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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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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억은요, 조금도 사그라들지 않아요”

1969년 11월12일 한국군이 민간인 학살하는 현장서 가족 19명 희생 목격한 레탄응이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 형수, 큰어머니, 작은어머니, 사촌 여동생, 임신부 고모 그리고 13명 아이들… ‘언젠간 이 빚을 꼭 갚아주겠어’
등록 2018-01-19 00:19 수정 2020-05-03 04:28
베트남 꽝남성 탕빈현 빈즈엉사 집 거실에 앉아 있는 ‘1968 꽝남대학살’ 유가족 레탄응이. 2018년 1월1일.

베트남 꽝남성 탕빈현 빈즈엉사 집 거실에 앉아 있는 ‘1968 꽝남대학살’ 유가족 레탄응이. 2018년 1월1일.

베트남 중부 다낭 국제공항에서 약 40km 남쪽, 꽝남성(도) 탕빈현(군) 빈즈엉사(읍·면)로 접어들자 눈이 부셨다. 마을 빈터마다 하얀 모래땅이었다. 드문드문 서 있는 나무 주위 잡초들은 키가 작았다. 누런 소 한두 마리가 풀을 찾아 서성거렸다.

일가족 19명 학살의 충격

2018년 1월1일 오후 2시, 밤색 중절모를 쓴 노인을 따라 빈즈엉사 1촌 3마을에 있는 야산에 올랐다. 키 160cm 남짓 되는 69살 노인은 꼿꼿한 자세로 빠르게 걸었다. “바로 저기예요. 한번 가볼래요?” 거짓말이 아니란 걸 증명하고 싶다는 듯 그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가 언덕에 오르자마자 손가락으로 약 500m 거리에 있는 평지를 가리켰다.

1969년 11월12일, 한국군이 마을 민간인 73명을 죽인 ‘짱쩜(빈즈엉사 1촌 3마을) 학살’이 벌어진 곳이었다. 언덕은 그가 그날의 비극을 처음부터 끝까지 목격한 곳이었다. “그 기억은요, 조금도 사그라들거나 지워지지 않아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너무 갑작스럽고 끔찍하게 죽었잖아요. 세월이 흘러 아프고 늙어서 한 사람씩 죽은 게 아니잖아요.” 그의 이름은 레탄응이(69·이하 응이). 응이는 그날 가족 19명이 학살당하는 장면을 멀리서 지켜봤다.

전날 밤 마을엔 포격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한국군이 ‘베트콩’(VC·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대대를 겨냥해 쏜 포였다. 마을 근처 베트콩 대대가 있었다. 그때 20살 청년 응이는, 베트콩 마을 유격대장(면 단위)이었다. 면 단위 직속 유격대원만 60명이었다. 그는 “베트콩 대대가 포격을 피하려고 참호를 파다가 포격이 너무 심해지자 결국 급히 철수했다”고 말했다.

다음날, 1969년 11월12일 아침 포격 소리가 그쳤다. 곧이어 헬기에서 내린 한국군 300~400명이 짱쩜 마을에 진입했다. 한국군이 마을로 들어온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한국군은 밤새 포격 소리에 놀라 대피한 주민 74명을 방공호 밖으로 나오게 했다. 그들을 총으로 위협하며 짱쩜 마을에 있는 논 쪽으로 데려갔다. 논은 홍수로 어른 가슴 높이까지 물이 차 있었다. 한국군이 빗물이 덜 쌓인 좁은 빈터 모래땅에 주민 74명을 세웠다. 주민들을 향해 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졌다. “그날 마을 사람들이 서 있는 땅이 매우 좁았어요. 주민들이 총에 맞고 쓰러져 두세 겹으로 쌓였죠.” 응이가 그날의 끔찍한 기억을 다시 떠올렸다.

