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준호 기자 whorun@hani.co.kr, 이미지는 유튜브 화면 갈무리
<머리카락 곤두세워 새로 변신-애니메이션 >
<머털도사>의 머리카락 (원작 이두호, 1989)
10년 동안 배운 거라곤 고작 머리칼 곤두세우는 것뿐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반전. 곤두세운 채 ‘새가 되고 싶어’ 생각하자, 정말 새가 됩니다. 한 가닥 뽑아 ‘후’ 불고 주문을 외우니, 내가 노린 대로 적의 모습이 바뀝니다. 야속하게만 보였던 스승 누덕도사는 사실 머털이 머리카락에 가진 도력 전부를 담아주었습니다.
꺽꿀이한테 붙잡혀 머리카락을 모두 밀린 순간, 화상 입어 얼굴이 일그러진 순간, 모두에게 미움받는 순간, 머털이는 좌절하고 자책합니다. “나는 흉측해.” “나는 힘이 없어.” 기억 속 누덕도사와 왕질악도사 딸 묘선만은 그런 머털이를 끝까지 지지합니다. 믿어주는 사람 덕에 모욕을 참아냅니다. 모두가 싫다는 나를 참는 것, 당장 인정받지 못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 굉장한 일입니다. 누덕마을 사람들을 구해낸 마지막 순간까지 머털이 모습 어딘지 엉성하고 덜렁댑니다. 그래도 이제 꽤 훌륭한 도사입니다. 있는 그대로 자기를 믿을 수 있게 됐으니까.
1989년 MBC에서 <머털도사>가 방영됐을 때 54.9% 시청률을 기록합니다. 만화방 문화가 저물던 때, 만화 속 이야기가 컬러TV로 옮겨왔습니다. 만화잡지 <보물섬> 출신 아기공룡 둘리(1988), <아이큐 점프> 출신 영심이(1990)가 TV에 진출합니다. 프로야구가 시작되고 국제 스포츠 행사가 열리면서 <떠돌이 까치>(1987)나 <달려라 하니>(1988) 같은 애니메이션도 큰 사랑을 받습니다.
<미래소년 코난>의 발가락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 1978
플라잉머신에서 라나를 안고 저 먼 옥상을 향해 건너뛸 때조차 조마조마할 필요 없습니다. 코난이니까. 포비가 내준 막대를 엄지발가락과 검지발가락으로 쥐고 제자리에 안착합니다. 자연에서 자라난 코난의 튼튼한 발가락과 깊은 폐활량, 따뜻한 마음이 시종 화면에 끼얹힙니다. 인공과 자연, 발전과 원시가 대비를 이룹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초기 명작.
<치킨 런>의 날개
감독 닉 파크·피터 로드, 2000
날개 퍼덕여 날지 못하면 어때? 힘 합쳐 고쳐낸 비행기를 타고 닭장을 탈출할 때, 짜릿한 활공의 쾌감에 마음도 두둥실 떠오릅니다. 닭들의 시선으로 바라본 사람 몸의 거대함과 무서움도 이런저런 생각을 남깁니다. 나는 다른 생명체에게 공포의 존재였던 적은 없을까? 점토인형의 움직임을 이어붙여 만들었습니다. 아드먼스튜디오의 클레이(점토) 애니메이션 대표작.
<날아라 슈퍼보드>의 입
원작 허영만, 1990
말귀는 흐리고, 뿅망치는 도무지 언제 터질지 모르겠고, 표정은 세상 무심했는데… 한없이 허술해 보였던 사오정이 입을 벌립니다. 그 순간 쏟아져 나오는 나방. 혹시나 싶어, 보던 나도 입을 크게 벌리고 숨을 크게 내뱉습니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습니다. 다행인데 아쉽습니다. 중국 고전소설 <서유기>를 재해석하며 캐릭터의 생동감과 재미를 더한 허영만 화백의 수작.
