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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38살 꽃해녀입니다

“처음 아니면 두 번째 외지인 해녀”로 사는 전소영·조인래씨 부부… 클릭질만 하던 그녀가 ‘괸당’ 벽 넘어 ‘삼춘’들이 인정하는 ‘꽃해녀’가 되기까지
등록 2016-08-02 17:08 수정 2020-05-03 04:28
<font color="#006699">제주 이주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해녀’를 생각해본 적 있을 것이다. ‘제주 해녀’는 육지 사람들이 제주를 상징화하는 한 방식이다. 실제로 해녀는 제주의 ‘근원적 축적’을 상징하는 존재다. 외지인에겐 열리지 않는 체계이고, 제주인의 삶 본연의 지속성이다.
외지인으로서는 정말 희귀하게도 제주에서 ‘물질’을 하는 부부를 만났다. 이들의 삶이 제주 이주민 전체를 대변하긴 어렵다. 하지만 제주 이주를 꿈꾸는 사람들의 첫 마음과 이들의 일상은 연결돼 있다. 서울에서 사장님과 디자이너로 살다, 이제 잠수로 생을 꾸리는 부부를 이 만났다.
*표지에 등장하는 ’살암시믄 살아지매’는 ‘살다보면 다 살 수 있다’는 뜻의 제주어입니다. 스스로를 위로하는 말이자, 힘든 누군가를 응원하는 말입니다. 고된 시집살이를 겪었던 제주의 옛 여인들이 많이 듣고, 했던 말입니다.
취재 김완 기자, 사진 류우종 기자, 편집 신윤동욱 기자, 디자인 장광석</font>
제주 해녀. 하고 싶은 사람은 많지만 할 수 없는 직업이다. 해녀는 고된 노동을 함께하며 때론 경쟁하고 결정적 순간엔 협력해야 하는 집단의 일이다.

제주 해녀. 하고 싶은 사람은 많지만 할 수 없는 직업이다. 해녀는 고된 노동을 함께하며 때론 경쟁하고 결정적 순간엔 협력해야 하는 집단의 일이다.

서울의 삶은 ‘달달’하지 않았다. 눈 뜨면 바빴고, 눈 감으면 불안했다. 아침저녁으로 지하철 손잡이를 2시간씩 붙잡고 서 있어야 겨우 유지되는 삶. 날선 칼처럼 늘어선 신경질을 요리조리 피해가며 월급 날짜만 기다리는 시간들.

전소영(38)·조인래(43) 부부는 우연히, 그러나 운명적으로 탈출을 결심했다. 베일 것 같은 시퍼런 시공간에서 내려서는데 까닭, 근거, 이유 같은 건 필요 없었다. 그냥이었다. 도시의 작동 원리에 순응해 사는 것이 아닌 스스로의 삶을 조직해보자고, 또박또박 찍히는 숫자의 강박에서 풀려나 순수한 의지만으로 자맥질하는 삶을 살아보자고. 부부는 그렇게 3년 전 무턱대고 제주도로 내려왔다. 연고도 없었고 할 일도 없었다. 누구나 꿈꾸지만 아무나 할 순 없는 일. 잔잔하지만 다소 특별한 삶을 살아가는 부부를 만났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잘한다고 되는 직업이 아니다 </font></font>

“제가 아직 정식 해녀가 아니어서요. 해녀를 대표하거나 그럴 수 없고, 그렇지도 않고요.”

정식 해녀는 아니라지만 전소영씨는 엄연히 해녀다. 다만, 초보일 뿐이다. 전씨의 일터는 서귀포 동쪽 망장포 해변이다. 하례리 어촌계에 속해 공동으로 작업한다. 공식 기록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제주도 사람들은 전소영씨가 “처음 아니면 두 번째 외지인 해녀일 것”이라고 말한다.

해녀 사회는 굉장히 폐쇄적인 커뮤니티다. 제주도 전체가 외지인을 위한 테마파크처럼 ‘건설’되고 있지만, 여전히 문호가 열리지 않는 고유한 체계다. 제주 중산간이 목장주를 중심으로 구획된다면, 바닷가 마을은 해녀를 중심으로 조직된다. 제주도 이주 양상이 다양해졌고 해녀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많아졌지만 여전히 귀한 직업이다. 많은 이주자들이 제주를 생각하며 한 번쯤은 해녀를 생각해봤겠지만 그 가운데 진짜 해녀가 된 이는 한 손으로 꼽을 정도다.

