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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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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도저로 희생자 무덤 밀어버렸다

베트남 전쟁 민간인 학살 피해자 103인 청와대 청원
등록 2019-03-30 17:16 수정 2020-05-03 04:29
대한민국 청와대에 청원서를 제출하는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피해자’ 103명이 피해를 당한 베트남 꽝남성, 꽝응아이성 내 17개 마을의 위치다. 위령비·공동묘·가족묘 좌표 또는 위령비 주변 마을의 좌표를 지도에 표시했다. 한베평화재단 누리집(kovietpeace.org)에서 더 많은 장소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대한민국 청와대에 청원서를 제출하는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피해자’ 103명이 피해를 당한 베트남 꽝남성, 꽝응아이성 내 17개 마을의 위치다. 위령비·공동묘·가족묘 좌표 또는 위령비 주변 마을의 좌표를 지도에 표시했다. 한베평화재단 누리집(kovietpeace.org)에서 더 많은 장소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1966~72년 한국에서 베트남으로 파병된 전투부대인 청룡부대는 남쪽의 꽝응아이성에서 북쪽 꽝남성으로 이동하며 마을을 차례로 파괴했습니다. 베트남의 대동맥인 1번 국도 사수가 주요 임무였던 청룡부대는 남베트남인민해방전선 인민해방군(베트콩) 수색을 쉽게 하기 위한 ‘주민 소개’ 작전을 한다는 명목으로 수많은 민간인을 무참히 죽이고 마을을 불태웠습니다. 한국군 파병기간(1964~73년)에 민간인 학살 피해자 9천 명 중 4천 명이 꽝남성에 묻힌 것으로 추정됩니다.
살아남은 자의 증언은 지난 20년간 과 한베평화재단 등 시민사회의 ‘미안해요, 베트남’ 운동으로 한국 사회에 조금씩 알려졌습니다. 이제 그들은 직접 한국 정부를 움직이기로 했습니다. 진상 규명과 공식 사과, 피해 회복 조처를 요구했습니다. 그 시작이 청와대 청원입니다. 17개 마을에서 희생자 유가족과 피해자 103명이 청원서에 서명했습니다. 103개 청원서는 4월4일 이들 손으로 직접 청와대에 전달됩니다. 은 17개 마을에 살았던 17명의 청원서를 공개합니다. 그리고 103명의 얼굴을 모두 담았습니다. 청와대는 최대 150일 안에 청원인에게 대답을 줘야 합니다. 17개 마을에 살았던 17명의 청원서를 5개 기사로 각각 나눠 실었습니다.
불도저로 희생자 무덤을 밀다 꽝남성 디엔반시 디엔즈엉구 하미 마을(하미 학살)

응우옌꼬이(Nguyễn Cọi)

생년월일: 1945년 8월19일

피해 날짜: 1968년 2월24일(양력)

피해 내용: 하미학살유족회는 해마다 음력 1월24일이면 하미 마을 학살 희생자를 추모하는 집단 제사를 올립니다. 1968년 2월24일 그날, 저도 어머니 레티토아이(당시 46살), 남동생 응우옌반닷(6살), 큰어머니 팜티스(50살), 사촌동생인 응우옌반떰(8살)과 응우옌티씨(2살)를 잃었습니다. 여동생 응우옌티탄(11살)과 사촌동생 응우옌반딘(8살)은 한국군이 던진 수류탄에 크게 다쳤습니다. 그날 한국군은 우리 가족과 이웃을 우리 집 방공호에 몰아넣고 수류탄을 던져 학살했습니다.

23살이던 저는 그때 집에서 약 50m 떨어진 다른 방공호에 몸을 숨겨 살 수 있었습니다. 그날 저녁 방공호에서 나온 저는 여동생과 사촌동생을 병원으로 옮기고 가족의 주검을 수습해야 했습니다.

