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의 유사역사학과 ‘국사학’으로 상징되는 주류 역사학계의 일국주의 성향을 두루 비판해온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학 교수(한국학)는 최근 한국 사회를 고대로 데려간 유사역사학 논란과 관련해 “파쇼적 판타지에 기반한 유사사학의 인기 상승은 우려할 만한 징후”라며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파탄과 장기화된 경제위기에 불안과 환멸”을 느끼는 대중 속으로 역사 파시즘이 파고들고 있다고 진단했다. 박 교수는 “중국·일본 등 이웃 나라의 과학적이며 양심적인 학자들과 손잡고 정복과 지배의 역사가 아닌 민중/피지배층의 역사를 함께 써야 한다”고 강조하며 소수의 특권화된 교수들이 대학원생과 비정규 교원 위에 군림하면서 이들을 착취하는 주류 학계의 풍토와 서구 중심주의를 극복하지 못한 학풍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비판을 던졌다. 전자우편으로 진행된 박 교수와의 인터뷰는 한국 시각으로 6월12일과 13일, 두 차례에 걸쳐 이뤄졌다.
“유사사학 근본틀, 일본 어용사관”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의 역사 인식과 관련해 유사역사학 논란이 잦아들지 않는 모양새다.
유사사학에 대중이 전염된 것도 모자라 국회의원들까지 영향 받은 상황이 우려스러웠는데 공론 대상이 돼 다행이다. 사실 박정희 유신정권 때 형성된 유사역사학은 유신시대의 복고주의적이며 반동적인 분위기를 극단으로 몰고 간 역사 파시즘에 불과하다. 특히 유사사학의 ‘대부’라고 할 안호상은 이념적으로 파시즘에 경도된 인물로 이승만 시절에 제1대 문교부 장관을 지냈다. 학도호국단 등 파쇼적인 조직을 만들고 ‘일민주의’라는 극우파시즘 어용 이데올로기 성립에 기여하기도 했다. 안호상과 그 추종자들이 내세운 유사사학의 근본 틀은 일본의 어용 역사관과 흡사하다. 천조대어신(天照大御神·아마테라스 오미카미)과 그 손자 니니기노 미코토, 진무(神武) 천황 등을 환인·환웅·단군으로 대체한 것으로 ‘신성한 우리 겨레 핏줄’ 등 혈통적 민족주의에 대한 기본적 인식이 거의 동일하다. 물론 유사사학에도 안호상부터 이덕일까지 여러 변천과 차이가 있지만 배타주의적 국수주의라는 핵심적 기조는 같다.
선생은 10년 전 블로그에 “아마도 10년 후쯤이면 를 사실적인 기록으로 아는 사람이 많아질 거고 수십 년 후면 단군 실재론을 학교에서 가르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제국주의 논리를 내면화한 역사 파시즘이라 할 수 있는 유사사학이 ‘이명박근혜’ 정권을 거치며 더 세를 불린 느낌이다.제국주의에 대한 향수나 극우민족주의는 가깝게는 일본, 멀게는 구미의 여러 나라에서 기승을 부리며 만만치 않은 영향력을 확보하고 있다. 사실 고대사보다 근대사에 대한 제국주의적 수정주의가 어쩌면 더 큰 위험일지 모른다. 고대사에 투영된 역사적 판타지와 근대사에 대한 제국주의적·군사주의적 곡해는 많은 경우에 같이 진행된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파탄과 장기화된 경제위기, 그리고 열강들의 각축이 심화되면서 나타나는 대중의 집단적 불안과 절망, 환멸 등이 유사사학이 자라날 수 있는 토양이 되고 있다. 지금의 세대가 전 세대보다 더 어렵게 살고 자손이 우리보다 더 못살 거라는 걸 대중이 눈치챘다. 현실에 아무 희망이 없고 미래에 그 어떤 빛도 보이지 않으면 대중은 두 가지로 반응한다. 하나는 좌파적인 조직화·급진화, 투쟁의 첨예화다. 예컨대 영국 노동당 당수 제러미 코빈의 부상이 대체로 이 경향을 나타낸다. 또 하나는 극우적 대응이다. 특히 좌파가 취약한 일본에선 고대사의 ‘제국화’를 포함한 극우적 대응이 더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한국은 그 중간에 해당하는데 파쇼적 판타지의 인기 상승은 우려할 만한 징후다.
