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한테 왕따당할 각오로 공부”… 회계사·변리사 등 기피종목 진출도 두드러져

“남자라면 술을 끊을 수밖에 없게 되고 여자라면 친구한테 왕따당하지 않고서는 절대 이 곳을 다닐 수 없다고들 합니다.” 대체 어떤 곳이기에 왕따까지 당해야 한다는 걸까? 수강생 중 여성이 얼마나 되냐는 물음에 미국공인회계사(AICPA) 교육기관인 ‘ISA&삼일회계법인’의 직원인 곽문정씨가 대뜸 들려준 말이다. 여성 수강생의 경우 친구와 만나는 것도 끊을 만큼 독한 마음을 먹고 공부한다는 뜻이다.
"자격증, 여성일수록 더 따야 한다"
곽씨는 “상담을 해보면 남성도 그렇지만 여성의 경우 특히 입사한 지 1∼2년이 지나면서 어느 순간 불쑥 자신이 무능하다는 자괴감에 빠져들어 자격증을 따러 온다는 사람이 많다”고 덧붙였다. 직장생활 중에 느닷없이 찾아오는 자신의 ‘한계’가 여성들의 발길을 학원으로 돌리게 만든다는 얘기다. 치열한 경쟁에 시달리면서 남성들도 자격증 취득에 나서지만 직장에서 남성에 치이는 여성일수록 더욱 ‘자격증이라도 따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학원 수강생으로, 외국계 금융회사에 다니는 윤아무개(26·여)씨는 “내가 하는 일은 마케팅 분야라서 회계쪽과 무관하지만 직장 다니다보니 자꾸 뒤처지는 것 같고 그래서 자격증을 따두려고 준비하고 있다”며 “주말 이틀간 학원에 가는데 회사 동료 몇명도 자격증을 따려고 밤에 학원을 다니고 있다”고 말했다. 직장 다니랴 자격시험 공부하랴 버거운 날들이지만 새로운 것들을 익히지 않으면 여성의 경우 직장에서 언제든 떠밀릴 수 있다는 불안감이 남성보다 크기 때문이다.
요즘 자격증 취득 붐을 보면 ‘우먼파워’라 할 만큼 여성들의 자격증 도전이 거세다. 자격증에서의 여성 돌풍은 수치로 단박에 확인된다. 전문 자격종목 중 여성파워가 가장 센 곳은 단연 공인중개사다. 공인중개사 전체 합격자 중 여성합격자의 비율이 99년 26.6%, 2000년 38.9%에 이어 지난해는 40.6%로 해마다 크게 늘고 있다. 종로2가에 있는 박문각행정고시학원쪽은 “공인중개사 수강생이 350여명인데 이중 80% 정도가 가정주부 등 여성”이라고 말했다. 회계사, 변리사, 세무사 등 전통적으로 여성이 기피해온 종목에도 여성들의 가세가 두드러진다. 변리사 시험의 여성합격자를 보면 2000년 30%, 지난해는 25%(총 합격자 200명중 49명)다. 세무사의 경우 여성 합격자는 2000년에 42명(9.3%)에서 지난해는 72명(11.9%)을 차지했다. 법무사는 지난해 총합격자 101명 중 여성이 15명, 관세사는 합격자 94명 중 14명이 여성이다.취업난 속에서 여성의 직장 구하기가 어렵다보니 여대생들은 취업의 안전판으로 자격증에 몰리고 있는 것이다. 금융자산관리사(FP) 대비 학원으로 잘 알려진 서울 종로구 공평학원의 ‘FP 특강’ 수강생들도 여성이 절반을 넘는다. “선배들이 투자상담사든 FP든 따놓지 않으면 취업할 때 고생한다면서 권유해 듣고 있어요. 자격증 하나 없으면 취업이 어려운 세상이잖아요.” 입학한 뒤 1년도 안 돼 자격증 취득에 나선 대학 1학년 방아무개(22·여)씨의 말이다. 공평학원쪽은 “투자상담사 2종 자격증 수강생 200여명 중에서도 절반이 여성”이라고 설명했다.
