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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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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인프라를 활용해 지역의 노다지를 캔다

서울시 넥스트로컬 사업 참여자들 메이크푸드 가영씨,

주렁주렁스튜디오 수현씨, 소소리 성경씨, 세일러즈 유정씨
등록 2020-01-01 04:26 수정 2020-05-02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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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의 박푸른들씨, 진안의 배이슬씨, 화천의 임달래씨, 합천의 김예슬씨, 순천의 신건희씨, 전주의 임주아씨, 강릉의 김지우씨, 남해의 최창혁씨….
지역에 청년이 있습니다. ‘지역 소멸’을 말하는 시대에도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청년들입니다. 삭막한 자본주의에서 탈출해 지역으로 간 이들, 나고 자란 지역을 지키는 청년들. 농사를 짓고 문화공간을 만들고 마을을 기록하고 창업을 합니다. 서울에서도 지역 변화를 모색하는 청년이 있습니다. 그들은 아직 성장의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때론 흔들리기도 하고 주저앉기도 합니다. 힘들 때마다 흙냄새와 바람과 햇볕을 기억합니다. 자연과 사람의 연결을 귀하게 여기며 ‘같이’의 가치를 만듭니다. 신년호에서 그 지역의 청년 한명 한명의 목소리를 전합니다. 온전히 지역 중심의 이야기입니다. 2020년 ‘지역에서 변화를 꿈꾸는 청년들’ 연중기획은 이어집니다.
허윤희 기자 yhher@hani.co.kr, 장수경 기자 flying710@hani.co.kr, 조윤영 기자 jyy@hani.co.kr

“서울 사람.”

충남 논산 강경젓갈시장과 강경대흥시장의 상인들은 임가영(30) 메이크푸드 대표를 주로 그렇게 불렀다. 2019년 9월 “젓갈을 개발하겠다”며 서울과 지방을 오가는 외지인은 가영씨가 처음이었다. 조선시대 후기 대구, 평양에 이어 3대 시장으로 꼽히던 강경시장은 2019년 매출이 어느 때보다 쪼그라들었다. 오염된 조개젓에서 A형 간염 바이러스가 검출된 뒤 A형 간염 우려로 새우젓 수요가 줄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세 번의 태풍으로 새우 어획량이 줄어 젓갈 가격도 뛰었다. 그나마 한 해 동안 판매량이 가장 많은 10월 강경젓갈축제마저 아프리카돼지열병 확산 우려로 취소됐다. 이후 강경시장을 찾아오는 관광객은 평일 평균 10명이 채 안 되는 날이 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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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의 보석을 캐기 위해서

활기를 잃은 시장에 갑자기 나타난 ‘서울 사람’은 강경시장에 변화를 일으켰다. 맛과 색이 변하고 냄새가 나는 산패 현상을 줄이기 위해 플라스틱 용기 대신 간편하게 짜서 쓰는 스파우트 파우치에 젓갈을 담겠다고 했다. 삼겹살에 찍어 먹는 젓갈 소스를 만들겠단다. 가영씨를 반신반의하며 돕던 상인들은 ‘서울 사람’이 만드는 변화에 기대를 걸기 시작했다. 하지만 논산의 한 전통시장에 청년상인거리가 생긴 지 얼마 안 돼 처음 지원받은 점포들이 하나씩 문을 닫은 뒤 청년창업 지원사업에 대한 주민들의 반응이 호의적이지만은 않았다. “이모” “삼촌” 하며 붙임성 좋은 그에게 상인들은 완곡하게 당부했다. “실패만 하지 마라.”

강원도 영월, 경북 상주, 전북 군산, 충남 논산. 4개 지역의 공통점은 2016년 이후 만 19∼39살 청년이 해마다 줄어든다는 점이다. 청년층 유출과 저출산·고령화로 인한 인구 감소는 이들 지역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거스르기 힘든 큰 흐름 속에도 변화를 위한 작은 도전과 몸짓이 있다. 멀리 서울에서, 이들 지역을 바꿔보려는 청년들이 그렇다. 임가영 메이크푸드 대표, 주수현(26) 주렁주렁스튜디오 대표, 양유정(22) 세일러즈 대표, 박성경(31) 소소리 대표. 이 2019년 12월19일부터 24일까지 만난 이들은 서울시 ‘넥스트로컬’(Next local) 사업에 참여하는 팀들이다. 넥스트로컬은 서울에 사는 만 19∼39살 청년이 전국 지역과 연계한 창업을 할 때 조사 단계와 사업 아이템 숙성 과정에 드는 비용을 지원해주는 사업이다.

서울 안에서, 서울 밖 지역의 지속가능성을 고민하는 이들은 나름대로 지역에 대한 진정성이 있다. “지역에 도움이 될 만한 음식”을 만들고 싶어서(메이크푸드 가영씨), 획일적인 서울 문화에 질려 “지역의 보석 같은 매력을 노다지처럼” 캐고 싶어서(주렁주렁스튜디오 수현씨), “깨끗한 환경에서 건강한 먹거리를 먹으며 건강하게 일하는 새로운 생활 방식을 제안”하고 싶어서(소소리 성경씨), “지역의 고유한 바다를 담은 패브릭(천) 가방”을 만들고 싶어서(세일러즈 유정씨)였다.

