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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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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묘하고 계산된 말 “확신한다”

정은주 기자 고소하고 문재인 대표에게 고소당한 두 건의 명예훼손… 보도는 단죄하려 들면서 근거 없는 낙인찍기는 면죄받고자 하는 기묘한 의도
등록 2015-10-12 21:56 수정 2020-05-02 07:17

고영주 방송문화진흥회(방문진) 이사장은 여러 논란의 와중에도 몇몇 송사를 진행하고 있다.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 고영주 방문진 이사장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기 두 달 전, 고 이사장은 나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나는 지난 9월14일 서울 공덕동 서울서부지검에서 피의자로 조사를 받았다. 고 이사장은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에서 피의자로 조사받을 예정이다.
국감장에서 재조명받은 고소 건
고 이사장이 나를 고소한 이유는 지난 7월에 쓴 기사 ‘검찰, 질긴 악연 민변을 정조준하다’(제1069호 이슈추적) 때문이다. 현행 변호사법 제31조(수임제한) 3항은 “공무원, 조정위원 또는 중재인으로서 직무상 취급한 사건의 수임을 제한한다”고 규정돼 있다. 이를 위반하면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진다.
검찰은 이 법률을 근거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참여했던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변호사들을 수사했다. 나는 ‘표적 수사’ 의혹이 짙다고 지적했다. 과거 교육부 산하 사학분쟁조정위원회(사분위)의 전·현직 위원과 그들이 속한 법무법인(로펌)이 분쟁 사학의 소송을 대리해 2014년 10월 국회 국정감사에서 논란이 됐지만, 검찰은 이를 수사하지 않았다. 2009~2011년 사분위원으로 활동했던 고영주 이사장과 그의 법무법인 케이씨엘이 맡았던 김포대 분쟁 사건도 그중 하나였다. 나는 검찰의 수사가 형평성을 잃었다고 비판했다. 고 이사장은 나를 명예훼손죄로 고소했다.
고소장에는 종북·좌파 세력, 북한 공산집단이라는 표현도 등장한다. “고소인(고영주)이 애국단체 활동을 활발히 하다보니 국내 종북 내지 좌파 세력과 북한 공산집단은 고소인을 음해하기 위해 혈안이 돼 있다. 2014년 10월 국정감사에서 본인 문제가 논란이 된 적이 있다는 사실도 몰랐지만, 그동안에도 종북·좌파 세력들은 본 고소인을 음해·모략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해왔기 때문에, 그들에게서 비난을 받는 것은 애국활동을 했다는 징표라고 자부하며 무시해왔다.”
고 이사장이 나를 고소한 사건은 10월6일 국회 방문진 국정감사에서 재조명을 받았다.
송호창 의원(새정치민주연합) (사분위원) 재임 중에 취급한 사건과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으면 선임하지 않는 등 엄정하게 처신했다고 하지 않았나.
고영주 이사장 네.
송 의원 제43차 사분위 회의록을 보면 (김포대 사건과 관련한) 고 이사장의 발언이 나온다. 기억나나?
고 이사장 기억 안 난다.
송 의원 자신은 전혀 실수를 안 했다고 했는데 왜 사분위에서 다뤘던 (김포대) 문제가 다 나와 있나?
고 이사장 김포대 정상화 과정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송 의원 김포대는 가족 간 분쟁이었다. 계속해서. ( 기자를 고소한 것은) 무고 행위다.

고영주 방송문회진흥회 이사장의 정은주  기자에 대한 고소장을 보면, ‘종북·좌파세력’ ‘북한 공산집단’ 등의 표현이 등장한다(위). 고 이사장이 담당변호사로 참여한 김포대 분쟁 사건의 대법원 판결문.

고영주 방송문회진흥회 이사장의 정은주 기자에 대한 고소장을 보면, ‘종북·좌파세력’ ‘북한 공산집단’ 등의 표현이 등장한다(위). 고 이사장이 담당변호사로 참여한 김포대 분쟁 사건의 대법원 판결문.

명예훼손, ‘사실 적시’와 ‘의견 표명’ 사이

서울지방변호사회는 10월13일 상임이사회를 열어 고 이사장의 김포대 사건 대리가 변호사법 위반인지를 논의한다고 밝혔다. 서울변회 관계자는 “혐의가 유력하다고 판단될 경우 조사위원회에 넘겨 고 이사장의 의견을 듣고 법적 검토를 진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변회는 조사 결과에 따라 대한변호사협회에 징계 개시를 신청할지 결정한다.

