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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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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가 이마, 목, 턱에 총 맞은 것을 보다

베트남 전쟁 민간인 학살 피해자 103인 청와대 청원
등록 2019-04-02 03:18 수정 2020-05-05 16:39
대한민국 청와대에 청원서를 제출하는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피해자’ 103명이 피해를 당한 베트남 꽝남성, 꽝응아이성 내 17개 마을의 위치다. 위령비·공동묘·가족묘 좌표 또는 위령비 주변 마을의 좌표를 지도에 표시했다. 한베평화재단 누리집(kovietpeace.org)에서 더 많은 장소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대한민국 청와대에 청원서를 제출하는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피해자’ 103명이 피해를 당한 베트남 꽝남성, 꽝응아이성 내 17개 마을의 위치다. 위령비·공동묘·가족묘 좌표 또는 위령비 주변 마을의 좌표를 지도에 표시했다. 한베평화재단 누리집(kovietpeace.org)에서 더 많은 장소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1966~72년 한국에서 베트남으로 파병된 전투부대인 청룡부대는 남쪽의 꽝응아이성에서 북쪽 꽝남성으로 이동하며 마을을 차례로 파괴했습니다. 베트남의 대동맥인 1번 국도 사수가 주요 임무였던 청룡부대는 남베트남인민해방전선 인민해방군(베트콩) 수색을 쉽게 하기 위한 ‘주민 소개’ 작전을 한다는 명목으로 수많은 민간인을 무참히 죽이고 마을을 불태웠습니다. 한국군 파병기간(1964~73년)에 민간인 학살 피해자 9천 명 중 4천 명이 꽝남성에 묻힌 것으로 추정됩니다.
살아남은 자의 증언은 지난 20년간 <한겨레21>과 한베평화재단 등 시민사회의 ‘미안해요, 베트남’ 운동으로 한국 사회에 조금씩 알려졌습니다. 이제 그들은 직접 한국 정부를 움직이기로 했습니다. 진상 규명과 공식 사과, 피해 회복 조처를 요구했습니다. 그 시작이 청와대 청원입니다. 17개 마을에서 희생자 유가족과 피해자 103명이 청원서에 서명했습니다. 103개 청원서는 4월4일 이들 손으로 직접 청와대에 전달됩니다. <한겨레21>은 17개 마을에 살았던 17명의 청원서를 공개합니다. 그리고 103명의 얼굴을 모두 담았습니다. 청와대는 최대 150일 안에 청원인에게 대답을 줘야 합니다. 17개 마을에 살았던 17명의 청원서를 5개 기사로 각각 나눠 실었습니다.

묘비에 “남조선군에게 살해당하다”를 적다

꽝응아이성 선띤현 띤선사 지엔니엔 마을(지엔니엔 학살)

응우옌티로안(Nguyễn Thị Loan)

생년월일: 1937년 10월7일

피해 날짜: 1966년 10월2일(양력 1966년 11월13일)

피해 내용: 당시 저는 29살이었습니다. 결혼해 다른 마을에 살고 있었습니다. 학살이 있기 전날 한국군이 마을로 올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우리 가족은 살림살이가 걱정돼 마을에 남았습니다. 다음날 닥친 한국군은 어머니 타오티닷과 세 여동생, 조카를 죽였습니다. 아버지는 배와 다리에 총상을 입었습니다. 저는 소식을 듣고 마을로 돌아와 어머니와 여동생의 주검을 수습했습니다. 여동생 티헌, 티라이, 티뚜옌은 26살, 24살, 12살이었습니다.

한국군은 먼저 옆마을 프억빈에서 학살을 저지른 뒤 우리 마을로 왔습니다. 츤산에 주둔하던 청룡여단 3대대 소속 1개 중대였다고 합니다. 그들은 주민들을 지엔니엔 사당으로 끌고 가 학살했습니다. 이곳 사당에서 죽은 사람이 50여 명입니다. 이날 하루에 우리 마을 사람 112명이 희생됐습니다. 고 탐티메오 할머니는 가족 11명을 잃었습니다. 할머니는 “3명 이상이 모여 있으면 막 총을 쏘며 죽였다”고 이후에 증언했습니다. 한국군이 다시 올까봐 참혹하게 죽은 가족의 장례를 제대로 치러주지 못한 사람도 많았습니다. 이날 어머니와 남동생을 잃은 팜티띠엔은 이것이 한으로 남았습니다. 저는 가족의 묘에 “남조선군에게 살해당하다”라는 글귀를 넣었습니다. 가족 잃은 원통함을 다른 이들에게 알리고 싶었습니다. 식구를 잃은 뒤 정신적으로 힘든 세월을 보냈습니다. 제가 큰 부상을 입은 아버지를 돌봐야 했습니다. 아버지는 후유증으로 고생하다 6년 뒤 돌아가셨습니다.