하지만 이들은 지역에 자리를 잡고 정착하기보다는 일단 서울에 남길 택했다. 대신 서울의 인프라를 활용해 새로운 판로를 찾아 지역을 변화시키고 있다. 세일러즈 유정씨는 군산의 실력 있는 예술가들이 좋은 제품을 만들어도 판로를 찾지 못해 수익이 제한적인 현실에 공감했다. 유정씨는 2019년 10월 군산에서 활동하는 창작자 17개 팀을 만났다. 고향으로 돌아온 창작자도 있었고, 연고가 없지만 정착한 창작자도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혼자 활동하다보니 다른 지역에서 제품을 팔거나 다른 브랜드와 협업할 기회가 없었다.

세일러즈가 이르면 2020년 1월 선보일 첫 제품은 군산 옥도면의 63개 섬, 고군산군도 모습을 담은 패브릭 가방과 가죽으로 된 선글라스 케이스 등이다. 파도에 부서져 동그랗고 부드러운 몽돌과 바닷물이 밀려나간 뒤 드러난 갯벌 등을 추상적으로 그린 여행가방이다. 여기에 군산에서 가죽공방을 운영하며 일일 수업도 하는 창작자와 함께 가방에 넣고 다닐 선글라스 케이스 등을 만들어 크라우드펀딩 누리집에서 예약 판매를 받을 계획이다.

증강현실로 만들어지는 영월의 전설

이들이 지역에서 지속가능한 변화를 찾는 접근 방식은 다양했다. 지역 정착은 필수 조건이 아니었다. 주렁주렁스튜디오의 수현씨는 “굳이 일이 없는데도 일부러” 영월에 내려가려 하지는 않는다. “익숙해지면 무뎌질 영월만의 특색을 노다지처럼 캐”서 살리려는 수현씨 나름의 거리 두기다. 부산에서 태어나 대학 입학 뒤 서울살이를 한 수현씨는 부산 골목에 얼마 남지 않은 개성 넘치는 가게들과 직업들을 기록하고 문화적 가치를 재발견하는 ‘괴짜마켓’ 골목 상권 브랜딩 사업을 한 경험이 있다. 영월은 부산보다 훨씬 작았다. 2016년부터 관광객이 꾸준히 줄어 강원도 18개 시·군 가운데 17위(2018년 기준)를 기록한 곳이다.

수현씨는 영월에서 “사라져가는 것”을 찾기 시작했다. 지역 조사를 하며 읽게 된 책 에 소개된 지명 유래에 얽힌 민간 설화와 조선 제6대 왕인 단종이 묻힌 영월읍의 장릉은 수현씨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주렁주렁스튜디오는 영월 주민들 사이에서 구전돼온 단종을 수호하는 도깨비, 노루 등을 캐릭터로 되살려내 장릉을 기반으로 한 증강현실(AR·현실 세계에 3차원의 가상 물체를 합성해 실제 존재하는 사물처럼 보이게 하는 영상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2019년 11월14일 영월문화원과 업무협약(MOU)을 맺은 수현씨는 영월문화원의 도화민화연구소 작가들과 함께 AR 책에 들어갈 민화를 구상하고 있다.

메이크푸드의 가영씨가 논산 강경시장을 현장 조사하러 간 첫날, 카메라를 목에 걸고 휴대전화로 시장을 찍던 가영씨에게 나이 든 상인이 물었다. “혹시 유튜버예요?” “젓갈 상품을 개발해보려고 왔다”는 대답에 실망한 상인은 “영상을 찍어 올려달라”고 했다. 유튜버를 아는 상인이 신기했던 가영씨가 이유를 묻자 상인은 이렇게 말했다. “뉴스 보니까 유튜버 방송에 나오면 돈을 벌 수 있다던데 방법을 모르겠어…. 젊은이가 대신 올려줄래요?”

가영씨는 식자재 유통 업체를 운영하는 부모님을 도와 수확기에는 농촌에서 농사일도 거들고 2016년부터는 농산물을 떼다가 소매업체에 팔았다. 막상 유통업을 해보니 유통 구조가 복잡할수록 정작 1차 생산자에게 돌아가는 이윤은 적다는 것을 알았다. 계절별 매출 편차가 심한데다 흉년이면 생계를 유지하기도 어려운 생산자가 많았다. 가영씨는 ‘농산물을 활용해 자체적으로 음식을 만들면 지역의 새로운 먹거리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메이크푸드의 시작이었다.

