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 좋게도 대학을 다니던 2004년, 금강산에 다녀올 기회가 있었다. 나에게 금강산은 어린 시절 친구들과 고무줄놀이를 하며 부르던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이천 봉’이 전부였다. 금강산뿐 아니라 북한은 갈 수 없는 위험한 어딘가였고, 세습으로 권력을 획득한 독재자의 나라였으며, 아이들은 굶어 죽는 곳이었다. 북한에 대한 이미지는 헐벗은 산과 헐벗은 사람들이 사는 황량함 그 자체였다. 황량함을 채울 정보는 한없이 부족했고, 한민족이라는 구호 하나로 메우기에는 빈약했다.
막상 가본 금강산은 그야말로 압도적인 풍광과 아름다움을 보여줬다. 옥빛 폭포와 울창하고 상쾌한 숲, 재미나게 이야기하던 북쪽 안내원들까지 하나하나 놓칠 수 없는 광경이었다. 허리가 꼬부라진 할머니들도 다시 올 수 없는 기회를 놓칠까 얼마나 열심히 오르시던지, 20대 초반인 내가 헉헉거리며 산을 오르는 게 민망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평화는 대추리에서 멈추었다</font></font>헐벗은 북한에 대한 이미지는 풍요롭고 압도적인 자연의 모습으로 다시 그려졌다. 생각해보면 고등학생 때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악수하던 모습을 학교에서 텔레비전으로 본 순간부터 역사적 사건이 곧 터질지도 모른다는 은근한 기대가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금강산을 다녀오며 ‘이렇게 만나다가 통일이 되는 건가?’ 생각하기도 했다.
순진한 기대는 곧 무너졌다. 한국 정부가 국민의 토지를 빼앗아 주한미군 기지를 확장했던 ‘평택 대추리’를 만나면서였다. 대추리 주민들은 손에 지문이 닳도록 갯벌을 간척해 만든 너른 들판을 ‘국가 안보’라는 이름 아래 허망하게 빼앗겼다. 금강산을 다녀오며 품었던 평화에 대한 한가한 심상은 2006년 어린이날을 하루 앞두고 포클레인에 무너져내리던 대추초등학교만큼이나 빠르게 사라졌다.
그 후 줄곧 평화는 쉽게 오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국가는 안보를 지킨다며 평화를 지킨다며 사람들을 고향에서 내쫓고 자연을 파괴했다. 힘이 없으면 평화를 지킬 수 없다고, 북한이 존재하는 한 우리도 무장을 해야 한다던 안보 협박에 분단 사회를 살아가던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자신들의 온 삶을 바친 땅을 빼앗겼다. 평택 대추리에서 그리고 제주 강정에서, 경북 성주에서 비극은 여전히 반복된다. 정말 평화는 군사력에 의해서만 지킬 수 있는 것일까 질문하다 이곳 강정까지 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한반도 최남단 서귀포 강정마을의 해군기지 건설은 비민주적인 의사 결정으로 주민들의 의견을 무시한 채 폭력적으로 강행된 국가 안보 사업이다. 4천 일 넘게 싸우며 700여 명이 연행되고 600여 명이 재판받고 벌금으로 수억원을 내야만 했다. 삶의 결정권을 빼앗긴 사람들이 최후 수단인 법의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철저히 고립되었던 모든 시간은 이렇게 한 줄 숫자로 정리되어 이야기되곤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여전히 해군기지 반대 투쟁을 이어가는 마을 주민과 평화활동가들에게 말한다. “다 끝났는데, 왜 아직도 이러느냐”고. 그런데 오히려 해군기지가 지어진 지금이야말로 우려했던 문제가 현실화되고 있어 끝낼 수가 없다.
2017년 한 해 동안 미국의 핵잠수함을 포함해 10여 척의 외국 군함이 들어왔다. 미국 핵잠수함이 들어온 때는 지난해 11월22일. 당장 전쟁이 날 것 같은 분위기 속에 제주 해군기지에는 보란 듯 핵잠수함이 입항했다. 강정에 사는 나는 두려웠다. 군사적 긴장이 높아지는 것이 삶의 직접적 위협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핵잠수함 입항으로 알게 됐기 때문이다.
해군은 이에 그치지 않고 10년에 한 번, 전세계의 군함이 모이는 국제 관함식이라는 행사를 올해 10월 제주 강정에서 진행하려고 한다. 미국의 핵항공모함을 비롯해 30여 척의 군함이 오는 이 행사에 마을회는 반대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대규모 군함이 모이는 행사는 어장을 파괴할 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제주를 ‘군사기지의 섬’으로 낙인찍을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2017년 외국 군함들 줄줄이 강정 입항 </font></font>이런 우려 속에 지난 2월 평창겨울올림픽에 북한이 참여하면서 하루를 예측하기 힘든 대화 국면이 펼쳐졌다. 그리고 평화의 문이 열리자 올해는 단 한 척의 외국 군함도 제주에 입항하지 않았다. 평화의 시대에 역행하는 국제 관함식 취소 소식은 아직 없지만 변화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음은 분명하다.
