월드컵은 훨씬 더 유별났던 것 같아요.

정치·이념의 축제에서 감성의 축제로

김미경(이후 미경) 거리로 나선 건 이탈리아와의 경기 때부터였어요. 제가 광화문에 진출한 경험은 80년, 87년에 이어 이번이 세 번째인 셈이죠. 앞의 두번이 정치축제나 이념의 축제였다면 이번에는 감성축제, 문화의 축제였어요. 그야말로 온몸으로 즐기는 축제. 우리에게 정말 축제가 없었구나 하고 절감했어요.

나난 정치적 축제는 머리로 하는 거지만 이번에는 몸으로, 가슴으로 하는 축제여서 다들 즐겁게 동참했던 것 같아요.

미경 몸으로 하는 게 진짜 축제인 것 같아. 그런데 아직도 자유롭게 놀지 못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이탈리아전 때 밤 11시에 광화문에 차를 몰고 나갔는데, 내심 걱정했어요. 그 시간이면 차도를 다 점령하고 놀아도 별로 교통에 지장을 줄 시간이 아니어서 가까이 가볼 수나 있을까 싶어서. 그런데 차타고 광화문 일대를 10바퀴 이상 돌아다녀도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어요. 이건 차한테 너무 특혜를 주는 거 아닌가, 통제하는 경찰 말을 왜 이렇게 잘 듣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난 신촌이나 홍대 앞에는 그렇지 않았어요. 자동차 꼼짝 마라였어요.

미경 그런데 사람들 사이에 마구 춤추며 노는 건 없었던 것 같아요.

드라마고(이후 마고) 춤이라는 게 굿이나 탈춤의 경우처럼 내용이 채워져야 몸을 움직이며 나오는 것인데, 이번에 춤이 없었다는 건 그만큼 내용이 없었다는 게 아닐까요? 전 축구를 좋아하지 않아 광화문이나 시청 앞에 가지 않았어요. 대신 인천과 전주 경기장 주변의 월드컵 프라자에서 2회 퍼포먼스 공연을 하며 이번 현상을 관찰할 수 있었어요. 뚱뚱하다거나 못생겨 외형에서 이목을 못 끄는 사람도 차별 없이 한데 어울렸다는 건 긍정적이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어요. 이탈리아전 끝나고 친구들과 산책 나갔을 때, 붉은 옷을 입은 젊은이들이 모르는 사람들과도 “대∼한민국” 하며 인사하고 다니는데, “난 월드컵을 싫어한다”고 했더니 막 흥분하는 거예요. 왜 싫어하느냐, 월드컵 때문에 피해받는 사람들이 있어 싫다, 그러면 대한민국을 사랑하지 않느냐, 하며 격렬히 말이 오가다 싸움 직전까지 갔거든요. 그들은 이 축제에 모두 동참해야 한다는 배타적 판단을 내리고 있지 않았나 싶어요.

매머드급 축제와 지역 축제

미경 저는 1년 반 전부터 비더레즈의 붉은 티셔츠를 붉은악마와 같이 만들고 보급했던 당사자입니다. 처음에 고전을 면치 못하던 이 운동이, SKT가 100억원 이상을 뿌려가며 배우 한석규를 통해 응원 가르쳐주기 광고를 대대적으로 펼치면서 확 달라졌죠.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빨간 옷을 입게 된 데는 이 광고가 큰 구실을 했다고 믿어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현상 자체를 문제라고 보지는 않아요. 마케팅의 시대에서 서로에게 즐거움을 줬다면, 기업이 그만큼 사회에 뭔가를 환원하고 공동체가 즐거웠다면 나름대로 가치가 있지 않나 싶은 거죠. 그리고 여성들이 이번에 갑자기 열광했다고 하는데 그건 아니라고 봐요. 영화나 잡지, 책 등 대다수 문화상품의 수요자는 여성들이었고, 이미 이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질좋은 문화상품을 가릴 능력과 자세가 있었던 거고, 월드컵이 값비싸지만 질높은 문화상품이라는 걸 대번에 알아본 거죠.

마고 월드컵에 자본주의 마케팅 전략이 숨어 있다는 건 다들 인정하는 것 같아요. 그 마케팅 전략의 연장에서 축제도 만들어지고. 이론가들은 지역 단위에서 문화단체가 조직하는 지역 축제가 더 중요하다고 강단에서 강조하는데, 이건 마케팅을 통해 탄생된 자본주의적 축제와 충돌할 수밖에 없어요. 홍대 앞 프린지페스티벌도 월드컵 특수를 노려 가을에 하던 걸 당겨서 했고 민예총도 같은 전략을 썼지만, 그러다 보니 공연 장소를 확보하기도 어려웠고 외부 초청팀에 거액의 돈을 지불하고도 행사가 분산돼 찾아오는 사람은 오히려 줄고.

