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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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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부산·경남에서 다시 움튼 야성, 1990년 3당 합당부터 4·13 총선까지 PK 투표 성향의 변화
등록 2016-04-26 19:44 수정 2020-05-03 04:28
제20대 국회의원선거(총선) 이튿날인 4월14일 여당 강세 지역인 부산에서 극적으로 승리한 더불어민주당 소속 5명의 당선자가 부산 중구의 충혼탑을 참배한 뒤 시민들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해영(연제), 박재호(남을), 김영춘(부산진갑), 최인호(사하갑), 전재수(북·강서갑) 당선자. 연합뉴스

제20대 국회의원선거(총선) 이튿날인 4월14일 여당 강세 지역인 부산에서 극적으로 승리한 더불어민주당 소속 5명의 당선자가 부산 중구의 충혼탑을 참배한 뒤 시민들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해영(연제), 박재호(남을), 김영춘(부산진갑), 최인호(사하갑), 전재수(북·강서갑) 당선자. 연합뉴스

“이번 총선에서 패배가 가장 뼈아픈 곳은 수도권도 TK(대구·경북)도 아닌, PK(부산·울산·경남)다. PK에서 야성이 살아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새누리당 당직자가 4·13 국회의원선거(총선) 결과를 두고 한 말이다. 4년 전 총선 당시 부산·울산·경남(총 40석)에서 단 3석만 잃었던 새누리당은 이번에 11석을 야권에 내줬다. 새누리당 입장에선, 지금의 ‘영남 대 호남’ 선거 구도가 만들어진 1990년 이후 최악의 성적표다. 심지어 비례대표 의석을 나누는 기준이 되는 정당득표율만 놓고 보면, 새누리당(40.63%)은 26년 만에 처음으로 부산·울산·경남에서 야권(51.28%)에 졌다. 지금 PK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강한 야성만큼 강했던 친여 성향

애초 부산·경남(울산은 1997년 직할시로 승격)은 보수 정당과는 거리가 멀었다. 박정희·전두환 군사독재 시절 반유신·반독재 투쟁을 이끈 김영삼을 품었던 부산·경남은 ‘민주화의 성지’라 불렸다. 특히 김영삼이 국회의원 9선 가운데 7선을 했던 부산은 야당 투사를 키워낸 ‘야당의 도시’(야도)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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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경남의 극적인 변화는 1990년 3당 합당에서 시작됐다. 1990년 1월22일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는 노태우 대통령,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총재와 나란히 서서 3당 합당과 민주자유당 창당을 발표했다. 1988년 총선에서 경쟁자인 김대중이 이끄는 평화민주당에 제1야당 자리를 빼앗긴 김영삼 총재가 당시 여소야대 지형에 불안을 느끼던 노태우 대통령과 손을 잡은 결과였다. 졸지에 TK(민주정의당), 충청권(신민주공화당)과 함께 ‘보수 대연합’을 이루게 된 PK(통일민주당)는 비호남 대 호남 지역 구도 고착, 보수의 기형적 우위 등에 대한 비판이 일 때마다 그 과녁의 중심에 서게 된다.

