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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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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나를 잇는 ‘50만원’의 실험

‘쉼표 프로젝트’ 4명에게 6개월간 기본소득 월 50만원 지급 실험 결과…

여유 생긴 참가자들, 가족·친구 등 주변 보듬기 시작
등록 2018-05-15 17:12 수정 2020-05-03 04:28
기본소득전북네트워크가 2017년 6월 전북 전주시 완산구 전주객사에서 기본소득 실험 ‘쉼표 프로젝트’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기본소득전북네트워크 제공

기본소득전북네트워크가 2017년 6월 전북 전주시 완산구 전주객사에서 기본소득 실험 ‘쉼표 프로젝트’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기본소득전북네트워크 제공

“친구들과 1박2일 나들이 26만원 + 후배와 외식 10만원 + 성당 동생과 식사 3만원 + 친구와 식사 3만원 + 어머니와 외식 3만원 + 선후배와 식사 5만원 = 50만원”

기본소득전북네트워크(이하 전북네트워크)로부터 기본소득 50만원을 처음 받은 지난해 10월, 박진규(33·가명·전주)씨가 기입한 사용 내용이다. 둘째 달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친구와 영화관람·저녁식사 2만8천원 + 동기 모임 4만2천원 + 여수 가족여행 20만원 + 친구들과 저녁 식사 2만원 + 친구 결혼식 참석 10만원 = 총 40만원(10만원 남음)” 셋째, 넷째, 다섯째 달에도 진규씨의 사용 내용은 대동소이했다. 진규씨는 기본소득을 받은 6개월 가운데 5개월치 사용 내용을 제출했는데, 그의 ‘기록’이 가리키는 기본소득의 의미는 분명했다. 진규씨와 가족을, 친구를 이어주는 ‘징검다리’였다.

당신에게 매월 50만원이 생긴다면

지난해 5월 전북네트워크가 전북 도민 4명에게 순차적으로 6개월간 다달이 기본소득 50만원을 주는 ‘쉼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지난해 5~9월 온·오프라인에서 814명이 지원했고, 8~9월 네 차례 공개 추첨으로 실험 참가자를 뽑았다. 지난해 8월 말 1차 지급대상자에게 첫 기본소득을 주었고, 지난 3월 4차 지급대상자에게 마지막 기본소득이 입금됐다.

‘당신에게 매월 50만원이 생긴다면 무얼 하시겠습니까?’라는 질문으로 시작한 실험은 이제 끝났다. 2016년 기준 한국 중위소득(1인 기준)의 30%, 1인 가구 최저생계비(49만5천원)에 해당하는 돈이 개인들의 삶에 가져온 변화는 무엇이었을까? 과도한 업무에 지친 이들에게, 취업준비생들의 불안한 마음에, 안전망 없이 위험한 환경에 노출된 이들에게 ‘쉼표’를 찍어주려던 기본소득의 취지는 이뤄졌을까? 저마다 다른 환경에 놓인 네 사람의 실험 결과에서 주목할 만한 공통분모가 보였다. ‘가욋돈’으로 생긴 기본소득은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늘 팍팍하기 마련인 보통 사람들의 삶에 ‘여유’를 선물했다. 여유를 회복한 참가자들은 혼자만의 성을 쌓는 대신 다른 사람에게로, 세상을 향해 건너가는 징검다리를 놓았다.

“여유가 생기니 ‘아 뭐, 그러면 내가 너한테 맞춰볼게’ 이런 멘트가 쉽게 나오더라는….”

진규씨가 말한 ‘내가 너한테 맞춰볼게’는 “내가 네 여비까지 내줄게”의 다른 표현이었다. 진규씨는 기본소득을 받은 첫 달, 단짝 친구 5명과 1박2일로 ‘여수 밤바다’에 다녀왔다. 남자만 6명, 밤바다 풍경은 술고래가 집어삼켰다. 굳이 전남 여수까지 가서, 허탈한 반전이지만 “그래도 기억엔 남는다”며 웃었다.

