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으로 돌아간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할까. 당신이 떠난 광장, 여전히 그곳에 머무는 사람이 있다. 은 촛불 1년을 맞아 불의를 폭로한 자, 그것을 기록한 자, 그리고 촛불을 켠 자를 만났다.
이들 또한 당신과 같았다. 1년 전 오늘, 누구도 지금을 예상하지 못했다. 노승일이 최순실씨가 제안한 사업에 혹해 잘 다니던 증권회사를 그만두고 함께하지 않았다면, 김의겸이 신문사 칼럼니스트라는 정체성을 접어둔 채 최순실을 찾아보겠다는 무모한 용기를 내지 않았다면, 박진이 안식년 중 참가한 촛불집회에서 어떤 확신을 갖지 못했다면, 오늘은 없었거나 최소한 지금과 같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떠밀린 것처럼 무엇인가를 선택했고, 어쨌든 현재의 삶을 산다. 그들의 삶 속에 녹아든 촛불은 분노와 욕망, 아쉬움과 서운함 등 저마다의 감정으로 뒤섞여 새로운 빛깔을 내고 있었다. _편집자 </font>
10월26일 서울 광화문에서 과 마주한 그의 전화기가 연신 울려댔다. 그의 전화기에 불이 난 이유는 간단하다. 10월28일 열리는 ‘촛불 1주년 집회’가 코앞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대처해야 할 문제는 행사장 쓰레기 처리부터 청와대 행진 관련 문의까지 다양했다. 의 인터뷰에 응하기 직전, 퇴진행동 기록기념위 차원에서는 청와대 행진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 때문에 노트북을 꺼내 성명문을 검토하고 수정하는 일도 그의 몫이었다. “행진을 안 하기로 결정했다고 하면 시민들 반응이 어떨까요?” 이미 결정이 내려진 뒤였지만 그는 묻고 또 물었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끝까지 구하는 것, 촛불이 가져다준 습관이다. “원래는 이렇게 친절한 성격은 아니었어요.” 그가 웃으며 말한다. 촛불이 바꾼 것은 세상뿐이 아니었다. 그도 변했다. 그에게 촛불 1년의 의미를 물었다. </font><font size="4"><font color="#008ABD">“촛불광장에서 희망의 근거 찾았다” </font></font>퇴진행동에서 여러 역할을 했다.
세월호 참사 대응 활동을 한 뒤 많이 지쳤다. 거대한 비극을 겪은 당사자들을 만나면서 활동하다보니 트라우마가 생기더라. 2016년 4월16일, 참사 2주기 행사를 맡아서 치른 뒤 안식년을 쓰고 쉬던 중 첫 번째 촛불집회가 열렸다. 가봤더니 예사롭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활동을 쉬던 중이니 시민사회단체 동료들에게 마음 편하게 잔소리를 했다. “박근혜를 끌어내리는 것만큼 많은 시민의 의견이 반영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더 많은 민주주의를 실험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 이렇게 말하니 “네가 하라”고 하더라. (웃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3차 촛불집회부터 이른바 ‘주최 쪽’으로 참여했다. 솔직히 그때만 해도 촛불이 어떻게 될지 몰랐다. 벼랑 끝으로 갈지, 희망찬 새날로 갈지. 하지만 어머어마한 에너지를 가진 광장에서라면 죽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가 가장 기억에 남나.박근혜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된 12월9일. 그날 박근혜는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전 촛불집회가 12월3일이었다. 그때 두려움이 들었다. 국회에서 탄핵안이 부결되면 이 많은 사람이 어디로 갈지 모르겠다는 두려움. 국회도 같은 두려움을 느꼈고, 결국 탄핵안이 가결됐다. 그날 국회 앞에서 세월호 가족들과 함께 있었다. “이겼다”라고 외치는 모습을 보니 눈물이 나더라. 이겼구나, 진짜로.