나는 명예훼손죄로 처벌받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첫째, 진실한 사실만 보도했고 비방할 목적이 없었다. 둘째, 나머지 기사 내용은 명예훼손의 구성 요건이 아니다. 고 이사장의 소송대리가 변호사법이 제한한 “직무상 취급한 사건의 수임”인지 여부는 ‘의견 표명’일 뿐이기 때문이다. 대법원은 ‘사실의 적시’가 아닌 가치판단이나 평가는 명예훼손죄로 처벌하지 않는다.


고 이사장이 “‘공산주의자’라고 말한 게 아니라 ‘공산주의자로 확신한다’고 말했다”고 반복해 교정하는 이유가 여기 숨어 있다. 말장난처럼 보이지만 고도의 계산이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고 이사장이 “(문재인 대표를) ‘공산주의자’라고 말한 게 아니라 ‘공산주의자로 확신한다’고 말했다”고 반복해 교정하는 이유가 여기 숨어 있다. 말장난처럼 보이지만 고도의 계산이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고영주-정은주의 명예훼손 사건은 문재인-고영주의 사건과 묘하게 겹친다.

문 대표가 고 이사장을 고소한 이유는 고 이사장이 “문 대표를 공산주의자로 확신한다”고 거듭 발언했기 때문이다. 2013년 1월4일 ‘애국시민사회진영 신년 하례회’에서 그랬고, 10월2일과 6일 국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의 방송통신위원회 국정감사 때도 그랬다.

이 발언이 명예훼손으로 인정되려면 첫째 ‘사실을 적시’해야 한다. 단순한 의견 표명은 명예훼손이 아니다. 둘째, 사실을 적시했더라도 그것이 진실이며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으로 비방할 목적이 없었다면 또한 명예훼손이 아니다. 셋째, 만약 허위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진실로 믿을 상당한 이유가 있었고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면 이 역시 명예훼손이 아니다. 각 단계를 넘어갈수록 발언자가 증명해야 할 것이 많아지고 복잡해진다.

고 이사장은 첫 번째 문턱을 넘지 않으려는 전략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공산주의자로 확신한다”는 발언은 명예훼손죄가 적용되는 ‘사실의 적시’가 아니라 ‘의견 표명(평가)’이라고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10월2일 국회의 방문진 국정감사에서 그의 생각이 일부 드러난다.

전병헌 의원(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를 공산주의자라고 말한 사실이 있나.

고영주 이사장 ‘공산주의자’라고 말한 게 아니고 ‘공산주의자라고 확신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 의원 말장난하지 마라.

고 이사장 내가 확신한다는 것과 그 사람을 공산주의자로 규정하는 것은 다르다. 나는 확신한다고 했다.

‘확신한다’로 치명적 공격 일삼을 수도

‘구체적 사실의 적시냐’ ‘단순한 의견 표명이냐’는 명예훼손 사건에서 항상 쟁점으로 떠오른다. ‘주사파’ ‘종북’ 등의 낙인찍기가 때로는 명예훼손으로 인정되고, 때로는 그렇지 않은 이유다. 보수 논객 변희재씨가 이정희 옛 통합진보당 대표를 ‘종북·주사파 조직인 경기동부연합을 추종하는 인물’로 표현했다가 명예훼손에 따른 손해배상 소송을 당한 사건을 보면, 1심과 항소심의 ‘종북’ 판단이 달랐다. 1심에서는 ‘종북’이 상황에 따라 다의적으로 사용된다고 봤다. “단순한 의견 표명인지, 구체적 사실의 적시인지는 문맥과 배경 등을 고려해 판단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반면 항소심은 종북을 “친북과는 다른 부정적이고 치명적인 용어”라고 좀더 강하게 해석했다.

검찰은 ‘행위의 불법성’을 더 따진다. 이재명 성남시장과 김성환 서울 노원구청장을 ‘종북 성향 지방자치단체장’으로 표현했다가 명예훼손죄로 고소당한 정미홍 정의실현국민연대 대표는 검찰에서 “단순한 의견 표명”이라고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문재인 대표를 공산주의자로 확신한다”는 고 이사장의 발언이 구체적 사실의 적시인지 단순한 의견 표명인지를 두고 법률적 다툼이 치열할 것이다. “확신한다”는 자신의 표현에 대해 고 이사장은 ‘의견 표명’이었다고 주장할 것으로 보인다. 의견 표명이라고 인정되면 고 이사장은 자신의 발언이 진실이라는 걸 증명하지 않고도 면죄부를 받을 수 있다. 그 길을 따라 여러 사람들이 ‘확신한다’고 공언하며 ‘부정적이고 치명적’인 공격을 일삼을 수도 있다. 객관적 근거로 진실을 보도하는 행위를 단죄하려 들면서, 근거 없는 낙인찍기는 면죄받고자 하는 기묘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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