그런데도 부산·경남은 똘똘 뭉쳤다. 1992년 총선에서 부산은 16석 중 15석을 집권여당인 민자당에 몰아줬다. 나머지 1석도 무소속으로 출마한 김영삼의 최측근 서석재 전 통일민주당 사무총장에게 안겨줬다. 4년 전 총선에서 ‘여 1석, 야 14석’으로 강한 야성을 보였던 부산의 ‘변신’이었다. 민심을 거스른 3당 합당의 역풍으로 민자당 의석은 전국적으로 194석에서 149석으로 쪼그라들었는데 부산·경남에선 정반대의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같은 해 치러진 대선에서도 부산은 김영삼 민자당 후보에게 73.34%(전국 평균 41.96%), 경남은 72.31%의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다. 김영삼은 결국 14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차재권 부경대 교수(정치외교학)는 “당시 PK는 엄밀하게 말하면 민주화의 성지가 아니라 민주화 투사였던 김영삼을 위한 성지였다”며 “3당 합당을 전후로 부산의 표심이 야당에서 여당으로 완전히 돌아선 것은, (유권자 선택이) 이념 문제보다는 ‘YS에 대한 높은 충성’에서 나왔다고 설명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1990년대 말까지 부산·경남의 여당 독주 체제는 더 강화됐다. 문민정부의 체제 안정을 뒷받침하는 동시에 호남·진보 세력의 지지를 받는 김대중의 대권을 견제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영향이 컸다. 1995년 첫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이 전국적인 승리를 이뤘지만, 유독 부산에선 3당 합당을 비판하며 김영삼과의 결별을 선언했던 노무현 민주당 후보(37.58%)가 낙선했다. 경남에선 민주당이 후보도 내지 못했다. 대선을 앞두고 정계 복귀한 김대중이 이끌었던 이듬해 총선 결과는 더 박했다. 야권은 부산(21석)에서 단 1석도 차지하지 못했다. 경남(23석)에선 겨우 3석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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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2007년에 고점 찍은 여야 격차

부산·경남의 친여 투표 성향은 정권 교체 가능성이 높아지던 1997년 대통령선거(대선)에서 정점에 이른다. 이회창 한나라당(옛 신한국당) 후보와 신한국당 경선에 불복해 국민신당을 만든 이인제 후보가 얻은 득표율 합계는 부산 83.11%, 경남 86.44%에 달한다. 반면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후보에게 간 득표는 부산 15.28%, 경남 11.04%에 그쳤다. 김대중이 DJP 연합을 통해 충청을 끌어들이지 않았더라면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운 승부였다. 국민의 정부 들어 치러진 1998년 지방선거와 2000년 총선에서도 부산·경남은 ‘여 9 대 야 1’의 극단적으로 기울어진 투표 행태를 보였다.

2002년 대선부터 다시 한번 변화의 조짐이 일었다. 호남·진보 세력 기반의 새천년민주당 소속인 노무현 후보는 부산에서 29.85%, 경남에서 27.08%의 표를 얻었다. 경쟁자인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의 득표율(66~67%)에는 크게 못 미쳤지만 5년 전 김대중 후보가 얻었던 득표율보다 2~3배 높은 지지였다. 영남 출신 후보를 지지한 세력과 변화를 바라던 민주개혁 세력이 힘을 합친 영향이 컸다. 호남의 몰표와 TK·PK의 균열로 결국 노무현 후보는 대선에서 승리했다.

보수세력이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밀어붙였던 2004년에도 부산·울산·경남은 들썩였다. 부산은 총선에서 노무현 대선 캠프 출신인 열린우리당 소속 조경태 후보(사하을)를 당선시켰다. 소선거구제가 도입된 1988년 이후 처음으로 호남 지역의 지지를 바탕에 둔 정당의 후보가 부산에 깃발을 꽂은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과 인연이 있는 열린우리당 소속 박재호 후보(남을)와 최인호 후보(해운대·기장갑)도 40% 중반 득표를 올리며 선전했다. 경남·울산에선 열린우리당 김맹곤(김해갑)·최철국(김해을)·강길부(울산 울주) 후보, 민주노동당 권영길(창원을)·조승수(울산 북구) 후보 등 모두 5석을 야권이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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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변화 조짐은 이내 사그라들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인기 하락과 함께 부산·울산·경남에서 ‘변화의 바람’도 시들해졌다. 2007년 대선에선 여야 간 격차가 다시 크게 벌어졌다. 호남 출신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후보가 부산에서 얻은 득표율은 13.45%로, 10년 전 김대중 후보가 얻었던 지지율 수준으로 뚝 떨어졌다. 이회창 무소속 후보(19.68%)가 영남·보수의 표를 갈랐지만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는 57.9%의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

울산과 경남도 비슷했다. TK와 PK의 연대에 힘입어 이명박 후보는 전체 500만 표 이상의 엄청난 차이로 10년 만에 보수정권 교체를 이뤄냈다. 이듬해 총선도 한나라당의 승리로 끝났다. 부산·울산·경남(총 41석)에서 야권 의석은 6석에서 4석으로 줄어들었다. 농민 출신 강기갑 민주노동당 후보(경남 사천)의 당선이 야권에는 거의 유일한 성과였다.