<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50%" align="right"><tr><td height="22px"></td></tr><tr><td bgcolor="#ffffff" style="padding: 4px;"><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 bgcolor="#ffffff"><tr><td class="news_text02" style="padding:10px">
<font size="4"><i><font color="#991900">해녀 사회는 굉장히 폐쇄적인 커뮤니티다. 제주도 전체가 외지인을 위한 테마파크처럼 ‘건설’되고 있지만, 해녀 사회는 여전히 문호가 열리지 않는 고유한 체계다.</font></i></font>
</td></tr></table></td></tr><tr><td height="23px"></td></tr></table>

이 역설은 우선, 해녀의 일 자체가 너무 힘들다는 데 기인한다. 해녀들은 이르게는 16~17살부터 생존 투쟁으로 물질을 시작한다. 제주는 꽤 오랫동안 “물질을 하지 않으면 먹고사는 게 없”던 땅이었다. 하고 싶고 설령 잘한다 해도 할 수 없다. 해녀는 제주만의 고유한 직업이다. 대대손손 물질로 삶을 꾸려온 사람들은 그 체계에 낯선 이들이 합세하는 걸 원치 않는다. 섣부르게 외지인을 허락할 경우 그 지속성이 통제 불가능한 것이 될지 모른단 공포가 해녀들에게 있다. 바다를 유일한 자산으로 삼고 살아온 이들이 ‘뭣이 중한지 모르는’ 이들과 자신의 전부를 공유하길 바라는 건 어쩌면 지나친 욕심일지 모른다.

특유의 ‘괸당’ 문화가 있는 제주의 마을은 강고한 배타성 안에 존재하고, 외지인은 맴돌다 떠날 뿐이다. 이 부부 역시 해녀학교로 대변되는 행정력의 도움을 얻긴 했지만, 마을 정주까지는 꽤 오랜 시간 맹렬히 맴돌았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마을 없는 해녀는 없다 </font></font>
제주 사회에서 해녀는 예나 지금이나 강인한 생활력으로 ‘근원적 축적’을 담당하고 있다.

제주 사회에서 해녀는 예나 지금이나 강인한 생활력으로 ‘근원적 축적’을 담당하고 있다.

그래서 전소영씨가 해녀라고 불리는 건 정말 예외적인 경우다. 해녀학교 출신 가운데 젊은 해녀들이 몇몇 마을에서 물질을 했지만 너무 힘들어 곧 그만두거나 사고(?)를 일으키고 배제당했다. 지금도 전씨는 해녀 정체성을 앞세우지 않고 그저 “운이 좋았다”고 말할 뿐이다. 해녀가 될 수 있었던 까닭은 두말없이 “마을에서 받아주었기 때문”이고 여전히 “마을에 받아들여지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전씨와 비슷한 무렵 마을에 왔던 또 다른 해녀학교 출신 외지인은 쫓겨나다시피 그만두었다. 해녀 사회는 힘든 노동을 오래 함께하며 때론 경쟁하고 결정적 순간엔 협력해야 하는 집단이다. “화를 내일로 삭여두는 법”이 없다. 작업이 고된 만큼 원초적이고 격렬한 토속어가 난무한다.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사는 데 능숙한 도시인들에겐 상처가 되는 커뮤니케이션 방법”이다.

그 화통한 소통에 상처받지 않는 것,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삶’의 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곳이 해녀 사회다. 그래서 남편은 전씨가 처음 “해녀가 되겠다”고 했을 때 완곡하게 반대했다. 그 투박한 질서에 과연 마우스질만 하던 아내가 적응할 수 있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전씨는 서귀포시가 운영하는 해녀학교에서 일을 배웠다. 두 달 과정의 해녀 양성 프로그램이었다. 해녀학교는 해녀의 지속 가능함을 위해 제주시와 서귀포시가 운영하고 있다. ‘체험 과정’과 ‘양성 과정’으로 나뉘는데, 제주에 있는 한수풀해녀학교가 ‘체험’ 위주라면, 서귀포 법환해녀학교는 ‘양성’에 더 많은 비중을 둔다.

