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록한 삶
인간은 똑같고 역사는 반복되는가? 이 2018년 표지에서 다룬 인간은 ‘같은 길’을 가면서도 서로 ‘다른 삶’의 기록을 남겼다. 김이수 전 헌법재판소 재판관과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그랬고, 고 노회찬 의원과 기성 정치인들이 그랬다.
김이수 전 헌법재판관은 새해부터 ‘두 집 살림’을 한다. 전남대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 자격으로 봄학기부터 강의를 하게 됐기 때문이다. 경기도 일산이 집인 그는 주중에 2박3일은 광주에 머물러야 한다. 강의 준비를 위해 최근 광주를 찾은 김 전 재판관은 자신을 알아보는 시민들이 “의외로 많아 깜짝 놀랐다”고 한다. 음식점이나 길거리에서 눈이 마주친 시민들은 따뜻한 눈인사를 건넸다. 인사말을 건네는 시민들 중에는 그가 야당의 몽니로 문재인 정부의 첫 헌법재판소장에 임명되지 못한 것을 위로하는 이들도 있었다.
김 전 재판관이 ‘깜짝 놀랄 만한’ 대접을 받은 곳은 광주뿐만이 아니다. 그는 12월11일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에서 요청한 특강을 하는 자리에서 “가늘지만 강렬한 빛을 발한 지성과 양심”(나윤경 원장)으로 소개됐다. 그가 헌재에서 낸 소수의견에 대해 “미완의 민주주의를 보다 성숙된 단계로 변화시켜낼 수 있다는 희망을 줬다”는 찬사가 이어졌다. 청중 100여 명은 뜨거운 박수로 그를 맞이했다.
‘사법 농단’ 파동 속 빛난 퇴임‘사법 농단’ 사태로 전례없는 위기를 맞은 2018년 사법부에서 김 전 재판관은 홀로 빛났다. 민주주의와 소수자 인권에 대한 그의 확고한 소신은 권력과 다수의 횡포에 지친 시민들에게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됐다. 지난 6월28일 양심적 병역거부 처벌 위헌 결정과, 8월30일 ‘양승태 대법원’의 과거사 역주행 판결을 바로잡은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그의 소신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양심적 병역거부 처벌은 양심의 자유와 소수자 인권을 인정하지 않는 국가권력의 대표적인 횡포였다. 김 전 재판관은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 해결에 소극적인 동료 재판관들을 설득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이끌어냈다. 6년의 임기 내내 소신을 포기하지 않은 집념으로 과거 소수의견에 그쳤던 법리를 다수의견으로 만들어냈다.
양승태 대법원의 과거사 역주행 판결은 사법 농단의 산물이었다. 2015년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정부 보상금을 받은 민주화운동 관련자는 재심에서 무죄판결이 나더라도 국가에 위자료를 청구할 수 없다’고 한 판결과, 2013년 대법원1부가 과거사 사건의 국가배상청구권 소멸시효를 6개월로 제한한 판결은 모두 정치권력과의 ‘교감’에서 나왔다. 김 전 재판관을 비롯한 헌법재판관 6명은 이 판결들이 모두 헌법에 어긋난다는 취지의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과거사 역주행 판결의 하이라이트인 긴급조치 관련 판결은 바로잡지 못했다. 긴급조치를 “고도의 정치성을 띤 국가 행위”로 미화해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를 원천 봉쇄한 대법원 판결(2015년 3월)에 대해 재판관 7명은 재판소원(법원 판결을 헌법소원심판 청구 대상에 포함시키는 것)을 금지한 헌법재판소법을 이유로 위헌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김 전 재판관은 안창호 재판관과 함께 소수의견을 냈다. 긴급조치는 위헌 결정이 내려진 악법이기 때문에 국가에 배상 책임이 있다는 취지였다.
양심적 병역거부와 과거사 결정은 김 전 재판관이 “40년 가까운 법관 생활에서 가장 아프게 기억될” 마음의 상처를 극복하고 내놓은 것이다. 그는 앞서 2017년 5월 문재인 정부의 첫 헌재소장에 지명됐으나 국회의 임명 동의를 받지 못했다. 자유한국당을 비롯한 야 3당이 반대한 탓이다. 통합진보당 해산 심판 사건에서 혼자서 통진당 해산을 반대한 그를 보수 정당들은 헌재소장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최고법원의 수장을 한낱 정치적 흥정 대상으로 취급하는 행태에 큰 상처를 입었지만, 그는 마음을 추스르고 퇴임 직전까지 재판에 전념했다.
그는 헌재에 들어오기 전까지 일선 법원에서 재판에 전념한 ‘무명’의 법관이었다. 소장 판사 때부터 법원행정처를 오가며 ‘관료 판사’로 성장한 사법 농단 주역들과는 삶의 궤적이 달랐다. 또 노무현 정부 시절 대법원에서 진보적 소수의견을 많이 냈던 ‘독수리 5형제’(이홍훈·전수안·김영란·박시환·김지형 전 대법관)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것과도 대비된다.
