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처음과 끝은 시민일 것이다. 철학자 김상봉에게 한국 사회 진단과 전망, 과제를 들었다. 꽃길을 원하는 시민들의 토론 현장을 취재했다. 2016~2017 촛불의 심지라고 할 2015년 민중총궐기의 상징적 인물(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 고 백남기 농민의 큰딸 백도라지)도 만났다. 촛불의 의미를 궁구하는 학계의 논의를 차분히 살펴 전한다. 우리가 미처 몰랐던 촛불과 외침을 보여주는 사진들도 싣는다.
취재 전진식·진명선·정환봉·김효실 기자, 편집 김선식·허윤희 기자, 디자인 장광석
촛불은 ‘혁명’인가? 2016년 12월9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대통령의 직무가 정지됐다. ‘2016~2017 촛불’을 분석한 학자 일부는 이를 견인한 촛불을 명예혁명이라 칭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백낙청, 박찬표, 하승수 등 *참고 문헌은 기사 맨 끝에 정리했다. 본문에는 학자 이름만 명시한다). 이들은 대통령의 시간이 멈추는 순간 혁명의 시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본다. 촛불혁명의 시간은 한창이다.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대선 결과 등에 따라 ‘미완의 혁명’이 될 가능성도 크다는 의미다.
촛불을 혁명이라고 부르지 않는 쪽에서도 이번 촛불시위가 1987년 민주화 이후 가장 큰 사건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무엇보다 민주주의 관점에서 그렇다. “확실히 한국 민주주의는 새로운 여정을 시작했고, 우리는 이미 그 길 한가운데 서 있다.”( 편집자 서문) 한국 민주주의는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가야 하는 걸까. 이 여정의 끝은 어디여야 할까. “지금 시민들에게 필요한 건 ‘지도’(指導)가 아니라 길을 찾아나설 ‘지도’(地圖)이다.”(하승우)
은 현재진행형 촛불에 ‘해석적 개입’을 시도하는 학자들의 논의를 살펴봤다. 한국 민주주의 전환의 여정에 동참한 시민들에게 지도가 되어줄 열쇳말을 찾기 위해서다.
① 민주주의의 급속한 퇴행·결손한국 민주주의의 상태 진단 및 개념화를 시도하는 논의가 많았다. 촛불 점화의 구조적 배경을 설명하려는 목적에서다. 표현은 여럿이었지만, 진단 결과는 비슷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민주주의는 퇴행했다.
함께 생각할 점은 ‘퇴행 이전’ 한국 민주주의 역시 성숙한 상태는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1998년부터 5회 연속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대선까지 포함하면 6차례 공적 검증을 통과했다. 대통령 박근혜의 직무 정지를 이끈 주체는 시민이지만, 박근혜 정부를 탄생시킨 것도 민주주의다. “설마 이럴 줄은 몰랐다”고 하더라도, 박근혜라는 한 인물의 문제를 넘어서는 “한국 대의민주제의 근본적 오작동 가능성”(서복경)이 제기된다.
그렇다면 한국 민주주의는 어떤 상태였을까. 사회학자 신진욱은 한국 사회가 시민항쟁으로 대통령직선제를 쟁취한 1987년까지 거슬러간다. 그는 1987년을 ‘민주화의 해’로 부르는 언어 표현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민주화 개시의 해’가 더 적절하다고 말한다. “최소한의 형식적 민주주의를 최초로 도입한 것을 민주주의의 달성으로 간주”하면, 선거 경쟁 외에 민주주의를 이루는 다른 지표들(예컨대 정치적 기본권, 수평적 책임성, 권력분립 등)의 중요성을 간과하기 쉽다는 이유에서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와 권위주의가 혼재된 회색지대에 있다. 한국의 선거민주주의는 입헌주의에 깊이 뿌리내리지 못하면서 다른 지표들도 크게 진전하지 못했다. 특히 대통령을 정점으로 하는 권력 집중의 문제가 이어졌다.
물론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의 성공적·지속적 실시’는 민주화의 핵심 지표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선거민주주의가 품고 있는 위험들-선거제도 자체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선거제도를 오용하거나 여론을 조작할 가능성, 선거를 통해 획득한 권력으로 민주주의를 이루는 다른 요소를 훼손할 가능성을 더 직시해야 한다.
