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대를 시작하는 첫 달, 이런 냉소와 회의 섞인 질문을 던질 법하다. 비핵의 실질적 진전도, 대북제재 완화도 없었다.
2017년 저점을 통과한 한반도 평화열차는 이듬해 고점을 찍고 지난해부터 내리막길을 지나고 있다. 공포는 환희에서 다시 무기력과 불안으로 변했다. 아직도 냉전의 미로에서 헤매는 열차는 평화란 출구를 찾지 못한 채 이따금 위태로운 서행을 하고 있다. 불과 한 달 전, “무력을 사용해야 한다면 사용할 수도 있다”(미국)는 말은 “자국이 보유한 무력을 사용하는 것은 미국만이 가지고 있는 특권이 아니다”(북한)라는 말과 당장이라도 충돌할 기세였다. 다행히 어디로 튈지 모를 불꽃이 담긴 북한의 크리스마스 선물은 2019년 마지막 날까지 미국에 배달되지 않았다.
어쩌면 평화체제를 현실화하려던 지난 2년의 경험과 기억이 지금 파국을 막아주고 있는지 모른다. 북-미 정상의 두 번의 만남과 한 번의 회동, 남북 정상의 두 번의 회담과 한 번의 만남은 결과적으로 아직 어느 쪽도 손에 쥔 게 없는 듯 보이지만, 2018년 이전으로 쉽게 돌아갈 수 없게 하는 ‘래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서 이 말은 더욱 힘을 갖는지 모른다.
“평화로운 삶을 바라는 이라면 누구라도 한반도가 다시 대결과 적대의 시간으로 퇴행하지 않도록 용기와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길이 어둡다고 걸음을 멈추진 말자.”(이제훈 선임기자)</font>
이 와중에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겸 조선노동당 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서로를 비난하지 않고 있다. 불행 중 다행이다. 한반도 정세를 가늠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현상·변수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김정은 위원장의 세 가지 시금석</font></font>
김정은 위원장은 연말 나흘(2019년 12월28~31일)간 ‘지도’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7기 5차 전원회의(이하 ‘12월 전원회의’)에서 미국을 맹비난했다. 이 1월1일치 1~4면에 펼쳐 보도한 ‘전원회의 관련 보도’를 보면, 김 위원장은 “미국의 본심은 제재를 계속 유지해 우리의 힘을 소모, 약화시키자는 것”이라며 “날강도 이중 행태”라고 거칠게 비난했다.
북한 특유의 거친 언사에 정신을 뺏기면 알짬을 놓친다. 섬세한 독해는 필수다. 오독은 엉뚱한 정세 판단으로 이어진다.
예컨대 이런 문장. “우리가 조-미 사이의 신뢰 구축을 위해 핵시험과 대륙간탄도로케트 시험발사를 중지하고 핵시험장을 폐기하는 선제적인 중대 조치들을 취한 지난 2년 미국은 대통령이 직접 중지를 공약한 합동군사연습들을 수십 차례나 벌려놓고 첨단 전쟁장비들을 남조선에 반입해 군사적으로 위협했으며 십여 차례의 단독 제재 조치들을 취해 우리 제도를 압살하려는 야망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을….” 김 위원장이 “지켜주는 (상)대방도 없는 공약에 우리가 더 이상 일방적으로 매여 있을 근거가 없어졌다”고 핵시험·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모라토리엄 철회 가능성을 내비친 문장 바로 앞 문장이다.
“대통령이 직접 중지를 공약한 합동군사연습”을 “미국”이 강행하고 있다는 표현은 난해하다. 김 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을 직접 겨냥하지 않은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말장난 같지만, 어쨌거나 ‘트럼프’가 아닌 ‘미국’이 문제라고 주장한 사실이 중요하다.
김 위원장은 “미국의 제도 압살 야망”의 근거로 셋을 꼽았다. 한-미 군사연습, 미국 첨단무기 한국 반입, 대북제재다. 이 셋을 미국의 ‘적대시 정책’ 변화 여부를 가늠할 시금석으로 삼고 있다는 뜻이다. 군사훈련 중단과 제재 완화·해제, 김 위원장이 미국에 제기한 핵심 요구다.