25년 넘게 인권운동을 했다. 가장 큰 승리가 아니었나.인권운동을 하며 만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벼랑 끝에 몰려 있었다. ‘자식이 죽었어요’ ‘직장에서 쫓겨났어요’ 등 원망이 있었다.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고통받는데, 왜 다들 이 부조리한 사회를 참아내지?” 세월호 가족들에게도 들었던 말이 있다. “그렇게 열심히 하는데 왜 아직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이야?” 농담 반, 진담 반 던진 말이었다. 그때 진심으로 미안했다. 사회운동·인권운동 하는 사람들의 능력이 부족했기에, 누군가의 생명이 사라졌는데도 모욕을 당해야 하는 사회를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끄럽고 진심으로 죄송했다. 세상은 변할 것 같지 않았다. 안식년을 간 것도 그런 절망 때문이었다. 하지만 촛불광장을 보며 ‘기다리면 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문정현 신부님과 나눈 말이 있다. 서울 용산 참사, 쌍용자동차 노동자 해고 등을 겪으며 “세상이 너무 싫다, 끔찍하게 싫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문 신부님이 말하더라. “갑자기 온다, 그거. 언제 올지는 몰라. 오긴 와. 그걸 우리는 기다리면서 준비해야 해.” 그땐 그게, 턱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촛불광장에서 희망의 근거를 찾았다. 그렇다고 촛불에 엄청난 기대를 하는 것은 아니다. 냉정히 말하면 인권활동가의 욕심처럼 대단히 진보적이고 그래서 꿈꾸던 광장이라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런 세상을 같이 만들 수 있겠다는 믿음을 심어준 경험이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광장에 나온 시민들 보며 위로받았다” </font></font>솔직히 너무 힘들었다. 아주 다른 경험과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걸 조율하는 게 가장 어려웠다. 6개월 동안 거의 잠을 못 잤다. 가수면 상태에서 깨어나 일을 했다. 내가 결정하고 말하는 하나하나가 역사에 누가 될 수 있다는 부담감도 컸다. 그렇게 일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힘든 일투성이였다. 하지만 토요일 광장에 나온 시민들을 보며 위로를 받았다. 빈말이 아니다. 대단한 장면에서 위로를 받는 것이 아니었다. 조그만 아이가 엄마아빠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모습, 집회에 처음 나온 것 같은 시민들이 어색하게 구호를 외치는 모습. 그게 위로가 됐다. 그 힘으로 다시 일주일을 살아냈다.
인상적인 날이 아주 많았다. 촛불 이후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무엇이었나.박근혜가 탄핵되는 날, 세월호가 인양됐다. 박근혜가 구속되던 날, 세월호가 전남 목포신항에 도착했다. 공교롭게도 박근혜 구속 연장이 2018년 4월16일까지다. 그런 장면들이 가장 인상 깊었다. 사실 박근혜를 무너뜨린 것은 세월호 참사라고 생각한다. 누구도 박근혜의 공포정치에 대항할 수 없었을 때, 세월호 유가족들이 먼저 나섰다. 그리고 촛불로 이어졌다.
촛불은 성공했나.‘내가 이러려고 촛불을 들었나’라고 회의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촛불의 목표는 달성됐다. 1700만 명은 박근혜를 끌어내리자는 ‘원 포인트’에 합의한 것이다. 촛불은 그 몫을 충분히 했다. 이후 적폐 청산은 함께 촛불을 들었던 시민과 사회단체가 이어받아서 하면 되는 일이다. 촛불 이후 우리 사회에서 무엇이 바뀌었나를 묻기에는 아직 이르다. 변화는 이제 시작되는 단계라고 본다. 1주년이라고 하지만 마지막 촛불집회 이후부터 셈하면 얼마 안 지났다. 문재인 정부도 6개월이 채 안 됐다. 변화가 아예 없었던 것도 아니다. 촛불집회를 계기로 박정희 시대의 몰락이 시작됐다. 새누리당으로 상징되는 보수 기득권 정치세력이 분열되는 일이 처음 벌어졌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n분의 1의 목소리, n분의 1의 역할 </font></font><font color="#008ABD">‘인권에는 양보가 없다’. 박진이 일하는 다산인권센터의 슬로건이다. 그는 물러섬 없는 활동가였다. 하지만 촛불집회 이후 달라졌다. 가치를 지키는 방식이 다양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늘 칼날 위에 선 것처럼 살아온 그는 “여유가 생겼다”고 말했다. 박진은 “그것에 ‘성숙’이라는 의미를 붙일 수 있다면, 촛불광장은 나에게도 아주 고마운 경험을 준 것”이라고 여운을 둔 채 말을 이었다.</font>촛불집회에서 본인은 어떤 존재였나.나는 최대한 드러나지 않는 존재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이러니하지. 사회도 보고 대변인도 하고 드러날 수밖에 없었는데. 하지만 n분의 1의 혁명답게, n분의 1의 정체성으로 지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이번 촛불집회의 특징이기도 했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지만 서로 인내해주는 느낌이 강했다. 그 많은 시민이 무대 위에 오른 사람들이 하는 발언에 모두 동의했을 리 없다.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 배치에 찬성하는 시민도 있었을 것이다. 양심수 석방에 동의하지 않는 이도 많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다들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들으려 했다. 가수 ‘DJ DOC’의 노랫말이 여성 폄하적이라는 논란이 있을 때나, 폭력-비폭력 논쟁이 벌어졌을 때도 사소한 문제제기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함께 토론해 결론을 내렸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다양한 n분의 1의 목소리가 모두 중요한 것으로 여겨진 집회였다. 그래서 나도 내 의견을 강하게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n분의 1의 역할을 잘하기 위해 노력했다.