유일한 생존자 ‘생후 11일’ 아기

“그날 언덕에선 모래땅에 모인 사람들 얼굴을 알아볼 순 없었어요. 그래도 그 안에 내 가족이 있을 거란 건 알았죠.” 그의 눈이 점점 슬퍼졌다. “나와 유격대원들은 바로 한국군에게 총을 쏘고 싶었습니다. 정말 복수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그 모습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죠.” 베트콩 마을유격대는 적군 주력부대가 작전을 수행할 때 절대 공격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었다. 적의 잔인성을 자극할 뿐 무조건 지는 싸움이기 때문이다. 응이는 언덕 위에서 원한과 분노를 끝없이 삼키며 혼잣말만 되뇌었다. ‘언젠간 복수할 거야. 이 빚을 꼭 갚아주겠어.’ 응이는 훗날 ‘따이한(한국군을 지칭) 박멸 용사’라는 국가 공식 칭호를 얻었다. 그의 집 진열장 위엔 먼지가 수북이 쌓인 액자 하나가 있다. ‘1969~70년 부비트랩을 설치해 한국군 4명과 남베트남군 7명을 죽인 공로’를 인증하는 문서다. 1971년 1월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113부대가 수여했다. 그도 전투 중 13차례 다쳤다. 1970년 전투에선 총을 겨누고 있다가 날아온 수류탄 파편에 왼손 검지와 중지가 날아갔다. 그의 폐엔 아직 총알이 박혀 있다. 응이는 “그들이 가는 길과 내가 가는 길이 달랐을 뿐, 전쟁이란 그런 것이다. 내가 안 죽이면 그들이 나를 죽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다시 1969년 11월12일. 그날 아침 한국군의 총과 수류탄에 뒤엉켜 쓰러진 빈즈엉사 마을 주민들은 밤에야 수습됐다. 한국군의 감시를 피할 수 있는 밤에 응이와 유격대원들은 주검들을 수습하러 언덕을 내려갔다. 현장엔 핏물이 빗물에 섞여 하얀 모래땅 위로 발목까지 차올랐다. “현장에서 애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주검들을 하나둘 들어내자 갓난아기 하나가 살아남아 피투성이가 된 엄마 배 밑에서 젖을 빨고 있었어요.” 갓난아기는 나중에 당시 생후 11일째였단 사실이 밝혀졌다. 유일한 ‘짱쩜 학살’ 생존자였다. 올해 49살이 됐을 그 ‘아기’는 베트남 서부고원지대로 이주해, 마을 사람들과는 연락이 끊겼다.

응이는 그 자리에서 가족들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른들은 모두 여성이었다. 어머니(향년 47살), 형수, 큰어머니, 작은어머니, 사촌 여동생, 임신 중이던 고모. 나머지는 모두 아이들이었다. 큰여동생(향년 13살), 작은여동생(향년 10살), 막내여동생(향년 8살), 형수의 아이 2명, 작은어머니의 아이 3명, 사촌여동생의 아이 3명, 고모의 아이 1명. 고모의 태아 1명. 응이의 아버지는 한국군이 들어오는 날 베트콩으로 의심받을까봐 남동생을 데리고 도망쳐 화를 면했다.

18개 가족 무덤 중 9개만 찾아

응이는 가족 18구의 주검(고모의 태아 제외)을 옮겨 각각 무덤을 만들었다. 그날 8구를, 다음날 10구를 옮겼다. 셋째 날 가족들이 수습해가지 않은 주검들은 옮기기 힘들 정도로 많이 부패해 있었다. 응이와 유격대원들은 나머지 주검들을 학살 현장에 그대로 묻었다. 1975년 베트남전쟁이 끝나고 다시 마을로 돌아왔을 때, 응이는 학살 희생 가족들 18개 무덤 가운데 9개만 찾을 수 있었다. “미군이 1970년부터 이 지역을 불도저로 밀었어요. (베트콩을 소탕하고 확고한 남베트남군 통제 지역으로 만드는) 평정 작전을 완료한 겁니다. 1975년에 이곳은 허허벌판으로 변해 그나마 찾을 수 있는 묘가 9개뿐이었어요.”