트럼프 대통령도 최근 “나는 김정은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말을 반복적으로 하고 있다. 김 위원장이 1월1일 신년사를 ‘전원회의 결과 보도’로 갈음하며 “전략무기 개발을 중단 없이 진행해나갈 것”이고 “세상은 멀지 않아 새로운 전략무기를 목격하게 될 것”이라 엄포를 놓은 직후에도, 트럼프 대통령은 “나는 그가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며 김 위원장의 선물이 꽃병이기를 바란다고 했다. 막말의 대가답지 않은 신중한 태도다.
북-미 정상의 상호 비난 자제는 아주 중요하다. 2018년 초부터 한반도 정세의 핵심 동력으로 작용해온 ‘톱다운’ 정상외교에 대한 기대를 아직 접지 않았음을 방증해서다. 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이 모두 북-미 협상·합의와 관련한 정치적 수요가 여전하다는 진단이 나라 안팎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서로를 진짜 좋아하고 믿는지는 별개 문제다.
그런데 합의는커녕 협상의 실마리도 찾기 어려운 게 지금 한반도의 현실이다. 일이 왜 이 지경으로 꼬였는지, 얽힌 실타래를 어찌 풀지 살피려면 베트남 하노이로 돌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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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27~28일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은 2019년 한반도 정세의 ‘결정자’였다. 세 가지 부정적 영향이 컸다. 첫째, 북-미 불신, 특히 북한의 대미 불신을 폭발적으로 증폭했다. 둘째, 2018년 9월 남북 정상이 공감한 ‘영변 폐기-제재 완화 맞교환 카드’의 실패로 한국의 촉진자·중재자 노릇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셋째, 하노이 이후 미국은 ‘제재 이행’을 명분 삼아 유엔사령부와 한-미 워킹그룹을 수단으로 한국 정부의 남북관계 개선 노력을 철저하게 가로막았다. 2019년 남북 당국회담 ‘0회’는 그 직접적 결과다. 이러한 부정적 영향은 2020년 정세의 진로를 여전히 제약한다.
하노이 회담이 실패로 끝나리라 예상한 이는 거의 없다. 특별검사의 공세에 시달리던 트럼프 대통령은 혹시 몰라도, 김정은 위원장은 ‘합의 없는 회담 종료’는 꿈에도 생각해보지 않은 듯하다. 은 회담 사흘 전인 2019년 2월24일치 1면 보도를 시작으로 김 위원장의 하노이행을 “청사에 길이 빛날 애국헌신의 대장정”(박태성 노동당 중앙위 부위원장) 등으로 연일 선전했다. 2018년 6월12일 1차 북-미 정상회담의 ‘6·12 싱가포르 공동성명’에 버금갈 ‘하노이의 성과’를 염두에 둔, 전례 없는 사전 홍보였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합의 없는 회담 종료를 선언했고, 김 위원장은 빈손으로 평양으로 돌아와야 했다.
하노이 회담은 왜 실패했을까? 질문을 구체화해보자. 김정은 위원장은 왜 이미 다 알려진 ‘영변 카드’만 들고 하노이에 갔을까? 트럼프 대통령은 왜 영변 핵시설 영구 폐기와 일부 제재 완화를 교환하자는 김 위원장의 제안을 내쳤을까?