서울시 넥스트로컬 사업에 참여하는 소소리. 소소리 제공

서울시 넥스트로컬 사업에 참여하는 소소리. 소소리 제공

어떻게 젓갈 수익을 강경으로 환원할까

11월이면 배추를 파는 ‘배추 장수’가 되는 가영씨가 김장에 들어가는 젓갈에 가장 먼저 관심을 가진 것은 자연스러웠다. 논산 강경포구는 어릴 적 김장철마다 전북 익산에 사는 할머니를 따라 젓갈을 사러 간 곳이었다. 20여 년 만에 강경시장에 갔지만, 단숨에 옛길을 떠올렸다. 20년 넘게 지났는데 “서글프게도” 그때 그대로였다. 메이크푸드는 논산의 낙지젓, 갈치속젓, 멸치젓 등을 희석한 삼겹살 전용 젓갈 소스를 개발하고 있다.

지역은 새로운 생활 방식을 제안하는 공간이 되기도 했다. 소소리 공동대표 이진경(32)씨는 2013년부터 2017년까지 건축설계 사무실에서 일했다. 발주처가 정한 마감일이 얼마 남지 않거나 급하게 설계를 변경해달라고 요청하면 새벽 퇴근이 일상이었다. 밤늦게까지 컴퓨터 모니터를 보다가 고개를 들면 차가운 벽만 눈앞에 있었다. 일과 일 외의 식사, 운동, 휴식 등을 도저히 병행할 수 없는 생활이었다. 일하는 공간마저도 “건강하지 않았다”고 한다. 소소리가 상주 아천1리 마을을 택한 이유였다.

아천1리 마을은 저출산, 고령화 등으로 마을 내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모두 문을 닫고 저수지와 도로를 따라 번창하던 이발관, 상점, 술집이 폐점한 작은 마을이었다. 소소리는 지역 협동조합인 ‘청년이그린협동조합’과 함께 폐교로 방치돼 있던 은천중학교 아산분교를 활용해 학교 1층에 마을 카페 등을 운영하고, 2층에는 자유롭게 일하다가 가볍게 운동도 하고 잠깐 휴식도 취하는 ‘코워킹 스페이스’(Coworking space·협업 공간)를 만들 계획이다. 학교 뒤편에는 마을에서 키운 농산물로 음식을 만드는 식당도 구상하고 있다. 한 공간에서 일도 하고 밥도 먹고 운동도 하고 휴식도 취하는 건강한 커뮤니티(공동체), 이들이 함께 만드는 아천1리의 새로운 변화다.

“(군산에) 와서 잘됐으면 좋겠다” “젊은이들이 (군산에) 와주니까 너무 반갑다”는 지역주민들의 말에는 그동안 경험한 실망과 새로운 희망이 섞여 있었다. 군산시 관계자는 세일러즈 유정씨에게 비슷한 당부를 했다. “청년창업 지원사업을 하면, 청년들의 행태가 대개 비슷하다. 돈을 보고 일단 창업했다가 얼마 안 가 문을 닫거나 효용 가치가 없어져 지역을 떠난다. 젊은이들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메이크푸드 가영씨는 삼겹살 전용 젓갈 소스에 ‘강경 맛깔젓’이라는 로고를 붙여 버는 수익금 일부를 상인회에 기부하는 방안을 상인들과 검토하고 있다. 사업 초기 가영씨는 “강경젓갈전시관을 개보수하는 비용으로 써달라”며 호기를 부리기도 했다. 하지만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가영씨에 대한 상인들의 믿음을 깨뜨릴 수도 있는 신뢰의 문제였다. “지역에 수익을 환원하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겠다”는 가영씨의 고민에 상인들은 이마를 맞대고 함께 고민한 끝에 영세 상인들이 제품을 더 효과적으로 홍보할 수 있게 돕는 교육 비용으로 우선 쓰기로 했다.

자전거길 그리고 경작용 트랙터와 경운기

서울 밖, 지역에서 태어난 사람들과 수도권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들이 지역에 거는 기대는 개인차가 있을 수 있다. 부산에서 태어나 22살부터 서울에 산 소소리 성경씨는 상주로 내려가기 전 들떠 보이는 같은 팀 진경씨에게 거듭 당부했다. 너무 기대하지 말라고. 상주자전거박물관이 있을 정도로 자전거를 내세운 상주지만 도시를 조금만 벗어나도 경작용 트랙터와 경운기, 트럭이 오가는 ‘농길’뿐이었다. 여전히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는 아천1리는 농경사회의 전통과 정체성이 남아 있는 마을이었다.

수도권에서 태어났지만 대학 입학 뒤 서울에서도 14차례나 이사했던 진경씨는 처음 마주한 상주의 작은 마을이 썩 낯설지만은 않았다. 서울에서도 ‘외지인’이었던 이들에게 지역은 또 다른 가능성이었다. 성경씨와 진경씨는 말했다. 지역에 반드시 자리를 잡고 산다고 해서 지역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성경씨는 지금처럼 서울과 지역을 오가며, “어느 때는 서울에 머물고, 또 어느 때는 상주에 더 머물” 계획이다. 이들은 자신의 삶을 바꿔줄 상주의 작은 마을에서 지역주민들과 함께 소소한 변화를 주고 있다.

조윤영 기자 jy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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