미경 매머드급 축제와 지역 축제를 다 즐기면 되는 것 아닌가요?

나난 그런 의식을 갖고 있다면 월드컵을 피해가면 되는 것 아닌가요?

미경 축제는 다양하고 많을수록 좋다고 봅니다. 다만 군소 축제가 압살되지 않도록 다음부터 주의를 기울이면 되는 게 아닐까 싶어요. 이번 축제에서 또 한 가지 흥미로운 게 있는데, 흔히 텔레비전이 사람들을 개인화하고 소외시킨다고 비판하지만 텔레비전 때문에 이번 축제가 가능했다는 거죠. 대형 멀티비전이 없었다면 사람이 이렇게 모일 수 있었겠어요.

마고 조작된 축제, 자본주의적이고 국가주의적 축제는 없어져야 한다고 봐요. 월드컵 기간 중에 인권과 노동권에 제약이 있었고, 강제 2부제가 있었어요. 언론은 월드컵 보도에 치중하느라 사회 음지를 조명하지 않았고.

미경 많은 사람들이 즐겼다는 걸 조작됐다고 본다? 그러면 그 즐거움을 어떤 다른 것으로 설명하고 보상할 수 있죠?

마고 나난님께 질문 있어요. 자신이 직접 만든 옷을 만들어 파는 벼룩시장에 참여하고, 함께 옷을 맞춰입고 파티를 준비하는 등 홍대 앞의 각종 페스티벌에 참여하는 마음가짐과 이번 월드컵에 참여하는 그것이 어떻게 다르죠?

왜 공연공간은 있는데 놀지는 않는가

나난 별개의 문제죠. 월드컵은 다른 나라와 경쟁하는 거니까 다함께 옷을 맞춰 응원했던 거고, 홍대 앞에서는 개인적으로 즐기기 위한 것이고. 컨셉트 자체가 달라서 비교가 되지 않는 것 같은데.

미경 축제는 일단 즐거워야 하는 것 같아요. 학교 축제이건 지역 축제이건 항상 동원됐던 것 같아. 이번에는 굉장히 자발적이었고, 그게 마케팅의 유도라는 걸 알면서도 반가웠어요. 그런데 이렇게 워낙 세게 경험해서 앞으로 계속 갈망하게 될 텐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나난 인터넷에 들어가면 각자 좋아하는 분야에서 수많은 사이버 카페를 만들어 놀잖아요. 모임들끼리 오프라인에서 술집을 빌려 각자 놀기도 하고. 그에 비해 이번에는 특정의 넓은 장소가 공개되고, 입장료도 받지 않고, 다함께 어울려 놀았다는 게 좋았어요. 이제 많은 단체나 사람들이 어떻게 축제를 만들어 놀 것이냐 고민할 텐데, 제가 바라는 건 그걸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나 조직이 생겼으면 하는 거예요. 한국사람들은 너무 숨어드는 경향이 있어서 막상 하자고 그러면서도 제대로 앞장서는 사람이 없어요. 홍대 앞 축제들의 경우도 하자, 하자 그러면서도 막상 고민하면서 앞장서는 사람이 없어 고생들을 많이 했어요. 이번에도 냄비처럼 끓었다 그냥 가라앉는 게 아니냐고 걱정하는데, 오스트레일리아의 게이레즈비언 파티처럼 뜻을 모으면 해낼 수 있어요. 수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집단적으로 요구하니까 정부도 지원할 수밖에 없는 거죠.

미경 일산의 호수공원에 가면 공연 공간이 마련돼 있는데 공연이 없어요. 미국에서 1년 살 때, 거리거리마다 계속 크고 작은 공연을 하는 거 보고 놀랐거든요. 호수공원에서 작은 공연들이 자꾸 생기면서 그걸 중심으로 자연스레 놀이문화가 형성되지 않을까요. 이번처럼 기대되지 않은 즐거움이 자꾸 일어날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어요.

마고 그건 저하고 비슷한 생각이네요. 그곳에 왜 공연이 계속 벌어지지 않는가 하면, 누군가 후원과 협찬을 따내고 돈을 지불해주는 등 프로그래밍해주지 않으면 공연자가 나서지 않는 문화가 만들어졌기 때문이에요.

미경 왜 (돈 받는) 모자라도 벗어놓고 퍼포먼스하지 않는 거죠? 좀 답답하네.

나난 홍대나 신촌은 충분히 문화적 마인드가 깨어 있는 동네잖아요. 음악 듣고 자유롭게 춤추는 클럽도 많고. 그곳에선 나이트클럽처럼 부킹이나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요. 그런데 술 먹고 얌전히 앉아 있으면 문제가 없지만 춤추고 그러면 불법이라는 거예요. 월드컵을 맞아 클럽데이를 정하며 클럽 부흥 운동을 할 때, 서울 부시장이 순회하면서 좋다고 하기는 했지만 법적 여건은 달라지지 않아요. 월드컵이 끝나면 클럽들을 집중 단속한다고 하던걸요. 외국에선 클럽문화가 자유로우니까 외국인들이 놀고 볼거리를 주기 위해 풀어놨다가 다시 우리의 축제를 제한하는 건 정말 곤란해요.

