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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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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미투... 저는 8살 영혼 그대로입니다

‘오빠 성폭력’ 피해자 M의 고백
등록 2019-08-27 10:55 수정 2020-05-03 04:29
M이 그린 자화상 1. M 제공

M이 그린 자화상 1. M 제공

*‘오빠 성폭력’ 피해자 인터뷰를 1인칭으로 구성한 기사입니다.
저는 1980년생 여성 M입니다. 버스 안에서 제1273호 ‘#오빠 미투’를 읽다가 울다가 읽다가 울다가 그랬습니다. ‘오빠 성폭력’이라고 명확하게 얘기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사실 피해자들끼리 모여도 가해자를 구분할 생각을 못했습니다. 전문가들이, 언론에서 그렇게 쓰니까 그냥 ‘친족 성폭력’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성폭력 피해자 모임에 나가면 친족 성폭력 피해자가 너무 많아서 깜짝깜짝 놀랍니다. 평균 10~12명이 모이는데, 어떤 때는 10명이 친족 피해자입니다. 자기소개를 할 때 “저는 친족인데 가해자는 아빠고요, 저는 친족인데 가해자는 오빠고요” 이런 식으로 말합니다. 저 역시 1년 가까이 피해자 모임에 나갔지만 자기소개 첫 단어는 항상 ‘친족’이었습니다. 한 번도 ‘오빠’를 먼저 입에 올려본 적이 없습니다. 기사를 보면서 처음으로, 세상이 우리를 보는 방식대로 우리 역시 스스로를 뭉뚱그려 규정했다는 걸 알았습니다. 이참에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친족 성폭력 안에 오빠 가해자가 얼마나 많고 사촌오빠 가해자는 또 얼마나 많은지를 말입니다. 물론 아빠도 삼촌도 할아버지도 많습니다. 친족 성폭력 안에서도 그만큼 스펙트럼이 다양합니다. 세상이 모르면, 우리가 나서서 자꾸 말하고 알리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2남2녀 ‘번듯한’ 우리 집

지금부터 ‘이상한 정상가족’ 이야기를 들려드리려 합니다. ‘오빠 성폭력’이라는 주제를 들은 많은 분이 아마 제가 여러분과는 다른 ‘이상한 가정’에서 자랐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겉보기에 정상적인 가정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저희 아버지는 중공업 회사에 다니셨습니다. 어머니는 전업주부로 최선을 다해 2남2녀를 키우셨습니다. 큰오빠는 아버지와 같은 계통에서 일합니다. 가해자인 작은오빠는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 다니며 ‘가족만 생각하는 가장’의 모습으로 잘 살고 있습니다. 저는 시민단체에서 일했으며, 지금은 지방 중소도시 한 회사에 다니고 있습니다. 여동생은 준정부기관에서 일합니다. 겉보기에 2남2녀가 모두 잘 성장한 화목한 가정입니다.

다른 집과 조금 다르다면, 아버지가 재혼하셨다는 점입니다. 아버지가 전부인과 오빠 둘을 낳았고, 어머니와 재혼해 저와 여동생을 얻었습니다. 가해자인 작은오빠와 저는, 그러니까 아버지가 같고 어머니가 다른 이복형제입니다. 저희 엄마는 전 재산인 집을 효자인 작은오빠에게 물려주겠다고 하십니다. 자신이 잘 키운 전처 소생 아들을 그만큼 자랑스러워하십니다. 남들이 보기에 재혼 가정이라는 흠결마저 훈훈한 미담으로 극복한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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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부터는 정상가족의 감춰진 이면입니다. 아빠는 전부인이 떠맡기고 떠난 두 아들을 미워하셨던 것 같습니다. 저와 여동생한테는 안 그러셨지만 오빠들한테는 무서우셨습니다. 오빠들이 장난을 심하게 치거나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멀리 떨어진 건넌방에서 매 맞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릴 정도로 때리셨습니다. 어떤 분이 저한테 “오빠가 아빠한테 맞은 앙심으로 너한테 그랬을 수 있다”고 ‘분석’해준 적이 있습니다. 오빠한테 무슨 성폭력의 당위성이라도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 사람 말에는 너무 화가 났지만 제가 피해 사실을 바로 말하지 못한 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부모님한테 말씀드리면 오빠가 아빠한테 맞아 죽을까봐….