“국수주의적 역사 경쟁? 정신 나간 소리”동북공정과 일본의 과거사 왜곡 등에 대한 반작용으로 정치인들이 ‘동북아역사왜곡대책특별위원회’를 세워 대응하는 과정에서 유사역사학과 손잡게 되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주변 강대국들은 민족주의적 교육을 하는데 한국만 동북아 평화와 화합을 위해 보편주의적 역사를 가르칠 수 없는 것 아니냐는 현실적인 목소리도 있다.중국과 일본에 꼭 ‘국뽕 장수’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일본 사학자들 중에는 이성시 와세다대학 교수처럼 한·중·일의 공동 지역사를 복원해 ‘국사’로 대표되는 일국사관 극복에 노력하는 분들도 있고, 요시미 요시아키 주오대 명예교수처럼 일본 국가와 군대의 ‘위안부’ 성노예 범죄에 대한 책임을 실증적으로 입증한 양심적인 학자도 있다. 중국에는 동북공정이라는 ‘국뽕’에 동참하지 않으려는 조선족 출신 학자들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우리 과제는 이웃 나라의 과학적이며 양심적인 사학자와 손잡고 정복과 지배의 역사가 아닌 민중/피지배층의 역사를 써야 한다는 것이다. 상호 소통을 기반으로 제국주의 등에 맞선 공동투쟁의 지역사 구도를 짜야 한다. ‘국뽕’ 분야에서 이웃 나라의 국수주의자와 경쟁하자는 것은 속된 말로 ‘정신 나간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유사사학의 생명력은 ‘내재적 발전론’에서 출발한 한국 주류 역사학계의 성장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식민사학 극복이라는 민족주의적 열정이 한편으로 내재적 발전론으로 귀결되고, 다른 한편으로 유사역사학으로 흘러갔다는 것이다.이건 세계 역사학에 남겨진 하나의 거대한 과제다. 바로 ‘서구적 근대의 특권화’, 크게는 서구 중심주의를 극복해나가는 것을 말한다. 내재적 발전론이란 조선 후기에도 서구와 같은 자본주의의 ‘맹아’들이 자랐다는 이야기다. 이 담론의 인식론적 출발점은 서구 같은 근대가 바로 세계사적 보편 원칙이라고 보는 관점이다. 매우 서구 중심주의적이고 근대 본위적 사고다. 실제 18세기부터 19세기 초반의 상황을 보면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일부 등 서구 일부 국가와 인도의 벵골 지역과 중국의 강남 지역 등 세계 체제의 일부 지역에서 단순 매뉴팩처(Manufacture·공장제 수공업)를 더 발전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서구 제국주의는 폭력적인 방식으로 인도와 중국의 움직임을 차단하면서 서구만을 산업 문명의 유일한 요람으로 만들었다. 물론 산업화의 움직임이 세계체제 안의 ‘모든 곳’에서 나타나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국가들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 자원을 공급하는 등 세계 무역에 매우 제한적으로만 참여했다. 조선은 여기에 속했다. 조선 후기 총생산의 1%만이 무역으로 구성됐다. 그렇다고 조선이나 루마니아, 페르시아(이란), 타이 등 처음부터 산업문명 발달과 역사적으로 무관했던 나라들의 역사가 무가치한 건 절대 아니다. 조선 역사는 조선 역사대로 가치가 있으며, 꼭 산업화가 아니더라도 조선 후기에 분명 역동적이고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단, 그 변화를 고찰할 때 서구중심주의적 색안경을 벗어 던져야 한다.
‘내재적 발전론’이라는 서구중심주의젊은 역사학도들은 유사역사학의 폐해도 문제지만 주류 역사학계의 폐쇄성, 연고주의, 비민주성도 함께 극복해야 한다고 지적한다.사학계나 인문학계만의 문제도 아니다. 제도권 ‘학계’와 ‘대학 전체’의 문제다. 이미 착취 공장이 된 대학에서 소수의 특권화된 정규직 교원(교수)이 다수의 비정규직 교원과 임시직 교원, 그리고 조교와 석·박사 과정 학생 위에 군림하면서 때때로 무자비한 착취 행각을 벌인다. 예컨대 교수의 지시에 따라 1년에 약 8만 장에 달하는 논문과 책을 스캔한 서울대 대학원생 ‘스캔 노예’ 사건처럼 교수가 대학원생에게 살인적 착취를 해도 이걸 막을 제도적 장치가 전무하다. 인권기구가 있다 해도 정실주의적, 카르텔 구조의 일부분일 뿐이다. 같은 착취 공장인데도 도제 시스템이 남아 있는 역사학계에선 사제 간 인신 예속이 더 심하고 지배-피지배 관계가 더 분명해진다.