“재판 독립 원칙” 무색게 한 사법부 위기 주범이런 김 전 재판관이 마냥 부러운 이들이 있다. 바로 사법 농단에 연루된 전·현직 판사들이다. 그 가운데서도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처지는 퇴임 전후 극적으로 갈렸다. 역대 가장 막강한 권한을 행사했던 ‘제왕적 대법원장’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히는 그는 지금 사법부를 최악의 위기로 몰아넣은 장본인이 될 위기에 처했다.
“재판을 무슨 흥정거리로 삼아 방향을 왜곡하고 거래하는 일은 꿈도 꿀 수 없는, 정말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고, 결단코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그는 2018년 6월1일 자택 부근 한 공원에 기자들을 불러놓고 이렇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울분에 차 있었다. 42년 동안 엘리트 법관으로 살아온 삶이 한순간에 부정당하는 상황을 참기 어려운 듯했다. 그로부터 6개월여가 지난 지금 그는 검찰 수사를 코앞에 두고 있다. ‘사법 농단’을 수사하는 검찰은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장(구속)의 공소장에 양 전 대법원장을 핵심 피의자로 표현했다. 법원행정처 간부들이 저지른 사법 농단에 최종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게 검찰의 판단이다.
양 전 대법원장에게는 검찰보다 더 부담스러운 존재가 있다. 바로 후배 법관들이다. 그의 대법원장 재임 기간 중 법원행정처에 근무했던 법관들은 대부분 검찰에 불려나가 조사를 받았다. 이들은 수사 협조 여부에 따라 참고인과 피의자로 신분이 갈렸다. 이들의 잘못이라면 대법원장의 ‘사법관(觀)’을 법원행정에 반영하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한 것밖에 없다. 상고법원 도입을 위해 법원행정처 고위 간부의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을 뿐이다. 그럼에도 검찰청사 앞 포토라인에 서서 한 차례 ‘여론 재판’을 받은 데 이어 정식 재판을 받을 처지가 됐다. 이들 사이에서 양 전 대법원장을 원망하는 목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다.
양 전 대법원장이 2014년 1월13일 가인 김병로(초대 대법원장) 선생 50주기 추념식에서 한 말도 뒤늦게 입길에 올랐다. “오늘날 우리가 당연한 것처럼 여기는 재판 독립의 원칙은, 원칙과 대의를 저버리지 않고 사법부 독립을 지켜내기 위해 일신의 안일을 내던지신 선생의 결연한 의지와 곧은 기개가 없었다면 결코 이룰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 추념사를 낭독한 지 5개월이 지난 그해 6월부터 ‘상고법원 프로젝트’를 밀어붙였다. “사법부가 행정부와 협의해서 법을 운용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가르친 대선배를 기렸던 그가 불과 몇 달 뒤 법원행정처 간부들을 통해 박근혜 정권이 민감하게 여기는 몇몇 사건의 재판에 개입하려고 시도한 것이다. 이 추념사를 기억하는 판사들은 평소 사심 없이 일하는 태도를 강조했던 ‘대법원장 말씀’이 과연 진정성이 있었는지 의심하고 있다.
양 전 대법원장은 권위주의 시대 사법관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권위주의 시대에는 개인의 인권보다 국가 안보와 질서, 공권력을 중시했다. 국가를 위해서라면 개인은 언제든 희생될 수 있는 소모품에 불과했다. 당시 엘리트 법관들이 국가권력의 횡포에 눈감은 판결을 쏟아낸 것은 이런 사법관이 법원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사법 농단을 단죄하는 것은 권위주의 시대 사법관의 청산을 의미한다.
법원행정처 유지하는 꼼수 개혁안하지만 청산이 제대로 이뤄질지는 불확실하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최근 ‘제왕적 대법원장’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는 법원행정처 개혁안을 발표해 여론의 지탄을 받았다. 사법 관료화를 낳은 대법원장의 인사권 등은 그대로 두고 법원행정처를 대체할 사법행정회의의 위상을 당초 안보다 크게 낮추는 내용이다. 이는 사법 농단을 불러온 시스템은 그대로 둔 채 사법 농단에 연루된 판사들만 징계하는 인적 청산만 허용하겠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다. 법원행정처 근무 경험이 있는 한 변호사는 “인적 청산은 검찰 수사로 자연스럽게 이뤄지기 때문에 김명수 대법원장이 해야 할 일은 시스템을 바꾸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개혁안을 보면 사법부의 셀프 개혁은 물 건너간 것 같다”고 말했다.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전화신청▶ 1566-9595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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