김 위원장은 하노이에서 트럼프 대통령한테 “영변 핵물질 시설의 영구적이고 완전한 폐기” 의지를 밝혔다. 이는 김 위원장이 문재인 대통령과 2018년 9월19일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북측은 미국이 6·12 북-미 공동성명의 정신에 따라 상응 조치를 취하면 영변 핵시설의 영구적 폐기와 같은 추가적인 조치를 계속 취해나갈 용의가 있음을 표명하였다”(9·19 평양공동선언 제5조 2항)와 사실상 같다. 김 위원장이 하노이에서 ‘영변+α’를 내놓으리라던 다수의 예상을 밑돈다. 모든 사안을 재선 유불리 여부로 판단하는 트럼트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 누구도 이루지 못한 북한 비핵화의 획기적 진전을 내가 이뤄냈다’고 자랑하기에 ‘영변’은 새롭지 않았다. 전직 고위 관계자는 “김 위원장이 하노이에 왜 이미 알려진 영변 카드만 들고나왔는지는 정말로 미스터리다”라며 “전략 착오”라고 한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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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변’은 가치가 큰 협상 카드였다. 북한 핵능력에 관한 한 세계 최고 권위자인 시그프리드 헤커 미국 스탠퍼드대학 명예교수는 영변 핵시설을 “북한 핵능력의 심장”이라고 비유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영변의 가치를 몰랐던 것 같지는 않다. 김 위원장은 “영변 핵시설 영구·완전 폐기”의 상응 조치로 “유엔 제재 결의 11건 가운데 2016년부터 2017년까지 채택된 5건, 그중 민수경제와 인민생활에 지장을 주는 항목들만 먼저 해제하라”고 제안했다.(2019년 3월1일 리용호 외무상 하노이 회견) 하노이 회담 첫날 트럼프 대통령은 김 위원장의 제안을 ‘안전장치’를 달아 받을 수 있음을 내비쳤다. 비핵화 약속을 이행하지 않으면 완화·해제한 제재를 되돌리는 ‘스냅백’ 조항이 그것이다.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은 2019년 3월15일 평양에서 각국 외교관과 국제기구 대표들을 대상으로 한 ‘하노이 회담 설명회’ 때 “트럼프 대통령은 합의문에 ‘제재를 해제했다가도 조선이 핵활동을 재개하는 경우 제재는 가역적이다’라는 내용을 더 포함시킨다면 합의가 가능할 수도 있다는 신축성 있는 입장을 취했다”고 밝혔다. 이어 “미 국무장관 폼페(이)오나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볼턴은 기존의 적대감과 불신의 감정으로 두 수뇌분들 사이의 건설적인 협상 노력에 장애를 조성했다”고 비판했다. 하노이 회담 내막에 밝은 이들을 취재해보니, 최 부상의 설명은 사실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의 선택이 보좌진의 반대 때문만은 아니었다. 다른, 어쩌면 결정적인 이유가 따로 있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하노이에서 김정은 위원장과 세기의 담판을 하고 있을 때, 미국민의 시선을 빼앗은 톱뉴스는 하노이 회담이 아니었다. 트럼프 대통령의 개인 변호사였던 마이클 코언의 ‘러시아 스캔들’ 관련 하원 청문회다. 는 반반씩 섞어 보도했지만, (CNN)은 코언 청문회를 생중계하며 하노이 소식은 화면 하단 자막으로 처리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워크 아웃”(walk out, 회담장에서 그냥 걸어나가기)으로 와 의 헤드라인을 “하노이 회담 결렬”로 일거에 바꿔버렸다.
회담 내막에 밝은 고위 외교 소식통은 “그때 코언 청문회가 없었다면 하노이 회담 결과와 한반도 정세도 달랐을 것”이라고 한탄했다. 김정은 위원장이 12월 전원회의에서 “미국의 본심은 대화와 협상의 간판을 걸어놓고 정치외교적 잇속을 차리”려는 것이라 하거나, 북쪽이 “미국이 주장하는 ‘지속적이며 실질적인 대화’란 우리를 대화탁에 묶어놓고 국내정치 정세와 선거에 유리하게 써먹기 위해 고안해낸 어리석은 잔꾀”(2019년 12월3일 리태성 외무성 미국담당 부상 담화)라고 진저리를 치는 까닭이다.
하노이 회담을 길게 되짚은 건, 그 잔해에 북-미 협상을 재개할 실마리, 새로운 북-미 합의의 기초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노이 이후 북-미의 간극은 좁아지기도 멀어지기도 했다.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부장관 겸 대북특별대표는 지난해 12월16일 서울 회견에서 “타당성 있는 단계”로 나눠 “유연한 조처”를 담은 “균형 잡힌 합의”를 추구하겠다고 밝혔다. 북쪽의 ‘단계적 접근·합의’ 주장에 호응한 셈인데, 쉽게 풀면 ‘영변부터 시작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하노이에서 사실상 일괄타결을 고수한 미국의 의미 있는 눈높이 조절이다. 새 협상의 토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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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미국은 여전히 ‘비핵화 조처 먼저, 제재 완화·해제 나중’ 방침을 고수한다. 비건 대표는 지난해 10월 초 스웨덴 스톡홀름 북-미 실무협상 때 6·12 싱가포르 공동성명 4개 항의 이행 구상을 6시간에 걸쳐 상세하게 설명했다. 북쪽 수석대표인 김명길 외무성 순회대사는 경청했고, 때로 질문했다. 상호 설명이 끝난 뒤 북-미 실무협상 대표단이 함께 기념사진도 찍었다.