<뚱보 엉덩이는 위험하지 않아-영화>
<호소자> 뚱보의 엉덩이 (감독 주옌핑, 1986)
어린이 쿵후 삼형제 아국, 소호, 뚱보의 몸놀림은 놀랍습니다. 젓가락으로 파리를 잡아챕니다. 휙 날아 벽을 넘어댑니다. 다만 잠깐씩 멈칫하는 건 막내 뚱보 때문입니다. 멈칫, 뒤에는 예기치 못한 웃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식당 주인 얼굴에 난 점을 파리인 줄 알고 찰싹 때리고 미안해하는 뚱보, 벽을 뛰어넘으려다 몸으로 뚫어버린 뒤 멋쩍어하는 뚱보는 한결같이 귀엽고 매력적입니다. 형들이 총을 쥐거나 칼을 들고 악당과 싸우는데도 뚱보만은 대개 몸을 씁니다. 주로 엉덩이로 적들을 깔아뭉갭니다. 이마로 박치기합니다. 악당이긴 해도 너무 아플 것 같지는 않게 때려서 불편할 뻔한 마음이 누그러집니다. 그 덕에 뚱보는 삼형제의 마스코트입니다. 산에서 무술 수련만 하다가 도시로 내려온, 맑은 동심을 온몸에 담았습니다.
<호소자>는 대만 영화이지만 1980년대 홍콩 영화 인기에 얹혀 있습니다. 한국 포스터에는 주인공 삼형제가 각각 이소룡(리샤오룽), 성룡(청룽), 홍금보(훙진바오)의 어린 시절을 묘사한 것처럼 적었습니다. 꽤 잔인한 면이 있던 홍콩 무술영화는 1980년대 들어 코믹을 강조합니다. 가족 모두 즐길 법한 오락으로 자리잡습니다. 성룡의 <취권> 시리즈와 <폴리스 스토리> 시리즈, 코믹 공포물 <강시> 시리즈가 있었습니다. 과격한데 어딘지 편안하고, 무서운데 웃깁니다. 돌발이 너무 많은 이야기, 때로 선을 넘는 폭력성, 1탄·2탄·3탄으로 이어지는 지나친 우려먹기를 불편하게 여기기도 합니다. 1990년대 이후 명성은 예전만 못합니다. 그래도 종종 뚱보 같은 매력적인 캐릭터가 펼치는 ‘강력하나 위협적이지 않은 몸놀림’을 다시 꺼내 보고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애들이 줄었어요>의 온몸
감독 조 존스턴, 1989
세상은 그대로인데 아이들 키만 6㎜로 줄어듭니다. ‘앞마당 어드벤처’가 펼쳐집니다. 사소한 사건(스프링클러가 켜진다)은 거대한 재난이 됩니다. 사소한 행동(아빠가 시리얼을 먹는다)은 목숨을 가를 위기입니다. 그냥 일상 속 귀염둥이였던 애완개미와 애완견이 누구보다 든든한 조력자가 된다는 것도 깨닫습니다. 흥행 덕에 후속작 <아이가 커졌어요>가 만들어졌습니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디즈니+’에서 <애들이 줄었어요> 세계관을 이어가는 새 작품을 준비하고 있다네요.
<참견은 노 사랑은 오예>의 손
감독 김유진, 1993
야구 글러브 만지작거리는 손 애처롭습니다. 야구 장비 살 용돈 벌려고 변기 닦고 구두 닦는 손도 가슴 찡합니다. 학교 야구부 창단을 간절히 바랐던 아이들 손과 손이, 마침내 공을 던지고 야구방망이를 휘두릅니다. 공부에 방해돼서 안 돼. 몸 쓰는 건 위험해서 안 돼. 수많은 ‘안 돼’ 속에 하고 싶은 것 포기하는 순간, 아이들 손이 내보이는 안타까움은 27년 지난 지금 얼마나 달라졌을까요? 영화는 1993년 청룡영화상 감독상과 여우조연상을 받았습니다.
<나의 왼발>의 발
감독 짐 셰리든, 1989
엄지발가락과 검지발가락 사이 분필을 쥐고 ‘MOTHER’ 여섯 알파벳을 바닥에 써넣기까지 주인공 크리스티가 품고 있던 말들을 상상합니다. 아일랜드의 화가이자, 작가이자, 뇌성마비 장애인인 크리스티 브라운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왼발은 가족에 대한 애틋함, 연인을 향한 애정, 마음속 동요를 표현하는 창입니다. 모두가 다른 어떤 몸 부위로 그리하듯이. 한 예술인의 삶을, 역경은 역경대로 환희는 환희대로 사실적으로 그립니다.