권위주의 세력은 민주주의를 악용하는 방식으로 민주주의의 발전을 적극 억압할 수 있다. 방송 장악 시도, 청와대·국가정보원의 민간인 사찰, 인터넷상 정치적 표현 검열과 처벌, 집회·시위 폭력 진압, 국정원 선거 개입, 역사 교과서 국정화, 정당 해산,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비합법화, 비선 실세, 정경유착 게이트 등으로 지난 9년간 한국 민주주의는 “선거의 공정성 자체가 위협받는, 사실상의 가짜 민주주의로 이행”(신진욱)했다.
문학평론가 백낙청은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노태우·김영삼 정부의 ‘보수 정부’와 구별해 마땅한 ‘반동’과 ‘역주행’의 시대를 열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보수 정부’에서도 민주주의의 진전은 가능하다.
대규모 촛불은 평시에 정치적 의사를 표출하기 힘든 사회 구성원들의 압축·누적된 에너지가 일시에 폭발한 측면이 있다. 권력의 피라미드 정점에 있는 최고 권력자를 즉각 징벌하려는 대규모 촛불집회는 대통령·청와대에 집중된 권력 구조와 거울상이다.
매우 다양한 사람들이 ‘국민’ 또는 ‘시민’이란 추상적인 집단정체성의 상징 아래 모인다. 집권 세력이 “선거 유세에서 보인 제스처나 약속이 아니라 집권 후 전혀 다른 모습으로 돌변할 경우 그 권력의 질주를 저지하고 족쇄를 채울 또 다른 권력 수단을 한국 민주주의가 갖고 있느냐” 하면, 그러지 못했기 때문이다(신진욱). “민주주의가 지녀야 할 법의 지배와 민주적 가치 및 규범을 한편으로 하고, 법 위에 군림하는 대통령의 명백한 권위주의적 통치 행태 사이의 인지적 불일치는 보통 시민들이 인내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으며, 촛불은 민주주의의 복원을 요구했다(최장집).
② 정당 체계 민주화와 시민의회론그렇다면 촛불이 이룬 것 혹은 이루려는 것은 ‘어떤’ 민주주의인가. 학자들은 촛불과 직접민주주의를 동일시하는 섣부른 낭만화, ‘촛불의 요구는 직접민주주의’라는 거친 해석을 경계했다. 2016~2017 촛불이 이전 촛불과 분리되는 가장 중요한 지점은 정치의 소환이다. 대통령, 정부, 국회, 특검, 국정조사, 청문회, 헌법재판소 등 정치를 이루는 여러 요소가 각각 ‘제 역할을 하라’는 촛불의 압력에 노출됨으로써 교과서에서 한 번 보고 지나쳤을 형식적 원리나 제도, 기구들이 ‘표정’을 가진 유기체로 시민 앞에 등장했다.
대의제(정당정치)의 중요성을 주장해온 학자들의 글을 모은 는 “시민이 정치의 여러 제도와 기구를 이해하고 그 본래의 목적에 맞는 역할을 요구했다는 점”에 주목하며, “‘87년 체제 극복론’ 내지 ‘87년 헌법 극복론’의 인식론과는 달리, 시민들은 87년 체제의 여러 요소를 활용하면서 그것에 생기와 활력을 불어넣고, 또한 이를 다양하게 표현하고 구현하려 했던 것이 이번 국면의 특징”이라고 평가했다.
같은 책에서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은 이번 촛불이 “한 손에는 촛불을 다른 한 손에는 정치를 부여잡은”, 일종의 ‘양손잡이 민주주의’를 실천한 것이라고 했다. 그는 지난 20대 총선에서 이미 시민들이 ‘정권 교체’뿐만 아니라 ‘정당 체계 교체’에 대한 열망을 표출했다고 분석한다. 그 때문에 이번 촛불 국면에서 “3당 내지 2.5당 체계의 물리학적 효과가 꽤나 긍정적일 수 있다는 경험은 특별”하고 온건 다당제가 한국 민주주의를 더 튼튼하게 해줄 것이라고 주장한다. 국회의 민주적 발전을 위해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이 시급하다는 주장도 있다(하승수, 하승우).