이후 한국군에 붙잡힌 저는 포로수용소에 수감됐다가 석방돼, 1975년 베트남전쟁이 끝난 뒤에야 마을로 돌아왔습니다. 한국군에게 가족과 친척을 잃은 정신적 고통이 너무도 컸습니다. 2000년 지역 인민위원회에서 유가족회 연락 반장으로 뽑혀 연락 반원 11명과 함께 하미 학살 사건을 조사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당시 한국군이 불도저 2대를 끌고 와 희생자들의 무덤을 파헤치고 주검들을 밀어버린 일을 가장 비인간적인 사건으로 기억합니다.

한국에 바라는 것: 마을 사람들은 희생자 135명과 어떻게든 이어져 있습니다. 가족이 1명 죽은 사람도 있고, 여러 명 죽은 사람도 있습니다. 가족이 다 몰살당해 향 하나 피워줄 사람이 없는 이들도 있습니다. 숨진 엄마의 배 위에서 빈 젖을 빨던 아기의 모습도 여전히 눈에 선합니다. 젊은 세대가 이 참혹한 죽음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이 죽음들을 기억해주길 바랍니다.

흰옷 입은 어머니가 문간에 있습니다 꽝남성 디엔반시 디엔안구 퐁니 마을(퐁니·퐁넛 학살)

레딘먼(Lê Đình Mận)

생년: 1968년

피해 날짜: 1968년 2월12일(양력)

피해 내용: 그날, 나는 어머니의 피를 뒤집어쓰고 있었습니다. 마을 우물가였습니다. 한국군에게 살해당한 희생자들의 주검을 확인하러 온 주민들이 숨진 어머니를 뒤집자 생후 3개월이던 내가 있었다고 합니다. 나를 끌어안고 총 맞은 어머니 덕분에 살아남은 것입니다. 상처 하나 없던 나는 죽은 어머니의 젖을 빨고 있었다고 합니다. 주변을 분간할 나이가 되자, 어머니 하티지엔(당시 34살), 할아버지 레딘중(64살), 고모 레티미아(31살)가 한국군에게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마을 사람 70여 명이 총칼에 희생됐다는 끔찍한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날 마침 마을 밖 남베트남군 초소에 있었던 아버지와 형, 두 누나는 화를 면했습니다. 하지만 4년 뒤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형제들과 전쟁고아로 참혹한 삶을 살았습니다. 50여 년이 지났습니다. 나는 천식을 앓고 있어 병원을 자주 들락거립니다. 학살의 그날 내가 탄약 가루를 너무 많이 마셔서일까요. 어머니의 빈 젖을 오랫동안 빨아서일까요.

우리 마을은 당시 민간인들이 살아서 무차별 사격을 자제하는 ‘안전마을’이었다는데, 겁먹은 어린이와 부녀자, 노인들뿐이라고 당시 참전한 한국 군인들도 증언했다는데(제306호 ‘양민학살, 중앙정보부에서 조사했다’ 참조) 왜 내게서 가족을 빼앗아간 거죠? 나는 어머니 얼굴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어린 시절 내내 흰옷을 입은 어머니가 문 옆에 우두커니 서서 나를 바라보는 꿈을 자주 꾸었습니다.

한국에 바라는 것: 봉사활동이든 무엇이든 한국 정부나 시민단체들이 피해자와 유가족의 고통과 아픔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고, 위로할 수 있는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해자가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보상하는 것이 전세계가 공유하는 평화의 순리라고 생각합니다.

7~8일 동안 주검 확인해 꽝남성 주이쑤옌현 주이탄사 반꾸엇 마을(반꾸엇 학살)

쯔엉티쑤옌 (Trường Thị Xuyến)

생년: 1926년

피해 날짜: 1968년 1월19일(양력)

피해 내용: 새벽부터 마을 멀리서 포격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제가 딸 응우옌티씨를 낳은 지 이틀도 채 안 된 날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41살이었습니다. 총격 소리는 점점 마을로 가까워졌습니다. 아침 8시께 한국군이 우리 집에 들이닥쳤습니다. 한국군은 가족과 이웃을 우리 집 마당에 모았습니다.