한국에 바라는 것: 한국 정부든, 한국의 그 어떤 단체든 한국군 학살 피해자들과 그 유가족이 고통을 덜 수 있도록 지원해주십시오.

20명 중 14명이 여자, 8명이 10살 이하

꽝응아이성 띤토사 토떠이 마을(버짜이 논 학살)

도티미레(Đỗ Thị Mỹ Lệ)

생년: 1954년

피해 날짜: 1966년 10월17일(양력)

피해 내용: 나 청원인 도티미레는 학살 현장에서 살아남았습니다. 한국군이 집안을 뒤져서 마을 사람들을 버짜이 논에 모아놓고 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졌습니다. 큰소리로 울부짖던 사람들이 총에 맞아 쓰러졌습니다. 나와 여동생은 총알이 빗발칠 때 몸을 웅크렸고 두 시간 동안 죽은 듯이 꼼짝 않고 엎드려 있었습니다. 두 남동생은 죽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소식을 듣고 달려와 우리 자매를 구했습니다. 두 남동생의 주검을 묻고 우리 가족은 낌사라는 곳으로 피란을 갔습니다. 어머니는 콰이미(구황작물)와 쌀을 구하러 집으로 갔다가 한국군에 붙잡혀 총에 맞아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또 다른 생존자 도반즉은 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짜빈동 기지에 있던 한국군이 전날 행군하다가 지뢰를 밟아 몇 명 죽었다죠. 그날 아침 주민들을 모았대요. 한국군이 지뢰에 관해 심문하면서 일부 주민을 때렸고 대검을 꺼내 한 여자의 몸을 찔렀나봐요. 다른 이들이 놀라 소리를 지르며 달아나자 일제히 사격을 했대요. 저는 살아나 죽은 엄마 배 위에 올라가 젖을 빨았다고 합니다.”(제1250호 ‘고경태의 1968년 못다 한 이야기’ 참조) 도반즉은 어머니가 안고 있던 덕에 목숨을 구했습니다. 이날 학살에서 그의 형도 죽었습니다.

버짜이 논 학살에서 죽은 사람이 20명입니다. 다른 곳에서도 16명이 죽어, 이날 띤토사에서 죽은 사람이 36명입니다. 다음날에는 반호아촌에서 21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당시 이 지역에는 9중대가 주둔했습니다. 2015년 세워진 버짜이 논 위령비에 이름이 적힌 20명 중 14명이 여자고 8명이 10살 이하였습니다.

한국에 바라는 것: 초라한 어머니와 동생들의 무덤을 정갈하게 단장할 수 있도록 한국이 지원해주었으면 합니다. 위령비로 들어가는 길이 포장되지 않아 비만 오면 잠기고 주민들이 오가기가 매우 불편합니다. 한국이 이 길을 정비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피의 빚은 피로 갚게 되리니”

꽝응아이성 빈선현 빈호아사 안프억 마을(빈호아 학살)

응우옌니엠(Nguyễn Niệm)

생년: 1933년

피해 날짜: 1966년 12월6일(양력)

피해 내용: 이날 아침 6시께 한국군이 몰려온다는 말을 듣고 마을 밖으로 달아났습니다. 그때 나는 33살이었습니다. 한국군이 떠나자마자 마을로 돌아가 가족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아내 도안티디엡(당시 24살)과 두 딸인 응우옌티오안(4살), 응우옌티훙(2살)은 숨진 뒤였습니다. 첫째 아들 응우옌타인뚜언(8살)의 등에는 수류탄 파편이 잔뜩 박혀 있었습니다. 막내아들 응우옌반중(3개월)은 닷새도 못 넘기고 숨을 거뒀습니다. 몇몇 아이만이 마을에서 살아남았습니다. 한국군은 노인과 여성을 무차별 학살했습니다.