역사적 대화, 역사적 점심, 역사적 산책, 역사적 악수. 뭘 먹고 뭘 마시고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작은 것 하나하나에 마음을 졸이고 바라보게 된다. 제발 힘들게 온 평화의 여정을 되돌리지 말자는 간절한 바람이다.
남과 북의 1·2차 정상회담에 이어 싱가포르에서 북한과 미국이 한자리에 서서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 의지를 재차 확인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두 사람이 한자리에 서 있는 것을 보며 불과 10개월 전 전쟁도 불사하겠다던 말에 분노가 차올랐던 일은 상상도 되지 않는다. 직접 만나 악수까지 하고 전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를 약속했으니 이제 그 약속이 충실히 이어지길 바라고 또 바라게 된다.
힘들게 만들어진 이 평화의 길은 다시 과거로 되돌아갈 수 없는 새로운 길이다. 더 이상 제주가, 그리고 한반도가 군사적으로 이용되지 않고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북한과 더불어 남한에서도 비핵화를 비롯한 평화체제와 군축 논의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모두가 알고 있듯 남북관계의 평화적 전환은 중국과 러시아, 미국과 일본 사이에서 우리 스스로 대화를 주도하며 얻어온 것이다. 군사력 경쟁이나 전쟁이라는 수단이 아닌 만남과 신뢰, 대화와 협력으로 가능했다. 그리고 평화를 향한 변화의 국면은 아시아의 평화 체제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남과 북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군사적 긴장과 반목이 흐르는 아시아가 될 것인가, 새로운 평화지대가 만들어질 것인가 하는 역사적 순간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우리 안의 분단은 어쩔 것인가</font></font>각국 정부의 노력과 시민들의 열망으로 평화체제가 선언된다고 우리 안의 삼팔선이 사라지게 될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강정에서 해군기지에 반대해 싸우면서 느꼈던 사회의 강고한 분단의 벽은 생각보다 높았다. 군사력에 의한 안보가 아닌 평화적 수단에 의한 평화를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무관심하고 냉정한 얼굴로 외면했다. 힘이 없는 평화로 안전을 지킬 수 없다는 오래된 생각은 해군기지를 밀어붙이게 했던 힘이기도 하다.
군사력에 의지한 평화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변화하지 않는 한 분단체제는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힘을 가질 수밖에 없다. 다행스럽게도 자유한국당처럼 분단을 이용한 공포와 협박으로 연명해오던 정치세력은 이번 지방선거로 몰락하고 있음이 여실히 드러났다. 이로써 촛불혁명과 남·북·미 대화를 통해 평화체제로 가는 발걸음을 함께 만들고 목격해온 시민들은 이제 더 이상 과거로 회기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임을 알 수 있다.
강정에서 얻은 귀한 배움 중 하나는 다양한 사람들의 연대가 이곳 활동을 더욱 풍성하게 하고 지속가능하게 만들어왔다는 점이다. 남과 북으로 나뉘어 우리 편 아니면 적으로 생각했던 경직된 분단의 그물을 거두고, 다양함과 차이가 주는 건강한 긴장을 대화와 협력의 힘으로 길러가는 사회적 배움이 활성화되길 기대한다. 서로의 인권과 자기결정권이 존중되고, 자연 착취와 무분별한 개발이 아닌 지속가능한 삶을 그려가는 상상력 속에서 평화를 만들어가자. 그리고 그 과정에서 시민들 스스로 분단 질서를 해체해 평화의 힘을 가질 때, 대통령이 바뀐다고 주변국의 상황이 바뀐다고 휘청대지 않고, 어렵게 찾아온 평화의 시간을 담담히 지킬 수 있을 것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구럼비가 제 모습 되찾는 날 </font></font>이미 우리 사회는 평화로 오는 이날까지 너무나 많은 희생과 아픔이 있었다. 남과 북, 미국의 정상들은 대화와 협력만이 우리의 안전을 지키는 길임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 모습은 평화는 평화로 지켜야 한다는 강정에서의 11년 외침이 결코 허황된 꿈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다. 강정에서는 날마다 ‘언젠가는 우리들이 잡고 있는 손의 힘으로 뻔뻔하게 울리는 군가를 잡는 노래의 힘으로 이곳에서 죽어가는 생명들이 살아나고 저 바다와 구럼비가 본래 있던 그 모습을 되찾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을 기대한다.
불가능하게 보였던 평화체제가 활짝 열리는 요즘, 우리가 날마다 기도하는 이 일도 꿈이 아니라 언젠가 현실로 바짝 다가올 것이라 믿지 않을 도리가 없다. 결코 되돌아가지 않을 분단의 길을 지나, 평화는 평화로 지킬 수 있다는 소망을 품고 하루하루 충실하게 살아내는 것. 그것이 여전히 평화를 노래하는 강정의 사람들이 해온 최선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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