엄마는 결혼 전 ‘처녀성’을 잃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시는 분입니다. 엄마는 성적인 면에서 유독 심하게 저를 ‘단속’하셨습니다. 자취할 때는 경비 아저씨 전화번호까지 알아내셔서 저의 통금을 확인하실 정도였습니다. “다리 벌리지 마라” “몸가짐 바르게 해라” “낯선 사람 따라가지 마라” 항상 주의를 주셨는데, 다 소용없는 일이었습니다. 낯선 사람이 아니라 한집에 사는 친오빠가 성폭력을 저질렀으니 말입니다. 엄마는 연애도 절대 안 된다고 금지하셨습니다. 제가 대학교 1학년 때 데이트폭력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이별을 통보하자, 그는 태도가 돌변해 저를 때리고 협박했습니다. 엄마한테 전화해 “당신 딸 걸레 같은 년”이라는 둥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엄마는 제 말을 안 믿고 그 남자한테 들은 말로 저를 추궁했습니다. 제가 오빠한테 당한 일을 말 못한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합니다. 엄마가 몸단속을 제대로 못한 제 잘못이라고 하실까봐, 제가 ‘더러워졌다’는 걸 알면 저를 비난하실까봐….

저는 작은오빠가 한 짓이 알려지면 가족이 와해될 거라 생각했습니다. 어제의 우리 가족과 오늘의 우리 가족이 달라질 것 같은 불안이 너무 컸습니다. 화목한 우리 가정을 깨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얼마나 가족을 지키고 싶었으면 ‘내가 꿈을 꾼 것이 아닐까?’ 스스로를 속이려 노력하며 살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 가족이 화목하다는 것도 다 착각이었습니다. 오빠들은 아빠한테 맞아서 괴롭고 저는 오빠한테 성폭력을 당해서 괴로운데, 이런 일을 온전하게 드러내놓지 못하는 가족… 그런 가정이 정말 화목한 가정이었을까요?

눈을 뜨고 “오빠” 하고 불렀더니

아버지가 끝내 모르고 돌아가신 그 일, 엄마가 우리 집에서 일어났을 거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않는 그 일은 제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처음 벌어졌습니다. 6월 무렵 제가 여름감기에 걸렸던 것 같습니다. 엄마가 약을 사러 나가셨습니다. 네 살 위 오빠, 세 살 아래 여동생, 그리고 저… 이렇게 셋이 집에 남았습니다. 작은오빠는 부모님 앞에서 매우 착한 아들이었고 저희를 잘 돌봤습니다. 그날도 엄마는 오빠에게 저희를 믿고 맡겼습니다. 그날 오빠는 아픈 저를 굳이 오빠 방으로 불렀습니다. 보여줄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아픈 저를 눕히더니 제 성기를… 들춰보고 만져보고 눌러보고 찔러보고 입도 댔습니다. 제 성기 안으로 뭔가 들어오려다 못 들어온 그 느낌이 너무 잘 기억이 납니다. 그날 천장의 벽지 무늬, 차가운 방바닥과 장판의 촉감, 바닥에 흘렀던 끈적끈적하고 젤리 같은 느낌, 정액 냄새…. 오빠가 저를 다시 안방으로 돌려보낸 뒤의 일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그 순간의 기억만큼은 이상하리만치 선명합니다. ‘내가 아픈데 오빠가 왜 나를 더 아프게 하지?’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인지 몰랐지만 뭔가 대단히 안 좋은 일이라는 건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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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저희 집엔 방이 두 개 있었습니다. 저와 여동생이 안방에서 부모님과 함께 잤습니다. 작은오빠는 주로 엄마가 방과 멀리 떨어진 주방에 계실 때 텔레비전을 보는 척하면서 안방에 들어왔습니다. 그러고는 제 속옷 안에 손을 집어넣거나 제 입에 혀를 밀어넣었습니다. 저는 자는 척하면서도 이를 꽉 깨물고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저항을 했습니다. 오빠도 제가 자지 않았다는 걸 알았지만 무시했습니다. ‘계속 자는 척을 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한 건 6학년 때였습니다. 그땐 방 세 개짜리 집으로 이사해 제 방이 있었습니다. 오빠가 또 제 방에 들어온 그날, 저는 처음으로 눈을 뜨고 “오빠”라고 불렀습니다. 오빠는 놀라서 방을 나갔습니다. 그날 이후 오빠는 제 몸을 만지지 않았습니다.