전씨가 수료한 법환해녀학교는 2015년 설립돼, 1년에 한 기수씩 졸업생을 배출해왔다. 소라철인 5월부터 성게철인 6월까지 수업을 진행한다. 지금까지 총 26명의 수료자를 배출했고, 이 가운데 10명이 마을에서 해녀질을 시작했다. 이후 지금까지 해녀로 활동하는 수료자는 4~5명 정도다. 수강료는 없지만, 실습을 맡고 있는 어촌계에서 수업할 때마다 1만원의 비용을 낸다. 그 비용으로 슈트, 수경, 태왁(자맥질을 할 때 가슴에 받쳐 몸을 뜨게 하는 뒤웅박, 일종의 튜브)을 빌린다.

여름만 되면 해녀 체험을 하고 싶다는 문의가 빗발칠 정도로 많다고 한다. 도내 거주자와 외지인까지 다양한 학생들이 있는데, 이들이 해녀학교를 다니는 이유는 천차만별이다. 어떤 이는 “해녀학교 수료 간판을 내걸고 해녀 횟집 같은 자영업을 하려”고 해녀학교를 다니기도 한다.

해녀학교를 다녀보면 “졸업한다고 해녀가 될 순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어촌계에서 만난 한 어르신은 해녀가 “배워서 되는 일이 아니”라고 잘라 말했다. 제주도 민속학을 연구해온 주강현 교수는 아예 해녀를 ‘박물관’에 비유한다. ‘고기잡이에도 일정한 정신적 영역이 존재하는데, 해녀는 민속학, 문화인류학, 경제학, 생리학, 여성학의 관점을 가로지르는 문화적 종 다양성의 총체’라는 지적이다. 바다의 특성을 배우고 잠수 이론을 교육하는 것으론 해녀가 수행해야 하는 물리적·정신적 역할을 학습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단 얘기다.

해녀의 물질은 단순하고, 반복적으로 고되다. 수경과 태왁 정도를 제외하면 다른 특별한 기구는 없다. 스쿠버다이빙 슈트보다 훨씬 무겁고 두꺼운 고무옷을 입은 채 오로지 제 근육의 움직임과 호흡만으로 물살을 헤치며 생사를 넘나든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언젠가” 했던 물질이 직업이 되다</font></font>

가까운 바다에 헤엄쳐 나가는 것을 ‘갓물질’, 배를 타고 깊은 바다로 나가는 것을 ‘뱃물질’이라고 하는데 하는 일은 비슷하다. 짧게는 1분에서 길어봐야 3분 남짓, 호흡을 최후까지 미루며 반복적으로 잠수한다. 바위 틈새를 훑어 전복, 성게, 보말 같은 것을 집어올리는 작업은 단순하지만 삶 전체가 그 감각으로 단련돼 있어야만 수행할 수 있는 작업이다.

해녀는 숙련도에 따라 상군·중군·하군 그리고 ‘똥군’으로 나뉜다. 상군은 최대 15m 정도까지 잠수하고 계급에 따라 나머지는 그보다 얕은 물에서 작업한다. 상군이 15m 아래로 잠수하며 눈으로 훑어 채취한다면, 전씨와 같은 똥군은 바위를 만져 채취한다. 이 속도의 차이가 곧 수입의 차이다.

해녀의 물질은 한번 물에 들어가면 5시간씩 계속된다. 물살에 몸살이 나는 시간이다. 작업은 보통 첫 햇살이 찬란해질 무렵 시작한다. 오후에는 해녀들이 잡아올린 물량을 상품으로 만드는 뭍의 일을 해야 한다.

워낙 고된 일이다보니 매일 할 수는 없다. 일이 몰리는 5~6월에는 한 달에 스무 날 정도 하지만 보통은 열흘 남짓이다. 그래서 해녀들의 직업은 여럿이다. 물질을 하지 않는 날에는 밭일을 하는 농사꾼으로 산다. 제주 바닷가 마을의 아낙들은 쉬지 않는다. 제주 속담으로 ‘잠녀는 아기 나뒹 사을이민 물에 든다’(잠녀는 아기 낳고 사흘이면 물에 들어간다)고 하는데 그만큼 해녀는 실체적으로 강인해야 하고, 강인하다.