직접민주주의 장치를 늘려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촛불시위가 발휘하는 시민권력이 상시·지속적 생명력을 가질 수 있도록 민주주의의 밀도를 높이자는 것이다(김종철). 사회학자 김상준은 국회 밖의 국민적 합의 기구로서 ‘시민의회’를 제도화하자고 제안한다. 이미 캐나다·네덜란드·오스트레일리아 등에서는 선거법 개정을 의제로, 아이슬란드와 아일랜드에서는 개헌을 의제로 법제화한 시민의회를 운영했다. 선거법 개정과 개헌 모두 국회가 스스로 해결하기 어려운 의제다.
그는 시민의회의 논의 과정이 “공정하고, 공개적이며, 이성적”인 건 모두 입증된 사실이라면서, 시민위원단을 지역·성별·연령을 고려한 층화 후 무작위 표본 추출로 뽑고 시민의회에서 모아진 합의를 국회 심의·결정에 맡긴 뒤 최종적으로 국민투표를 하자고 제안한다. 베네수엘라에서 차베스가 헌법 개정으로 만든 시민부(Citizen Power) 같은 제4의 헌정 기관을 만드는 방법도 있다(하승우).
③ 박정희 패러다임의 헤게모니 붕괴콘크리트는 부서졌다. 박근혜 대통령 지지율은 4%까지 추락했다. 박근혜의 ‘콘크리트 지지 기반’은 한국의 보수적 가치·이념·정체성의 강고함을 상징해왔다. 동시에 1970년대 박정희 개발독재와 그 업적, 리더십을 신비화해 민주화 이후에도 헤게모니로 재생산하는 역할을 했다. 이 때문에 다수 학자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촛불이 가진 역사적 중요성으로 박정희 패러다임 해체를 꼽았다.
주목할 점은 해체의 힘이 촛불의 압력은 물론 보수 세력 내부로부터 왔다는 사실이다. 옛 새누리당 비박계 분파의 탄핵 지지 결정을 말한다. 냉전-반공-권위주의 특징을 지닌 보수가 주류가 되고 의사 결정을 주도하던 정당정치에 큰 전환점이 열렸다.
“주세페 토마시 디 람페두사는 이라는 유명한 소설에서 ‘변하지 않기 위해 변해야 한다’고 말한다. 반공 강경 보수에서 계몽적 온건 보수로의 전환은, 보수가 한국 사회와 정치에서 소멸하지 않기 위해 과감하게 자기 변화의 결단을 내린 것이라 할 수 있다.”(최장집)
“향후 보수가 한국 민주주의를 끊임없이 퇴행시켰던, 과거와 같은 ‘냉전 반공주의에 기초를 둔 비이성적 정치 동원’ 대신 다른 이념 내지 사회적 기반을 갖지 않으면 안 되는 압박에 노출된 것, 이른바 비박일지라도 그런 변화를 통해서만 ‘정치적 시민권’을 인정받게 될 것이라는 점은 놀라운 일이다.”(박상훈)
박정희 패러다임의 중핵은 또한 국가 관료 엘리트, 정치 엘리트와 재벌 대기업 집단의 동맹·결합이다. ‘발전 국가’의 경제 운영 원리로서 관치 경제, 노동 배제, 반공-반북주의라는 이념적 힘 혹은 사회적 가치들이 이 동맹 관계를 기반으로 재생산되었다(최장집). 박근혜 정부의 붕괴는 이러한 국가-재벌 동맹이 어째서 민주주의 발전, 경제 발전을 저해하는지 극적으로 드러냈다. 시민사회단체들이 모인 ‘박근혜정권퇴진 비상국민행동’ 산하에 노조 파괴와 산업재해에 대응해온 단체들이 따로 결합해 ‘박근혜의 공범 재벌총수 구속 전경련 해체 특별위원회’를 설치·운영하기도 했다.
문학평론가 백낙청은 박정희 신화가 치명적 손상을 입은 것은 사실이지만, 박정희 신화가 끝장났다는 평가는 “때 이르다”고 지적한다. 독재정치와 경제성장을 결합한 박정희식 개발이 성립할 수 있었던 주요 조건인 분단체제에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분단체제로 인해 대한민국에는 공포된 성문헌법 외에 ‘빨갱이로 몰린 자에게는 권리가 인정되지 않는다’는 ‘이면(裏面)헌법’이 존재한다고 본다. 통합진보당 해산판결 당시 헌재가 대한민국 법질서는 “북한이라는 반국가단체와 대치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해서 운용되어야 한다고 밝힌 게 대표적이다.