“이게 우리 엄마야.” 응이가 학살 현장에 있는 위령비에 적힌 73개 명단 중 14번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14 판티응으( ) 1922’ “그 아래로 셋이 내 동생들이야.” 응이는 위령비에 손을 짚고 한참 동안 그 이름들을 유심히 바라봤다. 위령비 50m 뒤로 꽝남성 인민위원회가 세운 ‘짱쩜 죄악증거비’가 있다. 비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이곳에서 1969년 10월3일(음력) 약 6시께 남조선 병사들-미제국주의의 꼭두각시들이 소탕작전을 펼쳤다. 74명의 동포들을 한곳에 모아놓고 포위했다. 그리고 아주 야만스럽게 총을 쏘아 죽였다. 태어난 지 11일 된 아기 한 명이 극적으로 살아남았다. 이것은 미제국주의 꼭두각시들이 여기 꽝남성 탕빈현 빈즈엉 동포들에게 범한 여러 죄악 중 하나다.’

1969년 11월12일 빈즈엉사에서 벌어진 한국군 민간인 학살은 ‘짱쩜 학살’(73명 사망)이 끝이 아니었다. 지난 1월1일 확인한 빈즈엉사 인민위원회 자료엔 짱쩜 학살이 벌어진 같은 날, 다른 3건의 한국군 민간인 학살 사건이 기록돼 있었다. 자료에 따르면, 빈즈엉사 1촌 마을 응우옌짜이 할아버지 집 마당·방공호에서 민간인 25명, 5촌 마을 당짜 할아버지 집 마당·방공호에서 민간인 25명, 6촌 마을 응우옌텝 할아버지 집 마당·방공호에서 민간인 54명이 한국군에게 학살당했다. 읍·면 단위인 빈즈엉사 4개 지점에서 하루 동안 민간인 최소 177명이 한국군에게 학살당한 것이다.

민간인 학살 빠진 한국군의 기록

레탄응이가 꽝남성 탕빈현 빈즈엉사 1촌에 있는 ‘짱쩜 죄악증거비’(위)와 그 50m 앞 짱쩜 학살 희생자 집단묘지를 둘러보고 있다. 2018년 1월1일.

레탄응이가 꽝남성 탕빈현 빈즈엉사 1촌에 있는 ‘짱쩜 죄악증거비’(위)와 그 50m 앞 짱쩜 학살 희생자 집단묘지를 둘러보고 있다. 2018년 1월1일.

해당 인민위원회의 조사 과정을 잘 아는 한 주민은 “나머지 학살 지점 세 곳엔 현재 ‘역사유적지’라는 팻말만 꽂아놨다. 기본적인 조사는 마쳤고 위령비 공사 기금을 조성하는 중”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 “올해 4월30일 베트남전쟁 종전기념일부터 중학교 6~9학년 학생들에게 빈즈엉사 한국군 학살 4개 사건에 대해 현장수업을 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 학살이 벌어진 지 50년이 지났지만, 베트남은 아직도 피해를 조사하고 위령비를 짓고 그 역사를 배우고 있다.

빈즈엉사에서 민간인 최소 177명이 한국군에게 학살당한 1969년 11월12일, 한국군 전투부대 청룡부대(제2해병여단)가 빈즈엉사에서 작전(작전명 승룡 17호)을 수행한 기록이 있다. ‘제5대대(장, 오수돈 중령)는 배속된 제5중대를 대대예비로 확보하여 상황의 진전에 따라 전투지대 남쪽에 투입키로 한 다음 예하 3개 중대를 목표 지역에 공중기동으로 진공시켰는데, 제25·제27 양 중대로 하여금 지대 중앙의 촌락 지역에서 탐색토록 하고 제26중대로서 지대 동쪽 일대의 차단과 탐색을 병행케 하는 한편, 대대전술지휘소를 빈즈엉 서쪽 1.5km에 있는 소로의 교차 지점 부근에 개설하고 여기에 피난민수용소를 병설하였다.’(국방부 제7권 629쪽, 1969년 11월 승룡 17호 작전, 11월12일자 참조) 청룡부대 제5대대 제25·26·26중대가 빈즈엉사로 진출한 내용이다. 하지만 같은 날 기록에 민간인 177명의 죽음에 대한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

꽝남(베트남)=김선식 기자 kss@hani.co.kr
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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