육아휴직 중에 공부해 합격하기도
서울 노량진 한교고시학원의 경우도 세무사 대비반 수강생들 가운데 절반이 여성이다. 대학생 김아무개(여·경영학과 3년)씨는 “여자가 남자에 비해 취업하기 어렵고 해서 세무사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며 “사무자동화 자격증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옆 강의실에서 감정평가사 시험을 준비중인 직장여성 최주희(35)씨는 두툼한 ‘감평회계학’ 책을 펴놓고 연신 전자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었다. 퇴근 뒤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이끌고 온 뒤 밤중에 딱딱한 걸상에 앉아서 두터운 회계학 교과서의 낯선 개념 및 수치들과 씨름하는 게 여간 고역이 아니다. “부동산 관련 기업에 다니고 있는데 석달째 1주일에 이틀씩 밤에 와서 수강하고 있어요. 직장의 다른 동료 4명은 회사다니면서 자격증을 벌써 땄죠.”
월급쟁이 신세에서 벗어나고픈 심정은 여성이라고 다를 바 없다. 한 30대 가정주부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지금은 후배 졸업생과 재학생 등 6명으로 꾸려진 스터디 그룹에서 변리사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더 나이먹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어서 자격증을 따려는 겁니다. 자격증을 취득했다고 금방 부와 명예를 움켜쥘 수 있는 건 아니죠. 하지만 지금은 전문 자격증 시대라고 하잖아요.”
더이상 보장되지 않는 미래가 불안하기도 하고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다 학원을 찾기도 한다. AICPA를 준비하고 있는, 이름 밝히길 꺼린 20대 중반의 직장여성은 “회계학이 아직 친숙하지 않고 또 내가 직장에서 하는 업무와 직접 관련되지는 않지만 자격증을 따놓으면 회계법인으로 진출해 일할 기회가 생길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외국계 회사에 다니는 직장 경력 3년차다. 6개월째 AICPA를 준비하고 있는 대학 4년생인 유아무개(여·경영학과)씨는 직장에서 곁가지가 아닌 핵심업무를 맡기 위해 자격증에 도전하고 있다. 그는 “외국계 회사쪽에 관심이 많은데 취업에도 도움이 될 것 같고, 취업한 뒤에 금융분야에서 일하고 싶어서”라고 당찬 포부를 내비쳤다.
남편이 회사에서 잘리면…
ISA의 곽문정씨는 “최근 우리 학원에서 씨티은행에 다니는 30대 중반의 과장급 여성 커리어 우먼이 합격했는데 육아휴직 중에 공부해서 합격했다”며 “여성들의 꼼꼼한 면이 세법이나 회계분야 등에서 강점으로 작용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가정주부들 판’이라 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 공인중개사 준비반의 여성 수험생은 자격증에 매달리는 목적이 다소 특이하다. 상당수가 자신보다는 ‘가정’의 미래를 걱정해서 학원을 찾는다. 집안에 들어앉아 있다가 덜컥 남편이 실업자 신세에 놓이는 사태에 미리 대비하는 포석인 것이다. 한 공인중개사 대비 전문학원에서 생경하기 그지없는 ‘민법·민사특별법’을 펴놓고 있던 주부 장아무개(42)씨는 “이번주부터 처음 시작한 건데 법 공부라서 그런지 무척 어렵다”며 “남편이 회사에서 잘리면 같이 중개사 사무실이라도 차릴 생각”이라고 말했다. 나중에 늙어서 뭐라도 해야겠기에 ‘노후대책’으로 중개사 자격증을 따려 한다는 주부들도 여럿이다. 주부 김아무개(32)씨는 “1년째 공부하고 있는데 집안에 앉아서 생각해보니 우리 부부의 노년을 위해 뭔가 해둬야 할 것 같아서”라며 웃어보였다.
공인중개사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김아무개(47·서울 송파구)씨는 “여성들이 죄다 학원에 나와 공부하는 바람에 경쟁이 더욱 심해지고 있다”며 “여성들은 똑똑하고 한눈을 팔지 않아 합격률이 높다. 이래저래 나같은 남자들은 불안하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글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사진 김종수 기자 jongs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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