일국사적 관점에서 한국사를 연구하는 학풍도 문제로 보인다.동의한다. 이른바 ‘국사’를 연구하는 이들 상당수는 이 세상에 한국사만이 존재한다는 묵시적 전제하에서 연구하는 경향이 강하다. 오로지 한국사 자료만 읽고 비교사적인 관점을 전혀 도입하지 않는다. 예컨대 시장 유통 구조의 발전이나 생산 발전 등의 측면에서 조선 후기와 청나라 시절 강남 지역 등을 비교하면 ‘내재적 발전론’을 크게 수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도 국사 연구자들은 중국사나 인도사를 나 몰라라 한다. 세계 보편적인 시각에서 균형 잡힌 역사 서술을 할 수 없는 이유다. 이들의 관점을 강압적으로 학문 후속 세대에게 강요하니 문제가 지속되는 측면도 있다.
지금 한국 소셜네트워크에선 도종환 후보의 역사관을 비판하는 역사학자들이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자들로부터 뭇매를 맞고 있다. “역사학자만 역사에 대해서 말하라는 거냐, 식민사학자들은 닥쳐라” 등의 모욕적 발언이 오간다.한국 사회는 경제적으로 신자유주의 시대에 살지만 문화적으로 후기 자본주의시기에 걸맞은 ‘반성적 근대성’(Reflective Modernity)이 덜 발달된 것 같다. ‘비판적 거리 유지’ 같은 성찰적 세계 인식이 잘 안착되지 않았다. 문재인 대통령을 지지하는 이들은 문 대통령을 마치 성현이자 성인군자인 것처럼 이상화하면서 ‘절대 지지’하고 있다. 문 대통령도 잘하는 일이 있는가 하면, 예컨대 도종환 후보자 발탁처럼 오류가 있을 수 있다. 또 크게 봐서 주류 정치인은 재벌과 관벌, 즉 한국 사회 지배층의 (이해를 위해 복무하는) 집단적 의지의 실행자다. (문 대통령에 대한) 이런 ‘절대화’는 결국 대부분의 ‘흙수저’ 지지자에게 쓰라린 환멸로 돌아올 수도 있다. 문 대통령이든 그 어떤 주류 정치인이든 재벌과 부호들의 이해관계를 떠나 피지배자의 편에 완전하게 설 수는 없다. 언젠가 이 정권과 민중의 이해관계가 충돌할 때 환멸에 빠지지 않도록 지금부터 비판적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가야사 복원, 연구 인프라 확충부터”
문재인 정부는 영호남의 벽을 허문다는 차원에서 가야사 복원을 시도하고 있다. 가야사를 전공한 입장에서 새 정부의 가야사 복원 방침을 어떻게 보는가.가야사가 오랫동안 ‘고대 삼국’이라는 인식론적 구조하에서 주변화돼왔다는 점에서 일단 환영한다. 다만 역사 연구를 ‘관광자원 개발’과 연결하는 발상 자체는 문제다. 돈벌이 전에 고고학 발굴과 대학 박물관, 연구소 등 학문적 인프라를 더 내실 있게 구성해야 한다. 전임직 연구자를 늘려 안정된 연구 환경을 만들어주는 게 가야사 복원 차원에서 더 중요하다. 가야는 북으로 한 사군, 남으로 일본열도의 여러 세력, 그리고 백제·신라와 긴밀한 관계에 있었다. 그런 맥락도 잘 살렸으면 한다.
문재인 정부의 개혁이 성공하기 위해 반드시 이행해야 하는 과제가 있다면.과거처럼 이 정부에서도 ‘삼성 공화국’이라는 구조가 해체되지 않는다면 별 희망이 없으리라고 본다. 또 삼성을 위시한 재벌들이 지금까지 주도해온 비정규직 양산을 막고 공공부문뿐만 아니라 민간부문에서도 대대적으로 정규직화를 하지 않는다면, 소득·내수 주도 성장도 어려울 것이다. 이 점에서 문재인 정부가 ‘비정규직 문제’를 중심 화두로 잡은 건 잘한 것 같다. 다만 가시성 높은 일부 공공부문 현장에 국한하지 말고 ‘비정규직 없는 아름다운 세상 만들기’에 새 정부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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