미경 어디까지 일탈해도 될까의 문제도 있을 텐데, 이번에는 굉장히 좁은 선을 지켰던 것 같아요. 경험의 장이 없었기 때문일 텐데, 더 넓혀나가야 할 것 같아요.

마고 평소에 소리지르지 못했는데 실컷 떠들어보고, 성스럽던 태극기를 놀이의 오브제로 사용했다는 건 심리와 행위의 일탈임에 틀림없죠.

크리스마스와 노동절을 축제로?

나난 남들 보기에 아찔하게 놀아본 저의 경험에 따르면, 다함께 즐겁고 보기에 나쁘지 않고 피해를 주지 않는 선이면 되지 않을까요.

마고 이제 자유와 해방감을 어떻게 놀이 공간화할 것인가의 문제가 남아요.

미경 쟁취해나가야죠. 80년대에는 정치 목적에서 광장을 쟁취했듯, 이번에는 감성의 축제를 위해 우리가 찾아나가야죠. 그런데 기대하지 않았던 결과를 맞아서 즐거웠던 것이지, 어떤 장소를 마련해놓고 매년 6월에 빨간 옷 입고 놀라면 별로 즐겁진 않을 거예요. 같이 즐기는 축제라는 점에서 같기는 하지만 설과 추석을 어떻게 바꿀 수 없을까. 아예 없애버리든지. 농경사회에 생긴 축제가 산업사회로 오면서 자동차로 왔다갔다하면서 박제화됐는데, 요즘 같은 미디어 시대에 맞게 바꿨으면 좋겠어요. 밥하고 설거지하고 왔다갔다하면서 지치기만 하고.

나난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사람이 많으니까, 난 그걸 어떻게 해봤으면….

마고 전 노동절을 축제로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진압의 날이 아니라.

미경 아무리 축제의 장이 마련돼도 결국 자발성이 관건이 아닐까 싶어요. 전 20년 동안 피우던 담배를 엄청난 결단으로, 무지 힘들게 간신히 끊었어요. 좀 거창하게 말하면 20년 동안 자학의 시간을 보냈으니까 이제 자애의 시간으로 가자고 했던 거예요. 이건 인생관과도 연결되는 건데, 끊임없이 이념을 실현하는 데, 일하는 데 몸을 불살라야 한다며 너무 몰아붙이며 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거죠. 엄혹한 시절에 외모에 투자하는 것도 죄악으로 여겨왔는데, 지금은 싼 걸 사더라도 날 즐겁게 하기 위해 사자며 나 자신의 축제를 즐기게 됐어요. 그러면서 이번 축제도 다른 눈으로 즐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우리 사회도 지나치게 강박적으로 살아왔는데 주5일 근무제도 그렇고 이제 비로소 질적으로 다른 삶을 시작하려는 게 아닐까 싶어요. 나 자신의 축제를 즐기자는 게 개인에서 지역 단위로 또 더 큰 단위로 발전했으면 좋겠어요.

나난 친구들끼리 모여 응원나갈 때, 내가 제일 응원을 잘할 수 있고, 그래야 우리가 이길 것이라고 생각하고 나가니까 즐거웠는데, 이런 게 자발성이 아닐까요? 내가 정말 재미있게 놀려고 달려들었고, 만족스러웠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야 고통스러운 월드컵이었겠죠.

똑같은 노래는 지겨웠다

마고 요즘 학교의 놀이문화는 예전보다 나아진 것 같은데, 아이들에게 놀 시간을 많이 주기 때문이거든요. 어떤 학급의 경우 선생님이 너희들끼리 놀라며 시간을 주고 의자를 교실 뒤로 치워 공간을 만들어주는 걸 되풀이하니까 같은 학년에서 이 학급만 다른 모습을 만들어가더군요. 그 아이들이 원래 잘 놀았던 건 아닌데, 결국 자생적으로 만들어간 거죠. 거리 응원에서 슬펐던 건 똑같은 노래를 지겹게 부르는 식으로 다양성이 부족했던 겁니다.

미경 소비자의 과제로 던져졌다고 봐요. 한석규가 그렇게 하고 나왔다고 SKT가 붉은악마를 독점하다시피하는 현상이 벌어졌잖아요. 돈으로 따지면 수천억원짜리 상품에 열광한 건데, 이걸 보면 뭔가 재미있고 질높은 문화상품을 많이 만들어서 같이 보며 즐기는 기회들을 자꾸 찾아나가야 할 것 같아요.

정리 이성욱 기자 lewook@hani.co.kr

사진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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