3년 만에 고교 동창 6명의 여행이 성사된 것은 진규씨의 기본소득 덕분이다. 고교 졸업 뒤 “친구들끼리 서로 월급날도 다르고 돈 들어가는 것도 달라서” 자고 오는 여행은 엄두를 내기 어려웠다. “직장 다니는 사람들 다 똑같잖아요. 보험료랑 차량 유지비 들어가고, 적금 얼마 붓고, 부모님 용돈 드리고, 생활비 쓰고, 언제 경조사가 생길지 몰라 남은 돈 뭉쳐놓다보면….”

고마운 사람에게 먼저 손 내밀고

이번에도 그랬다. 6명이 맞춰놓은 여행 날짜, 갑자기 친구 하나가 못 가겠다고 알려왔다. 친구에게 시간을 맞추려니 숙박시설을 새로 잡아야 하고, 경비가 뛰었다. 오랜만의 여행이 또 틀어질 참이었다. 그때 진규씨가 “잠깐”을 외친 것은 월 50만원 ‘여윳돈’의 힘이었다. “내가 더 낼라니까, 점마 데리고 가자.” 진규씨의 한마디에 산통 깨질 분위기였던 여행은 이구동성 “그래, 그럼 가자~”로 바뀌었다.

진규씨는 한국전력 협력업체인 전기회사에 다니며 세후 210만원을 받는다. 자기 소유의 집도 있다. 사는 데 당장 큰 어려움은 없다. 6개월간 기본소득을 받은 뒤 인터뷰에서 “건강·수입·주거환경은 그렇게 큰 차이가 없었다”고 한 이유다. 그런 진규씨도 “이거는 맞는 것 같아요, 사회적인 친분관계”라고 말했다. “다시 좀더 친하게… 얼굴 한 번 더 보고, 한 번 더 얘기하고 그런 게 좀 있죠.” 진규씨는 “내가 보고 싶었던 사람들과 추억을 만들고, 끊어졌던 인연을 다시 살릴 수 있어서 아주 좋았던 것 같다”고 떠올렸다.

기본소득은 그리운 사람을 이어주기도 했지만, 고마운 사람에게 먼저 손 내밀게도 만들었다. 김정화(45·가명·익산)씨의 경우, 정화씨네 식구와 함께 여행을 다니겠다며 승합차까지 산 친구가 있었다. 몇 해 전 시각장애 5급 판정을 받아 운전을 못하는 정화씨 남편을 배려한 선의였다.

정화씨는 기본소득을 받고서 넓은 펜션을 빌려 친구 가족과 함께 충남 태안을 다녀왔다. 가끔 회사에서 빌려주는 법인용 콘도 외에 숙박시설을 돈 주고 예약해본 적이 없는 정화씨였다. 공짜 숙박권이 없으면 ‘굳이 자고 와야 할까?’ 싶은 생각이 앞섰다. 여행은 당일치기가 제맛 같았지만, 기본소득을 받고 나니 생각이 달라졌다. 남편은 “펜션 빌릴 거야?”라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이들은 “오, 펜션! 엄마, 펜션!” 호들갑을 떨었다. 정화씨는 “기본소득이 아니었으면 안 갔을 것”이라고 했다.

정화씨가 쓴 시간·지출 내용에서도 그의 “넓어진 마음”이 확인된다. 정화씨가 처음 기본소득을 받은 달의 첫날 사용 내용은 ‘친정 가족들과 저녁식사 11만원’이었고, 두 번째는 ‘친구들과 저녁식사 8만원’이었다. 정화씨는 가족·친구와 보내는 시간도, 쓰는 돈도 늘었다. 그는 늘 친정에서 채소를 가져다 먹는다. 이번에 친정어머니가 평소 갖고 싶다던 비싼 ‘다×× 청소기’를 3개월 할부로 사드렸다. 친구들과 만날 때도 “비싼 건 친구가 사고, 싼 건 내가 사는 거”였는데, 친구들마다 돌아가며 한 번씩 밥을 샀다. “네가 웬일이냐~.” 모두가 정화씨의 기본소득을 반겼다.