또 다른 오빠, 친족은 아니지만 친척보다 가깝게 지냈던 ‘아빠 친구 아들’로부터도 비슷한 시기 비슷한 일을 당했습니다. 저희 가족이 모두 그 집에 놀러 갔고, 어른들은 술도 한잔 걸치며 즐거운 한때를 보냈습니다. 그 집도 2남2녀였는데, 둘째 아들, 그러니까 그 집 작은오빠가 “옥상에 재밌는 거 있다”며 저를 데리고 올라갔습니다. 어른들이 모두 지켜보고 있었지만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가족 같은 사이였으니까요. 그날 아파트 옥상에 눕혀진 채 벗겨졌던 제 스타킹, 낮과 저녁의 중간 무렵 내리쬐던 햇살, 바람의 방향에 따라 풍향계가 돌아가던 풍경이 잊히지 않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무렵부터 3학년까지, 아빠 친구 아들한테도 몇 차례 더 그런 일을 당했습니다.

저는 청소년기 내내 신경질이 많았습니다. ‘그냥’ 모든 게 짜증스러웠습니다. 중·고등학교 때 모든 화풀이를 엄마한테 했습니다. 공부가 안되든 친구관계가 어렵든 무슨 일이 안 풀리든 모든 화를 엄마한테 쏟아냈습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왜 그러는지 몰랐습니다. ‘엄마가 조금만 더 일찍 눈치챘으면 나를 보호해줄 수 있었을 텐데…’ 정확한 이유는 몰랐지만, 저를 지켜주지 못한 엄마에 대한 원망이 컸던 것 같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엄마는 “내가 널 어떻게 낳아 키웠는데 엄마한테 이러느냐”고 속상해하셨습니다.

술만 마시면 성적인 이상행동

더 큰 문제도 있었습니다. 저한테 정말 더러운 것이 묻었다고 생각했고, 저한테 정말 더러운 냄새가 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이 저의 더러움을 알아볼까봐 늘 두려워하며 눈치를 봤습니다. 만일 몸의 한 부분에 장애가 생긴다면, 어디가 가장 불편할까요? 저는 주저 없이 눈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저를 쳐다보는 눈을 살피지 못하면 너무 불안하고 괴롭기 때문입니다. 저는 눈치가 매우 빠르고, 사람들의 감정을 예민하게 느낍니다. 사람들의 표정이 조금만 바뀌어도 자기 비하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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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이성의 끈을 놓으면… 제 몸을 함부로 위험에 내던집니다. 술에 취하면 아무 남자하고나 잠을 자려 했습니다. 술을 잔뜩 마시고 클럽에 갔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모르는 남자 손을 잡고 모텔 앞에 와 있었습니다. 너무 무서워서 줄행랑을 쳤고, 그 남자가 등 뒤에서 쌍욕 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인간관계에도 문제가 생겼습니다. 술만 마시면 친구 애인이든 누구에게든 성적으로 행동했습니다. 충동적으로 꼬셔서는 안 되는 사람을 꼬셨습니다. 실제로 성관계를 맺기도 했습니다. 그 사실이 알려져 친구들과 관계가 단절되기도 했습니다.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저는 도마뱀처럼 꼬리를 자르고 다른 지역으로 거주지를 옮겼습니다. 스무 살 이후로 반복되는 일입니다. 지금 사는 곳에도 그렇게 오게 됐습니다.

응급실 가는 심정으로 개인 상담을 시작했습니다. 저는 스스로를 ‘타고난 성격이 이상한 사람’이고, ‘남자를 밝히는 애’고, ‘술을 많이 마시면 실수하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한 번도 제가 오빠에게 당한 성폭력과 연결지어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 상처를 건드리고 싶지도 않았고, 누구한테 물어볼 데도 없었고,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었으니까요. 제가 성폭력 피해자에게 나타나는 전형적인 ‘손상된 물건 증후군’(부정적 자아상을 갖게 되는 것) 케이스라는 사실은 의 ‘오빠 성폭력’ 기사를 보면서 알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손상된 물건 증후군이라고 한들, 친구가 저를 이해해줄 수 있을까요?