하지만 김명길 대사는 실무협상이 끝나자마자 주스웨덴 북한대사관 앞에서 회견을 자청해 “협상은 결렬됐다”며 “미국의 구태의연한 입장과 태도”를 맹비난했다. 비건 대표는 아연실색했다. 비건 대표가 김명길 대사한테 북쪽의 핵심 관심사인 ‘한-미 군사훈련 중단’과 ‘제재 완화·해제’ 문제에 대해선 아무런 언질도 하지 않은 게 문제였다. 알렉스 웡 미 국무부 대북특별 부대표 겸 북한담당 부차관보도 지난해 11월5일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세미나에서 “한반도의 70년 전쟁 상태 종식”을 위한 “평화체제 구축”이 절실하다면서도 제재 문제는 입에 올리지 않았다. 웡 부대표는 그날 비공개 대화에서 ‘비핵화 먼저, 제재 완화·해제 나중’ 방침에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고 한 참석자가 전했다. 김명길 대사가 스톡홀름 회견에서 “미국이 우리가 요구한 계산법을 하나도 들고나오지 않았다”고 한 까닭이다.
말 만들기 좋아하는 일부 전문가는 김정은 위원장이 하노이 회담 이후 ‘비핵화-경제 교환’에서 ‘안보-안보 교환’으로 전략을 바꿨다고 분석한다. 정확하지 않다. 김 위원장은 ‘한-미 군사연습 중단’과 ‘제재 완화·해제’라는 양대 요구를 바꾸거나 접은 적이 없다. 2018년 4월20일 노동당 중앙위 7기 4차 전원회의에서 ‘경제·핵 건설 병진노선’ 종료를 선언하며 채택한 ‘사회주의 경제 건설 총력 집중’이라는 새로운 국가발전 전략노선이 성과를 거두려면 외부 환경 안정을 위한 ‘한-미 군사연습 중단’, 투자 유치와 경제개방을 위한 ‘제재 완화·해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김 위원장은 12월 전원회의를 통해 ‘대화와 제재의 굴레’, 곧 ‘고강도 제재 속 대화’에 더는 갇혀 있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김 위원장은 “조-미 대결은 오늘에 와서 자력갱생과 제재의 대결로 압축”됐다며 “자력갱생의 위력으로 적들의 제재 봉쇄 책동을 총파탄시키기 위한 정면돌파전에 매진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집권 초 “우리 인민이 다시는 허리띠를 조이지 않게 하겠다”(2012년 4월15일 태양절 100돌 연설)고 다짐했던 김 위원장이 이번엔 “허리띠를 졸라매더라도 기어이 자력부강, 자력번영”을 이뤄내겠다고 했다. 한동안 내핍과 인민의 생활상 고통이 불가피하다는 결연한 고백이다.
요컨대 김 위원장은 12월 전원회의에서 ‘경제 건설 총력 집중’ 국가발전 전략노선의 고수를 선언하며 “정면돌파전”을 호소했다. 그러곤 새해 첫 현지지도 대상으로 국방 분야가 아닌 ‘순천인비료공장 건설 현장’을 선택했다.( 1월7일치 1면) 김 위원장의 1순위 화두는 여전히 ‘경제’다. 김 위원장의 행보를 예측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핵심 가늠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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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읽기에 밝은 이들은 김 위원장이 신년사를 발표하지 않은 사실에 주목한다. 과 은 김 위원장의 전원회의 발언을 글로 상세히 전했지만, 은 김 위원장의 목소리를 내보내지 않았다. 김 위원장의 육성 없는 전언은 ‘방침 발표 유보’라는 해석으로 이어진다. 남북관계 관련 언급도 전혀 없었다. 이런 유보적 태도로, 정세에도 그만큼의 여지가 생겼다. 김 위원장이 당장은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 등 전략적 군사행동으로 한반도 전략 지형을 흔들지는 않으리라는 전망의 근거다.