촛불은 대통령 쪽 변호인단처럼 촛불을 ‘친북 좌파’로 모는 등 이면헌법을 활성화하려는 세력을 희화화·무력화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한국 민주주의 훼손의 책임을 묻겠다’는 분명한 목적의식, 높아진 정치의식은 촛불처럼 이면헌법에 휩쓸리지 않는 원동력이다.
정치학자 최장집도 비슷한 맥락에서 ‘맹목적이다 싶을 정도로 과도한 평화주의’라는 촛불 비판에 대해, 촛불이 분단 상황의 보수적 힘을 잘 알고 있기에 선택한 ‘전략’이란 점을 강조한다. “권력에 대한 강력한 반대 운동은, 그 연원과 목적이 무엇이든, 남북한 간 이데올로기적 갈등과 균열에 그대로 접목될 수 있다”는 점을 장기간 학습한 경험이 작용했다는 것이다.
광장과 일상의 거리 좁히기이처럼 촛불은 민주주의 퇴행을 막고 박정희 패러다임 해체를 추동하며 정치의 열린 공간을 마련했다. 촛불의 한계를 다룬 논의도 있다. 2016년 12월 촛불시위가 절정으로 향할 때 철도노조는 72일간의 파업을 성과 없이 마무리해야 했고, 시중 은행에 성과연봉제가 전격 도입됐다. 노동문제를 포함한 ‘부문’ 이익들은 촛불 속에서 확장되기보다 희석됐다.
하지만 이는 촛불의 한계라기보다 촛불을 부른 한국 민주주의의 한계가 고스란히 반영된 것이라는 의견도 나온다. 촛불의 결과보다 촛불의 원인과 더 긴밀히 닿아 있다는 지적이다. 광장과 일터·삶터의 괴리 문제도 마찬가지다. 갈수록 어두컴컴해지기만 하는 노동공간, 생활공간을 견딜 수 없어서 거리로 뛰쳐나온 사람들도 존재한다. 다양한 사람들의 일터·삶터에 작은 광장들이 단단히 뿌리내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당위적인 지적일 뿐이다.
학자들은 촛불을 계기로 대두하는 대부분의 의제가 촛불 이전부터 존재했고 현상적으로도 포착됐다고 말한다. 달라진 점은 단 하나, 국가·정당 운영에 이러한 의제를 채택, 실현시키도록 압박할 수 있는 시민권력이 형성됐다는 점이다. 연 인원 1천만 명을 기록한 시민행동의 힘이다.
“우리가 정말 살기 좋은 세상, 좋은 삶을 누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면 이제 그런 좌표들을 보며 부지런히 걸어가야 한다. 가다 못 가면 쉬었다 갈 수도 있지만 시민권력이 구성되는 기회는 흔치 않다. 갈 수 있을 때 많이 가야 나중에 다시 걸어갈 수 있다.”(하승우) 광장의 촛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김효실 기자 trans@hani.co.kr백낙청, ‘촛불’의 새 세상 만들기와 남북관계, 제175호.
김종철, 촛불시위와 ‘시민권력’, 제152호.
하승수, 미완의 시민혁명은 이제 그만, 제152호.
김상준, 시민의회, 왜 필요한가, 제152호.
신진욱, 한국에서 결손민주주의의 심화와 ‘촛불’의 시민정치, 제29호(참여연대 참여사회연구소 펴냄).
배성인, 촛불항쟁과 박근혜 퇴진의 정치사회학, 제70호(메이데이 펴냄).
김시웅, 박근혜 정권 퇴진투쟁, 민주주의 투쟁을 넘어 반자본주의 투쟁으로 발전시키자, 제70호.
고민택, 박근혜 정권 퇴진정국의 정치학, 제70호.
김정주, 촛불의 저항에서 대항 헤게모니로, 제70호.
하승우, 2016년 시민항쟁을 통해 상상하는 새로운 민주주의, (삶창 펴냄).
최장집·박상훈 대담, (후마니타스 펴냄).
서복경, 민주주의의 시민권적 기반에 관하여, .
박찬표, 촛불과 민주주의, .
박상훈, 촛불과 정치변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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