한국군에게 끌려나온 저는 핏덩이 딸을 품에 안고 몸을 잔뜩 웅크렸습니다. 병사들은 제 등과 머리를 함부로 때리고 내리쳤습니다. 이후 한국군이 총을 마구 쐈습니다. 총탄에 맞아 쓰러진 가족과 이웃이 저와 제 딸을 막아줘 저희는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남편 응우옌번(47살), 두 딸인 응우옌티니에우(14살)과 응우옌티못(4살), 아들 응우옌하이(1살)는 한국군에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희생자들의 주검을 수습하는 일은 7~8일 동안 이어졌습니다. 주검들이 부패해 얼굴을 알아보기 어려워지자 마을 사람들은 옷이나 소지품 등으로 가족을 찾아헤맸습니다.

한국군에게 남편과 자식 셋을 잃은 저는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남편 없이 홀로 자식 여섯을 키울 힘이 없었습니다. 한국군이 우리 집과 살림살이까지 불태워 아이들을 각각 친척 집에 맡겨야 했습니다. 가족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저는 한국군에게 등과 머리를 심하게 맞은 후유증으로 오랫동안 통증을 안고 살아야 했습니다. 1969년 두 아들이 유격대로 활동했다는 이유로 남베트남군에게 끌려가 조사받고 18개월간 감옥살이까지 했습니다. 이때 받은 고문 후유증으로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습니다. 1970년과 1971년 두 아들마저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비보를 들었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고통이었습니다. 1975년 베트남전쟁이 끝나고 나서야 남은 가족이 고향에 모여 함께 살 수 있었습니다.

한국에 바라는 것: 한국 사람들이 한국군 학살 피해 유가족을 도와주길 바랍니다.

종아리에 남은 수류탄 파편 꽝남성 주이쑤옌현 주이응이어사 선비엔 마을(한 할머니 방공호 학살)

응우옌응옥통(Nguyễn Ngọc Thông)

생년: 1946년(주민등록 기준), 실제 태어난 해는 1950년

피해 날짜: 1969년 8월25일(양력)

피해 내용: 1969년 이맘때 저는 이웃집 소를 돌보느라 마을을 떠나 있었습니다. 가족을 보러 집에 갔던 날, 한국군의 포격이 시작됐습니다. 어머니와 저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저는 한 할머니네 집 방공호로 몸을 숨겼습니다. 마을을 뒤지던 한국군이 방공호를 발견했습니다. 한국군은 방공호 안으로 총을 마구 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깊숙한 곳에 몸을 숨긴 덕분에 저는 총탄을 맞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곧이어 한국군이 방공호 안으로 던진 수류탄에 오른쪽 종아리와 머리를 크게 다쳤습니다. 방공호에 함께 있던 10여 명이 모두 목숨을 잃었습니다. 저만 홀로 살아남았습니다. 그때 저는 19살이었습니다.

병원에서 나온 뒤,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다낭에서 물지게꾼으로 일하며 힘들게 살았습니다. 오른쪽 다리 종아리에 수류탄 파편이 박혀 후유증이 심했습니다. 파편 제거 수술을 받은 뒤에도 날씨가 추워지면 종아리가 쑤셔 걷기가 힘들었습니다. 종아리 안쪽엔 아직도 수류탄 파편이 남아 있습니다. 지금도 통증을 느낍니다. 이후 오른쪽 눈이 점점 흐려졌습니다. 병원 검진을 받았더니 학살 때 머리에 입은 수류탄 파편상이 눈으로 이어지는 신경을 건드려 생긴 후유증이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오른쪽 시력을 완전히 잃었습니다.

한국에 바라는 것: 2017년 만든 주이응이어-주이하이-주이탄-빈즈엉 학살 통합 위령관에는 한 할머니 방공호 학살 희생자 28명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한때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대한 분노로 ‘베트콩’에 자원했습니다. 지금은 한국군이 단지 미군의 용병에 불과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정부가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에게 관심 갖고 전쟁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도록 적절한 조처를 해주길 바랍니다.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조윤영 기자 jyy@hani.co.kr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한베평화재단, 후원계좌 KB국민은행 878901-00-009326, 문의 02-2295-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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