한반도 평화 과정이 다시 동력을 얻으려면, 먼저 김 위원장의 유보적 태도가 “충격적 실제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한-미 군사연습 중단과 제재 완화·해제 여부가 관건이다. 그래야 김 위원장의 추가 비핵화 조처를 이끌어낼 길을 열 수 있다.
늦어도 3~4월께가 정세의 1차 갈림길이 될 듯하다. 한-미 군사연습 강행이냐 중단이냐에 따라 진로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지금 정세의 흐름에 비춰, 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이 ‘훈련 중단’을 결단할 가능성이 상당하다. 다만 이것만으론 협상 국면으로 본격 선회를 장담할 수 없다. 김 위원장이 이미 ‘고강도 제재 와중의 대화’를 거부해서다.
결국은 ‘제재’가 문제다.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의회와 여론의 강한 반대를 뚫고 ‘일부 제재 완화·해제’ 카드를 꺼내들 수 있을까? 지난 연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대북제재 일부 완화 결의안 초안을 돌려 북한의 연말 군사행동을 억제하는 데 기여한 중국·러시아가 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을 설득해 ‘제재 완화’와 ‘추가 비핵화 조처’의 교환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
트럼프 대통령이 끝내 제재 완화를 협상 카드로 쓰려 하지 않을 때, 문재인 대통령은 철도·도로 연결과 금강산관광 재개 등 제재 국면 돌파의 강수를 꺼내들 수 있을까? 김 위원장은 “남북협력을 더욱 증진시켜나갈 현실적인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더욱 절실해졌다. 남과 북이 머리를 맞대고 진지하게 함께 논의할 것을 제안한다”는 문 대통령의 1월7일 신년사에 호응할까? 그리하여 남북 당국회담 0회라는 2019년의 악몽을 떨쳐낼 수 있을까?
동북아 관련국의 예정된 일정도 정세의 주요 변수다. 3~4월 한-미 군사연습 일정이 위기 고조의 불쏘시개가 될 위험이 있다면, 상반기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한국·일본 방문은 정세 안정의 버팀목이 될 수 있다. 4월15일 한국의 총선 결과는 문 대통령의 대북정책 수행 기반을 결정적으로 약화하거나 강화할 수 있다. 도쿄올림픽(7월4일~8월9일)은, 2018년 2월 평창겨울올림픽처럼, 동북아 평화의 마중물이 될 수 있을까? 11월3일 재선에 모든 것을 건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 카드’를 어떻게 활용하려 할까?
<font size="4"><font color="#008ABD">좋은 질문이 좋은 답변을 예비한다</font></font>
그리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트럼프 대통령의 가셈 솔레이마니 이란 혁명수비대 쿠드스군 사령관 ‘드론 암살’이라는 초대형 돌발변수가 한반도 정세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신중하게 살펴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두 개의 전선’에서 싸우려 할까? 아니면 이란과 대결에 집중하려, 재선 가도에서 ‘외교 성과’를 과시하려, 김 위원장과 다시 마주 앉아 합의를 도출하려 할까? 이 돌발변수를 평화의 마중물로 삼을 지혜와 용기를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은 협력해 발휘할 수 있을까?
숱한 질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질 뿐, 누구도 쉽사리 ‘희망’을 말하지 못한다. 질문마다 한반도 8천만 시민·인민의 삶에 깊은 영향을 끼칠 잠재력이 있다. 좋은 질문이 좋은 답변을 예비함을 잊지 말자. 용기 있되 사려 깊은 행동은 더 좋다. 평화로운 삶을 바라는 이라면 누구라도 한반도가 다시 대결과 적대의 시간으로 퇴행하지 않도록 용기와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길이 어둡다고 걸음을 멈추진 말자.
이제훈 선임기자 nomad@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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