반MB 정서가 다시 야성 불러

균열은 2010년 다시 시작됐다. 노골적으로 TK를 챙기던 MB 정부에 소외감을 느끼던 부산·울산·경남에선 반한나라당 정서와 함께 변화에 대한 갈망이 싹트고 있었다. 이런 정서를 파고든 야권 단일후보인 무소속 김두관 후보는 이달곤 한나라당 후보를 꺾고 경남지사에 당선됐다. 세 번의 도전 끝에 얻어낸 ‘첫 야권 경남지사’ 타이틀이었다. 부산시장 선거에선 김정길 민주당 후보가 2위(44.57%)를 했지만 한나라당을 턱밑까지 쫓아갔다.

2년 뒤 총선에선 부산·울산·경남(총 40석)은 민주통합당의 문재인(부산 사상), 조경태(부산 사하을), 민홍철(경남 김해갑) 3명에게만 의석을 내줬다. 그래도 변화의 힘은 쌓여갔다. 부산의 김영춘(부산진갑), 박재호(남을), 전재수(북·강서갑), 문성근(북·강서을), 최인호(사하갑) 후보와 경남의 김경수(김해을), 송인배(양산) 후보 등 새누리당 후보와의 격차가 10%포인트 이내인 야권 후보가 속출했다. 정당득표율에선 야권이 40.2%나 얻었다. 중앙당의 별다른 지원 없이도 개별 후보들이 몇 년씩 지역을 홀로 누비면서 민심을 두드린 결과였다.


<i>“TK의 선거 결과에는 김부겸이라는 개인 변수가 컸던 반면 PK의 선거 결과에는 개별 후보의 성실성과 함께 그동안 쌓여온 유권자의 지형 변화가 반영된 것 같다.” -김태일 영남대 교수</i>

같은 해 대선에서, 영남 출신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는 부산에서 39.87%, 경남에서 36.33%의 득표를 올렸다. 호남·진보 세력 기반의 정당이 PK에서 얻은 최대의 성과였다. 세월호 참사 직후 박근혜 정권 심판론이 들끓던 2014년 지방선거 당시 부산시장 선거에선 야권 단일후보인 무소속 오거돈 후보가 49.34%로 과반에 육박하는 지지를 이끌어냈다. 서병수 새누리당 후보에게 2만 표가량 뒤지는 결과였지만 새누리당 안팎에선 “부산이 심상치 않다”는 우려가 쏟아졌다. 2년 뒤 이번 총선에서, 야권의 ‘PK 승리’를 일시적 바람이 아니라 선거 구도의 변화라고 풀이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김태일 영남대 교수는 “TK의 선거 결과에는 김부겸이라는 개인 변수가 컸던 반면 PK의 선거 결과에는 개별 후보의 성실성과 함께 그동안 쌓여온 유권자의 지형 변화가 반영된 것 같다”고 설명했다.

PK 야권 바람 불붙을까

정치권의 관심은 이제 부산·울산·경남의 변화가 내년 12월 대선까지 이어지느냐로 모아지고 있다. 2002년, 2012년 두 차례 대선 결과에 비춰 새누리당의 ‘TK-PK 균열’을 가속화하려면 PK 출신 후보를 내세워야 한다는 주장도 일부 야권에서 나온다.

이지호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야권이 이번에 부산·울산·경남에서 외연을 확장했고 그것은 내년 대선에서 굉장히 유리한 환경이 된다”며 “야권에서 PK 인물이 나온다면 (야권 바람에) 불이 확 붙는 경향이 나타날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김태일 교수는 “2002년, 2012년에는 PK 후보라는 인물 요인 외에 2008년과 달리 민주개혁 세력이 전면적으로 총동원됐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인물만큼 야권이 세력을 어떻게 총결집하느냐도 중요하다”며 ‘PK 후보론’에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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