해녀가 채취해 올린 수산물은 수확량에 따라 해녀 개인 수입이 된다. 내가 전복 3개, 성게 1kg을 잡았으면, 그 금액이 오늘 나의 수입이다. 하지만 물량 전체는 마을 차원에서 관리된다. 그래서 모든 작업은 항상 공동으로 이뤄지고, 마을 어촌계장과 잠수회장이 관련된 모든 권한을 갖는다. 시는 어촌계에 채취 면허를 부여하고, 마을 어촌계 단위로 정해진 바다 면적에 한해 수협과 수산물 납품에 대한 연간 계약을 맺는다.

전소영씨에게 해녀는 그저 막연한 직업이었다. 제주에 내려오고 나서야 “바다를 좋아하니 언젠가 해녀를 할 수 있을까, 한 오십쯤 되면”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러나 우연히 서귀포시에서 운영하는 해녀학교에 1기로 입학했다. 이론을 배우고 해녀 ‘삼춘’들에게 실습을 받았다. 그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케이스로 정식 해녀가 됐다. 이제 초보 해녀 전씨의 스케줄은 전적으로 해녀 삼춘에게 달려 있다. ‘삼춘’은 제주도만의 고유한 명사다. 친·인척이 아니라 성별 구분 없이 윗사람을 두루 삼촌이라 부른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던 선택</font></font>
해녀가 되보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디자이너 전소영(왼쪽)과 도시의 삶이 권태로워 바다를 좋아하기 시작한 조인래(43) 부부는 제주 이주 3년차인 지금 ‘물질’을 하며 살고 있다.

해녀가 되보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디자이너 전소영(왼쪽)과 도시의 삶이 권태로워 바다를 좋아하기 시작한 조인래(43) 부부는 제주 이주 3년차인 지금 ‘물질’을 하며 살고 있다.

전씨는 경남 창원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학교를 다녔다. 꽤 오래 서울살이를 했지만, 이상하게 적응이 안 됐다. “늘 일을 남겨놓고 사는 기분”이 싫었다. 도시가 자신을 “품어주지 않는 것 같았고, 자신도 도시를 품을 마음이 없다”는 걸 알았다. 회사생활이 “재미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도시에서 계속 살지 않겠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다.

기반이 조금 잡힌 뒤에는 떠도는 기분으로 창원, 강원도 춘천 등 도시를 옮겨다녔다. 제주에 오기 전에는 “포털에서 살기 좋은 도시를 검색”해 충동적으로 춘천에서 살았다. 춘천에서도 한참 외곽이었다. 그나마 아침저녁으로 초록 빛깔을 보며 걸으니 좀 행복해졌다.

제주에 오기 전까지 웹과 출판물 디자이너로 15년을 일한 전씨는 춘천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그녀의 운명을 바다로 이끈 전환이었다. 남편 조인래씨는 ‘랄라고고’라는 디자인 회사 대표였다. 사장님과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처음 만나 연애를 시작했고, 함께 바다에 갔다.

남편 조씨는 바다가 좋았다. 시안을 만들고, 클라이언트의 요구를 수행하는 삶이 권태로울 때마다 “물색을 보러 전국의 바다”를 찾았다. 그리고 제주로 이주를 준비하면서는 아예 프리다이빙 강사로 전업했다. 프리다이빙은 호흡 장치를 사용하는 스쿠버다이빙과 달리 “핀(오리발)과 웨이트(무게추)만 달고 수직으로 바다 깊이 내려갔다 올라오는 것”이다. 깊이 내려가는 것을 측정하는 스포츠이지만 “호흡과 평상심을 통해 극단의 몰입감을 경험하는 명상 행위”이기도 하다.

제주 앞바다에서 스노클링하는 것으로 바다에 빠져들었던 조씨는 이제 제주 바다 40m 밑을 노니는 사람이 되었다. 조씨는 제주 바다에 대해 “국내에선 비교할 바다조차 없을 정도로 완벽하다”고 말한다. 제주는 화산섬이라 바다 바닥이 단단한 돌로 이뤄져 수심이 맑다. 남쪽에 있어 어종도 다양하다.