지금도 가족의 주검을 수습하던 그때가 눈앞에 선합니다. 오후부터 비가 쏟아졌습니다. 주검들은 진흙 범벅이 됐습니다. 누가 누군지도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시신들을 하나하나 닦아 가족을 찾아야 했습니다. 관도 없이 땅에 그대로 묻어야 했습니다. 막내아들까지 떠나보내야 했던 날, 비통한 심경을 ‘증오’라는 시로 남겼습니다. “피의 빚은 피로 갚게 되리니 이 증오 영원하리라!” 시를 적은 일기장을 지금까지도 갖고 있습니다.

1966년 12월3·5·6일(양력 기준) 사흘에 걸쳐 꽝응아이성 빈선현 빈호아사에서 일어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로 430명이 희생됐습니다. 빈호아 학살은 다섯 곳에서 일어났습니다. 한 곳에서는 한국군이 학살을 마친 뒤 우물에 주검을 던졌습니다. 우물이라 잘 타지 않으니까 지푸라기도 넣고 기름을 부어 주검을 태웠습니다. 이후 마을 사람들은 수십 년 동안 옆 마을까지 왕복 40분 거리를 물지게를 지고 오가며 물을 길어 먹었습니다.(제1175호 ‘학살을 외면하지 않았을 뿐’ 참조)

한국에 바라는 것: 한국 정부는 빈호아 학살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고 반드시 사과해야 합니다. 적어도 피해자와 유가족의 고통을 위로하기 위한 인도적 차원의 보상이 이뤄져야 합니다.

할아버지가 이마, 목, 턱에 총 맞은 것을 보다

꽝응아이성 선띤현 띤하사 하떠이 마을(하떠이 학살)

쩐티따이(Trần Thị Tại)

생년: 1956년

피해 날짜: 1966년 11월8일(양력)

피해 내용: 아침 8시께, 마을을 가로질러 행군 중이던 한국군이 집으로 들이닥쳤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항상 아침 일찍 강으로 나가 고기잡이를 했고 하루의 대부분을 할아버지(쩐또안·당시 61살)와 단둘이 지냈습니다. 한국군은 할아버지 손을 잡고 있던 나(당시 10살)를 밀쳐낸 뒤 할아버지를 마당으로 끌어냈습니다. 할아버지가 이마, 목, 턱에 차례로 총 맞는 것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도망치려 방공호(땅굴)로 뛰어들어 다른 출구 쪽으로 달렸습니다. 한국군이 방공호에 수류탄을 던졌습니다. 그전에 방공호를 빠져나와 다치지 않았습니다. 그날 한국군은 그런 식으로 집집이 들어가 주민들을 죽였습니다. 한국군이 마을을 떠난 뒤 나는 집으로 돌아와 할아버지 주검을 돗자리로 덮고 다른 마을로 피신했습니다. (현재 하떠이 마을에는 “1966년 11월 하따이촌에서 남조선 군대에 의해 학살된 동포들을 기린다”고 쓰인 위령비가 서 있다. 베트남전 당시 해병 중대장이던 김기태씨는 <한겨레21> 제305호(2000년 4월) ‘중대장도 모르는 또 다른 싹쓸이’에서 “1개 소대가 마을에 들어갔다. (나는 마을에 안 들어갔지만) 마을 밖에서 집이 불타고 연기가 솟아오르는 것을 목격했다”고 털어놨다. 당시 마을 주민 20명이 죽고 쩐티따이만 살아남았다.)

나는 선천적인 척추장애가 있습니다. 할아버지는 가족 중에 나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고, 장애를 가진 손녀를 끔찍이도 아끼셨습니다. 할아버지를 잃은 일이 내게는 부모를 잃은 것만큼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날 이후, 할아버지가 한국군에게 살해당하던 모습이 계속 머릿속에 떠올라 오랫동안 정신적 고통에 시달렸습니다. 마을에서 더는 살 수 없어 부모님과 피란민 생활을 하며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한국에 바라는 것: 나는 척추장애가 있고, 남편도 아이도 없이 혼자 어렵게 살고 있습니다. 할아버지는 나에게 부모나 다름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나와 같은 베트남 피해자와 유가족들을 도와줬으면 좋겠습니다.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조윤영 기자 jyy@hani.co.kr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한베평화재단, 후원계좌 KB국민은행 878901-00-009326, 문의 02-2295-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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