공부하면 나아질 줄 알았는데

저는 괜찮은 척 가면을 쓰고 사회생활을 하는 데 익숙합니다. 지금도 제가 굳이 얘기하지 않으면, 모두 저를 멀쩡한 사람으로 봅니다. 가슴 깊숙이 묻어둔 그 기억이 다시 올라온 건 2년 정도 됐습니다. 두 가지 계기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다니던 직장에서 발생한 성폭력 사건입니다. 모두가 우왕좌왕하는 사이 제가 중재자 역할을 하며 사건을 처리해야 하는 처지였습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동료였기 때문에, 두 사람 모두에게 제가 가해자가 된 것 같고 또 피해자가 된 것도 같았습니다. 사건은 경찰에 고소한 뒤 합의를 보면서 마무리됐습니다. 이 사건으로 가해자가 사임했는데, 그가 6개월 뒤 숨졌다는 소식을 전해들었습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너무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다른 하나는 제 조카, 가해자인 작은오빠의 딸이었습니다. 직장 성폭력 사건이 있을 무렵 조카가 초등학교 4~5학년이었습니다. 조카는 “고모, 고모” 하면서 저를 잘 따랐습니다. 어느 날 조카가 자기 아빠인 제 오빠와 장난을 치는데, 오빠의 손이 조카의 허벅지 사이로 들어가는 걸 봤습니다. 딸을 들어올리며 노는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행동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구역질이 나서 차마 볼 수 없었습니다. 사실 조카가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저는 꾹꾹 참으며 불안한 마음으로 아이를 지켜봤습니다. ‘설마 자기 딸한테는 안 그러겠지.’ 오빠에 대한 일말의 믿음은 있었지만, 설사 그런 일이 있다고 해도 제가 조카를 지켜줄 수가 없었습니다. 오빠와 조카를 지켜보는 데 한계가 온 것 같았습니다.

두 사건이 맞물리면서 과거의 상처가 걷잡을 수 없이 올라왔습니다. 직장을 때려치우고, 엄마와 작은오빠를 안 보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여성학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바보 같은 생각인데,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고 혼자 페미니즘을 공부하면 나아질 것 같았습니다. 그동안은 제가 부족해서 힘들었고 공부를 하면 치유되리라고 생각한 겁니다. 열풍처럼 휘몰아친 #미투 운동 집회에도 열심히 참여했습니다.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성폭력상담가 교육도 받았습니다. 기억은 자꾸자꾸 올라오는데 나아지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수업 시간에 친족 성폭력 다큐멘터리 이 상영됐습니다. 그걸 보다가 제가 너무 심하게 오열했습니다.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 상담소 활동가분께 처음으로 제 얘기를 꺼냈습니다. 성폭력상담소에서 매달 여는 자조모임 ‘성폭력 생존자 작은 말하기’에도 참석했습니다. 개인 상담도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제 상처를 꺼내놓기 시작한 지 1년 남짓 되었습니다. 이제 겨우 ‘뚜껑’을 열었을 뿐인데 너무 힘이 듭니다. 상처를 꺼내고 나서 다시 여덟 살로 돌아간 것 같습니다.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저는 지금 그때로 돌아가서 저를 찬찬히 다시 보는 중입니다. 그 사건 이후 제 자아가 성장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여덟 살과 마흔 살의 간극을 좁히려면, 1~2년으로는 안 될 거라 각오하고 있습니다.

M이 그린 자화상 2. M 제공

M이 그린 자화상 2. M 제공

여동생에게 피해 사실을 털어놓았지만

가족 중에서는 유일하게 여동생에게 피해 사실을 털어놨습니다. 유대관계가 끈끈한 동생이었지만, 친족 성폭력 피해자 가족이 보여주는 ‘전형적인 반응’ 그대로였습니다. 동생의 첫마디는 “언제? 엄마가 전업주부라 늘 집에 계셔서 오빠가 그럴 틈이 없었잖아”였습니다. 몇 살 때 언제 그랬는지 일일이 다 설명하니 제 말을 믿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가족 모두가 있는 앞에서 이 얘기를 털어놓고 오빠에게 사과받고 싶다는 제 생각에는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동생은 저보다 엄마를 더 걱정했습니다. “엄마가 연세도 많으시고 혈압도 높으신데 엄마 생각은 안 해? 엄마 쓰러지시면 어떻게 할 거야?” 1년간 엄마를 안 보다가 다시 연락하게 된 것도 동생의 성화 탓입니다.