강과 호수의 도시에서 만나 바다에서 삶을 꾸리기까지 이 부부는 6개월 동안 이주 준비를 했다. ‘시내에선 살지 않겠다’는 원칙만 세워두고 주말에 내려와 집들을 봤다. 다행히 그때까지만 해도 서귀포는 아직 ‘이주민 광풍’이 불지 않아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연간 200만원의 ‘연세’로 살 수 있는 농가주택을 구할 수 있었다. 3년 계약을 맺고, 직접 고칠 수 있는 건 스스로 해결했다. 3년째 살고 있지만 대부분의 셀프 수리자들이 그렇듯 아직 다 고치지 못했다. 이주 과정은 의외로 단출했다. 전세금을 찾고, 이삿짐만 꾸려 내려왔다.

서귀포 중산간에 사는 부부는 제주의 삶에서 가장 매력적인 요소로 ‘소리’를 꼽았다. 도시의 삶은 온갖 소리로 점철돼 있다. 듣고 사는 소리 가운데 태반은 원치 않는 소음이다. 제주의 모든 곳이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이 부부가 사는 곳만큼은 그런 소음이 사라진다.

자연스런 소리와 일상이 섞여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부부는 제주에 와서 절감했다. 우리가 흔히 지하철 환승역에서 듣는 소리의 실제가 새소리라는 걸 도시 사람들은 생각조차 못하지만 이 부부는 매일 그 소리를 질리도록 듣는다. 제주의 산은 특히 여러 새소리가 경합하고 어우러지고 흩어지는 공간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오르는 집값, 어려운 다운사이징</font></font>

수입에 대한 걱정은 다른 이주자들에 비해 심각하게 하진 않았다. 회사를 직접 운영하고 있었고, 프리랜서 디자이너였기 때문에 제주에 내려오더라도 어느 정도 버틸 수 있겠거니 생각했다. 서울에서 월 500만~700만원을 벌었던 부부는 제주에 내려와선 한 번도 그만큼 벌어보지 못했다. 부부의 수입은 제주 이주 이전과 비교해 3분의 1 수준으로 떨어졌다.

제주에 내려와서도 “늘 카드값을 고민해야 하는 상황”은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 당연히 소득이 줄 것으로 예상하고 씀씀이를 줄이고 있지만 익숙한 소비와 이별하기란 이주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해녀와 프리다이빙 강사 수입으로만 살 순 없어, 꽤 오랫동안 서울의 일을 수주받아 했다. 그럼에도 어려운 날이 많았다. 이들은 “시골에서 살려면 반드시 텃밭을 가꿔야 한다”고 말한다. 마당에 귤이라도 심으면 더 좋다. 그런 자급자족과 소소한 수입이 삶을 지탱하는 버팀목이 된다.

제주의 물가는 치솟고 있다. 해녀가 엄청난 돈을 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실상 그렇지 않다. 가장 수입이 좋을 때는 5~6월 소라와 성게철이 겹칠 때다. 숙련도에 따라 수입이 달라지긴 하지만 두 달 정도는 월 1천만원 넘는 수익을 올리는 해녀도 있다.

하지만 해녀의 작업은 기본적으로 여럿의 일이다. 해녀가 잡아올린 수산물을 보통 서너 명의 가족이 달라붙어 손질한다. 전씨가 해녀가 되면서 남편 역시 마을의 일꾼이 됐다. 해녀의 물질이 끝나면 조씨의 작업도 시작된다. 그 시간과 인력의 비용을 감안하면 해녀 수입이란 건 도시 기준으로 “인건비를 버는 수준”이다. 물론 전씨 같은 초보 해녀들의 수입은 더 적다. 전씨는 하루 종일 물질하고 몇만원을 쥐어본 적도 허다하다.

그럼에도 이 부부가 제주살이를 버텨낼 수 있는 건 디자이너라는 직업 특성상 제주에서도 서울의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주에 내려오고 일감이 줄긴 했지만 2년 가까이 서울에서 발주받은 디자인 작업이 꾸준히 이어졌다. 질 좋은 일자리가 많지 않다는 것은 매월 1만 명 이상 이주자가 발생하는 제주의 당면한 고민이다. 전씨 부부처럼 제주에 내려와서도 서울의 일을 하청받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런 행운의 직종은 많지 않다.