취업준비생, 이음동의어로 ‘백수’였던 김유지(26·가명·익산)씨는 첫달 기본소득을 가족여행에 몽땅 털어넣었다. 매주 남편과 함께 외식 신세를 졌던 친정 식구들과 제주 여행을 갔다. 큰맘 먹고 갈치조림(14만1천원)과 갈치구이(13만8천원) 등을 대접했다. 둘째 달부터는 지인 축의금과 외식에 돈이 뭉텅뭉텅 빠져나간 기록이 많았다. 기본소득의 상당 부분이 ‘인간관계 비용’에 쓰인 셈이다.

유지씨는 기본소득을 받은 뒤 친구를 불러내는 일이 잦아졌다. 기본소득을 받기 전엔 으레 “나 백수니까, 네가 사”라고 선수를 쳤다. 친구가 “그래, 나와” 하면 만났지만, 친구를 만나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돈 때문은 아닌데 귀찮기도 하고~ 그냥 카톡으로 연락만 하면 되는데 굳이 만나야 하나” 싶어서라곤 했으나, 기본소득을 받은 뒤 마음이 바뀌었다. “이제는 돈이 생겼으니까 ‘나 돈 받는다’고 빨리 나오라고~ 그러면 또 친구들이 잘 나오니까~ 놀았죠.” 유지씨는 “뭔가 여유가 생긴 것” 같았고, “전에는 친구를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이었는데 “자금을 들고 만나면서 좀 자랑”하게 됐고, “나 이거 받는데 나와봐, 이거 좀 써보자~”라고 먼저 말 걸게 됐다고 털어놨다.

사실 직장 다니는 친구들도 “방값 빼고, 교통비 빼고, 놀 거 빼고 하면 (지갑이) 탈탈 털리는” 20대의 삶인 것은 마찬가지다. 유지씨는 “다 같이 기본소득을 받는다면~ 만약 그 친구도 받고 있다고 하면~ 자주 만나 ‘야, 너 쏴’ ‘이번엔 내가 쏜다’고 더 많이, 여유롭게, 편한 마음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1, 2, 3차 다 쐈어요”

김동환(19·가명·전주)씨는 5월8일 전주에서 과 인터뷰를 하며 ‘첫달 첫 기본소득을 어디에 썼느냐’는 질문에 머뭇거렸다. “진짜 얘기해도 돼요?” 있는 그대로 말해달라고 하자 “1, 2, 3차 쐈어요”라며 키득키득 웃었다.

동환씨는 중학생 때부터 ‘숙식 제공’ 식당에서 아르바이트하며 학교를 다녔다. 놀거나 공부하는 시간보다 일하는 시간이 많았고, 그러면서도 늘 쪼들렸던 열아홉 동환씨의 말에선 흥분마저 묻어났다. “막 친구들 만나고 그런 게 좀 많았죠.” “헤헤, 남자들끼리 어딜 놀러 가요. 그냥 사람 구경하고….” “(친구들 만나는 시간) 되게 많았죠, 볼링도 치고!” 동환씨의 기본소득 사용 내용을 들여다봐도 ‘월세’를 제외하곤 대부분 ‘휴대전화 사용료’ ‘술’ ‘클럽’ ‘노래방’ ‘빌린 돈 갚음’ ‘볼링’ 등 친구들과 시간을 보낸 흔적이 역력했다. 동환씨는 지난 6개월간 본인의 인생에 매우 만족했다. “뭔가 (기본소득) 받고 나서 주변에서 ‘다 잘사네’ 이런 말을 많이 들어가지고, 헤헤 뭔가 아주 좋았다”고 한다.

군산·익산·전주=전정윤 기자 ggum@hani.co.kr
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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