<가스∼음을 펴고 소리쳐보자-동요>
<새싹들이다>의 가슴 (작사·작곡 좌승원, 노래 이수지, 1983)
선언합니다. 봄 맞아 양쪽 잎 활짝 펼치는 새싹 같은 모양으로. “가슴을 펴고 소리쳐보자 우리들은 새싹들이다”. 1983년 제1회 MBC 창작동요제 대상 수상곡 <새싹들이다>는 어딘지 선전포고 같습니다. ‘어깨를 걸고’ ‘발맞춰’ ‘씩씩하게’ ‘같이’ ‘해님 되자 달님 되자 별님이 되자’고 외칩니다. 제주에서 왔다는 이수지 어린이(당시 남제주부국민학교 5학년) 표정은 긴장감 속에도 패기를 잃지 않습니다. 가슴 활짝 폅니다.
그해 어린이날 이후 MBC 창작동요제 참가는 ‘노래 좀 하는’ 어린이들의 장래희망 같은 것이 됐습니다. 좋은 곡을 작곡해줄 선생님이 필요했고, 그 눈에 띌 만한 실력도 필요했지만 ‘꿈이라는데 아무럼 어때’ 같은 심정으로 바랐습니다. 패기만은 놓을 수 없었습니다. <노을>(2회 대상), <이슬>(6회 대상), <연날리기>(7회 대상) 등 숱한 명곡이 탄생했습니다. 놓쳐버린 출전 기회를 달래며 어떤 아이들은 창작동요제 악보책을 사러 서점을 서성였습니다. 연습, 또 연습하다보면 꿈같은 날이 올지도 모르니까. 이문세, 양수경, 이승환 같은 가수들이 창작동요제 대상곡을 불러 음반을 내기도 합니다(《MBC 창작동요 대상곡 모음집》, 1992). 어른들도 불러주는 노래를 내 또래가 부르고 있어! 어린이의 자부심은 한껏 고양됩니다.
MBC 창작동요제는 2010년 기후위기를 경고한 <왜 이렇게 덥지?>를 대상곡으로 남기고 28년 만에 사라집니다. 되살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지만 아직 돌아올 거란 소식은 없습니다. 부르는 것만으로도 어린이라는 게 자랑스러워 마음이 꽉 찼던 노래만 남았습니다.
<아기염소>의 얼굴
작곡 이순형·작사 이해별·노래 박은주, 1991
해처럼 밝게 웃던 아기염소는 빗방울이 뚝뚝뚝뚝 떨어지자 잔뜩 찡그립니다. 9회 MBC 창작동요제 최연소 참가자 박은주 어린이(당시 석수국민학교 3학년) 표정도 아기염소 얼굴 따라 밝고 어둡기를 교차합니다. “지난번 걸프전쟁이 끝나자마자 제일 먼저 길거리로 뛰쳐나와서 신나게 축하하던 이라크 어린이들 모습을 보고 만들었어요.” 작곡자 선생님 뜻을 헤아린 것 같습니다. 30년이 지난 지금 반가운 마음만큼 무거운 마음이 큰 건 아직 그곳, 빗방울이 그치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 명실상부 MBC 창작동요제 최고의 인기곡.
<두치와 뿌꾸>의 키
작곡 최만식·작사 민영문·노래 장숙희·신해옥, 1996
한 치, 두 치, 세 치, 네 치에 맞춰 팔을 좌에서 우로 네 번 뻗어주고. 휘리릭 두 손 감아 돌린 뒤 손가락으로 양옆을 찌르는 동작과 함께 불러야 제격입니다. ‘키는 작지만 깊은 생각 큰 꿈이 있다’고 두치가 말해줘서, 덩치 작아 초조한 어린이도 힘을 얻습니다. 세상은 괴물이라고 부를지 모를 친구(큐라·몬스·미라·리노)들을 품고, 어려울 때 웃어주는 친구가 되는 거로 충분할 것 같습니다. 애니메이션만큼 오래 기억되는 <두치와 뿌꾸>의 여는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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