동생은 심지어 가해자인 작은오빠를 저보다 더 걱정했습니다. 제가 오빠를 2년간 안 보고 있습니다. 동생은 오빠가 걱정할까봐 “언니가 가족을 다 안 만난다”고 둘러댔습니다. “새언니가 오빠랑 이혼하면 어떻게 해? 언니 때문에 오빠 가정이 깨지면 언니가 책임질 거야?”라고 오히려 제 책임을 언급하기도 합니다. 동생은 저더러 “사과받고 싶으면 오빠랑 둘이 조용히 얘기해서 사과받으라”고 조언했습니다. 제 생각은 다릅니다. 저와 오빠 둘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가족의 문제이고 우리 모두가 연결된 공동체의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확 미쳐버리지 않고 잘 사는 척했던 제가 잘못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죽고 싶었던 건 전데, 왜 제가 가해자 가정까지 걱정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결혼 8년차입니다. 아이 낳는 문제로 저희 가정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위기를 겪었습니다. 남편은 아이를 낳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들을 낳으면 성폭력 가해자가 될 것 같고 딸을 낳으면 피해자가 될 것 같아서 낳을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불안정한 마음으로 열 달 동안 아이를 품을 자신도 없습니다. 제 자신을 돌보기도 벅찬데 한 인격체를 낳아서 잘 기를 자신은 더더욱 없습니다.

결혼 전 남편한테 미리 얘기하지 못한 게 너무 미안합니다. 얘기하면 저랑 결혼을 안 할 것 같았습니다. 그때만 해도 제가 무덤까지 가져가려고 각오했던 일이라 굳이 말할 필요를 못 느꼈습니다. 하지만 성폭력 생존자 자조모임에 참여하고 상담 프로그램에 참여하느라 일주일에 두세 번씩 서울을 왔다갔다 하면서 더는 숨기기 힘들어졌습니다. 오가는 차 안에서 너무 울어 눈이 퉁퉁 부은 채 집에 돌아오곤 했습니다. 결국 지난해 겨울 작은오빠한테 당한 일을 남편에게 털어놨습니다. 손상된 물건 증후군 얘기까지는 차마 꺼내지 못했습니다. 남편은 “안 좋은 일인데 이제 와 굳이 얘기를 꺼내면 가족이 모두 힘들지 않을까? 어렸을 때 일인데 계속 붙들고 살면 당신만 손해다. 그냥 탈탈 털어버리면 안 되느냐”고 했습니다.

털어서 털어지는 일이라면, 누구보다 제가 먼저 털어버리고 싶습니다. 그게 안 되니까 이러는 겁니다. 제 인생이 뿌리째 흔들리는 상황에서 이제는 뭐라도 해야겠습니다. 세상 모든 피해자에게 똑같은 해결 방법은 없습니다. 어떤 피해자는 고소하고 가해자와 등지고 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공소시효가 남았다고 한들 고소할 생각이 없습니다. 오빠한테 진심 어린 사과를 받고 싶을 뿐입니다. 사과만 받으면 가족 행사 때 오빠를 다시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오빠는 딱 잡아뗄 거라고 생각합니다. 오빠 쪽에서 적반하장으로 저를 안 본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피해자 모임에서 그런 사례를 너무 많이 봤습니다. 하지만 제가 사과 말고 오빠한테 달리 받아낼 것도 없는데,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이제 와 오빠를 음해하겠습니까?

동생에겐 내가 가해자

제가 오빠의 사과에 집착하는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사실… 저도 동생에게 사과해야 할 가해자입니다. 오빠로부터 그 일을 당한 직후 잠시나마 저 역시 동생에게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을 했습니다. 그 일 이후 두세 달 정도… 이불 속에서 장난치듯 킥킥거리며 동생의 몸을 만졌습니다. 동생도 제 몸을 만지게 했습니다. 너무 어렸을 때 일이라 그런지, 그때 일을 지운 건지 동생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듯합니다. 저 역시 누구한테도, 심지어 상담사에게도 털어놓지 않은 마지막 비밀입니다. 오빠한테 사과를 받고 제 상태가 안정되면, 동생이 기억을 하든 못하든 진심으로 사과할 생각입니다. 제가 저의 아킬레스건인 동생 이야기까지 꺼낸 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서입니다. 저와 비슷한 일을 겪고 또 저와 비슷한 행동을 한 친구들이 있다면, 죄책감에 짓눌리지 말고 사과받고 사과하고 괜찮아지라고 용기를 주고 싶습니다. 엄청 울 줄 알았는데, 씩씩하게 잘 이야기한 것 같아 제 자신이 대견합니다. 힘들고 긴 저의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정윤 기자 ggu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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