<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50%" align="right"><tr><td height="22px"></td></tr><tr><td bgcolor="#ffffff" style="padding: 4px;"><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 bgcolor="#ffffff"><tr><td class="news_text02" style="padding:10px">
<font size="4"><i><font color="#991900">결국, 제주 이주의 가장 큰 관건 중 하나는 수입 감소로 인한 생활의 다운사이징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최근 들어 땅값이 오르고 주거비가 폭발적으로 오르면서 이 문제는 더 심란해졌다.</font></i></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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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제주 이주의 가장 큰 관건 중 하나는 수입 감소로 인한 생활의 ‘다운사이징’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최근 들어 땅값이 오르고 주거비가 폭발적으로 오르면서 이 문제는 더 심각해졌다.

전씨 부부 역시 위기라면 위기 상황이다. 3년 계약으로 살고 있는 연셋집에서 곧 나가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다. 지금 살고 있는 수준의 농가주택 연세는 이미 500만원을 넘어섰다. “마음 같아서는 조그만 땅을 사서 컨테이너 집이라도 짓고 싶”지만 여의치 않다. 제주도 전역의 땅값은 이미 무리해서 살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이주자가 늘어나 땅값이 오른다고 타박하던 원주민들 역시 이제는 오르는 땅값에 편승하려는 욕구로 꿈틀댄다. 투기를 노리는 이주자도 늘고 있다. 제주시의 몇몇 아파트는 평당 3천만원에 육박하고, 서귀포시 역시 혁신도시가 들어서고 중국 자본이 진출하면서 신서귀포 지역의 경우 30평대 아파트 매매가가 5억원을 바라본다.

비상식적인 상황이다. 도시의 논리에서 내려서기 위해 제주에 온 이들에겐 재앙 같은 일이다. 제주는 더 이상 유토피아적 면모로만 점철된 공간이 아니다. 이미 어떤 면에선 디스토피아적 징후를 띠기 시작했다. 전씨는 그 양상에 대해 “도시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시골의 삶을 불편으로 받아들이며 뜯어고치려 한다”고 말한다.

예컨대 아이들을 “사교육에서 해방시켜주겠다는 선의를 갖고 내려와서는 교육의 열악함을 탓하며 제주 교육에 대치동 학원가를 입히는 꼴”이다. 그 모든 건 도시의 논리대로 비용으로 치환된다. 전씨 부부는 “불편한 것은 불편함 그대로 받아들이고 스며들어 살아야 하는데 그게 싫으니 제주를 서울처럼 바꾸려는 사람들이 제주를 파괴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위기’를 ‘포인트’라 여기는 오인</font></font>

부부는 종종 서귀포시 대정읍 영락리로 돌고래를 보러 간다. 마음 내키면 언제든 제주 바다에서 펄떡이는 돌고래떼를 보러 갈 수 있는 인생. 어떻게 설명하든 낭만적 일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 바닷속에 들어가보면 상황은 사뭇 다르다. 그 바다에 돌고래가 모여드는 건 주변 광어 양식장에서 배출하는 부유물 때문이다. 뿌연 바다를 부유하는 물고기떼. 정확히 말하면 그건 ‘위기’인데 도시 사람들은 거길 ‘(다이빙) 포인트’라고 부른다.

이 부부의 삶을 품은 제주도 그런 혼돈 속에 있는지 모른다. 부부는 자유로움을 찾아 제주에 왔지만 군대만큼이나 강고한 해녀 사회의 규율과 차 번호를 기억할 정도로 예민한 ‘평판 사회’ 속에 스스로를 맞춰가고 있다. 그 견딤에 적응하는 게 행복의 진짜 얼굴인지 아닌지 기자는 판단하기 어려웠다.

‘꽃해녀’라고 불리는 초보 해녀 전씨의 꿈은 “도시의 독거 노인이 아닌 시골 할머니로 늙는 것”이라고 했다. 이 부부의 행복을 이 지면에 모두 담을 수는 없을 것이다. 삶은 이해되지 않는 선택과 미지의 대목에서 빛나고, 부부는 제주살이에 충분히 만족해 보였다. 인터뷰를 마치고 떠나는 부부의 표정은 넘실대는 망장포 앞바다를 닮아 있었다.

김완 기자 funnyb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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