1주년 집회 때 청와대에 행진한다는 계획을 두고 논란이 많았다.처음부터 촛불은 다양했다. 박근혜를 끌어내린다는 목표를 공유했을 뿐이다. 그 목표가 달성됐기에 다양한 경험과 가치가 드러나는 것이라 본다. ‘우리는 달랐다’는 누군가의 표현에 동의한다. 이번 논란을 보며 여러 고민이 생겼다. 촛불을 기념한다면서 행사를 하는 것이 맞는지부터, 청와대 행진이 가져올 논란을 깊이 생각하지 못했던 것 아닌가까지. 이런 논란 자체가 촛불의 의미가 아닐까. 광장에 나온 시민들의 기본적 감수성은 ‘촛불은 내 거다’이다. 그래서 이번 논란은 ‘왜 너희 마음대로 촛불의 계획을 결정하나’라는 지적이라고 본다. 청와대야 갈 수도 있고, 안 갈 수도 있다. 꼭 가야 하는 사람도 있고, 가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다. 다만 그 조율을 잘해야 했다. 그 부분이 아쉽다. 최근 논란이 벌어지면서 가장 마음 아팠던 것은 ‘수구좌파’라는 말이다. 태극기집회에 나온 사람들과 똑같은 언어로 ‘주최 쪽’을 비난하는 것을 보면서 화가 나기도 했다. 처음으로 ‘이러려고 촛불집회 주최 쪽이 됐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웃음) 한편 반성도 했다. ‘그렇게 고생했는데, 그게 보이지 않고 오해받을 정도로 사회운동의 실력이 없구나’라는 반성. 더 잘해야겠다고 생각한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또 다른 광장을 열고 싶다”</font></font><font color="#008ABD">박진과 촛불의 인연은 아직 끝이 아니다. 퇴진행동 기록기념위가 해야 할 일이 많다. 촛불집회 기록을 서울시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로 이관하는 일을 추진하고, 백서도 만들어야 한다. 시민토론회, 학술토론회, 국제토론회 등도 준비해야 한다. 촛불기념비를 남기는 사업도 하고 있다. 그는 “촛불의 가장 큰 수혜자이기도 하지만 이젠 빨리 도망가고 싶다”며 웃었다. 내년 3월 기념비를 만드는 사업까지 하고 다산인권센터로 돌아가 인권활동가로 살아갈 계획이다. 그는 “그곳에서 또 다른 광장을 열고 싶다”고 말했다. </font>1년이 지난 지금 촛불집회의 의미를 짚어본다면.누구도 내 운명을 책임질 수 없다는 것이 광장의 핵심이었다고 생각한다. 최근 ‘헬조선’이라는 말을 듣는 일이 부쩍 줄었다. 촛불 이후의 변화라 믿는다. 우리가 우리를 믿을 때 희망을 찾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 것이다. 결국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건 우리 자신이다. 광화문뿐 아니라 직장과 지역, 우리의 삶에서 다시 광장을 열어 민주적 가치를 자라나게 할 때라고 생각한다. 나부터 그런 풀뿌리 운동의 실력을 키우기 위해 퇴진행동 기록기념위 활동을 마치면 다산인권센터가 있는 경기도 수원으로 돌아가 동료들과 함께 지역운동을 하고 싶다.
<font color="#008ABD">글</font> 정환봉 기자 bonge@hani.co.kr<font color="#008ABD">사진</font>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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