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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제처럼 공허한 중심”

후지이 다케시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의 한국역사 진단… “박근혜 정권은 상징성 말고 뚜렷한 노선 없는 한국 보수의 집대성, 롤랑 바르트가 말한 ‘공허한 중심’”
등록 2015-08-12 15:45 수정 2020-05-03 04:28

이런 시가 있다. “이것이 아닌 다른 것을 갖고 싶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 괴로움/ 외로움/ 그리움/ 내 청춘의 영원한 트라이앵글.”(최승자, ‘내 청춘의 영원한’) 트라이앵글 소리는 어떨까. 정삼각형으로 구부러진 강철에서는 어떤 소리가 나는가. 그 소리는 하나인가 여럿인가. 하나로 획정할 수 있을까. 그리 못할 것이다.
역사가 그러하지 않을까. 역사에 ‘정본’이 있는가. 국정교과서가 유일한 역사일 수 있을까. 차라리 역사는 수많은 가능성의 총체이지 않을까. 그것은 시인이 말한바, 다른 것을 갖고 싶고 다른 곳으로 가고 싶은,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 아닐까. 과거와 현재를 잇는 수많은 타래를 한 가닥 한 가닥 대면하고 곱씹고 드러내고 기억하는 것 아닌가. 그것을 일러 역사적 진실이라고 하는 것 아닐까. “이승만을 국부의 자리에 앉혀야 한다”는 말은 정상배의 헛소리이자 역사에 분뇨를 뿌리는 짓이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역사를 바로 세우려는 게 아니라 역사를 빌미로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역대급 교언영색’ 아닌가.

후지이 다케시는 인터뷰 내내 ‘새로운 사회를 향한 가능성’을 강조했다. 수많은 가능성이 존재했던 해방 공간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김진수 기자

후지이 다케시는 인터뷰 내내 ‘새로운 사회를 향한 가능성’을 강조했다. 수많은 가능성이 존재했던 해방 공간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김진수 기자

8월5일 서울 동대문구에 있는 역사문제연구소에서 후지이 다케시(43·성균관대 사학과 연구교수)를 만났다. 그는 2013년 2월부터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을 맡고 있다. 2000년 한국에 온 뒤 성균관대에서 조선민족청년단(족청)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어지간한 한국인은 그보다 글을 못 쓴다. 그를 만난 이들은 한결같이 그의 한국어 실력에 놀란다. 그 앞에서 한국 근현대사 지식을 늘어놓는 건, 파장 무렵 어물처럼 초라해지기 쉽다.

그에게 물었다. “박근혜 정부의 정체는 무엇인가요?” “독재죠.” 그는 프랑스의 구조주의 문예비평가 롤랑 바르트를 얘기했다. 바르트는 일본을 여행한 뒤 (1970)을 펴냈다. 그 책에서 바르트는 일왕을 일러 “공허한 중심”이라고 갈파했다. 박근혜 대통령 또한 그러하다는 설명이다. 즉문했다. “겉으로는 민주정부를 표방하고 있는데요?” 즉답이다. “누가 봐도 민주주의 안 하고 있잖아요.”

대만의 광복은 10월25일 광복 70주년이라며 정부에서 8월14일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했다.

광복이라는 말을 써야 하는지 의문이다. 국가 중심의 발상이기 때문이다. 해방이라고 하는 게 좋다. 중요한 것은 그날 일제 지배에서 풀려난 사실이다. 해방이라는 개념은 국가 중심이 아니라 개개인의 삶까지 포함한 차원에서 이야기할 수 있도록 한다. 대만의 경우 한국의 광복절에 해당하는 게 8월15일이 아니라 10월25일이다. 중화민국의 장제스 군이 들어온 날이다. 예전부터 우파 쪽에서는 광복이라는 말을 썼다. 이미 있는 국가나 민족의 부활이라는 프레임을 통해 우리가 직접 새로운 사회를 만들 가능성을 차단하려는 것이었다. 제국주의 지배에서 벗어났으니 이제 어떤 사회를 만드느냐가 중요한 문제가 되었는데, 그때 핵심은 누가 그 주체가 되느냐였다.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새로운 주체가 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광복보다 해방이 적절할 것이다.

지난해 8월15일 서울 여의도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린 건국절 기념식. 광복절을 건국절로 삼자는 이들의 속셈은 무엇인가. 한겨레 이정우 선임기자

지난해 8월15일 서울 여의도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린 건국절 기념식. 광복절을 건국절로 삼자는 이들의 속셈은 무엇인가. 한겨레 이정우 선임기자

예전 한 인터뷰에서 뉴라이트에 견줘 ‘올드라이트’라는 표현을 썼다.

요새는 올드라이트 노선도 폐기한 것 같다. 박근혜 정권 초기에는 약간 민족주의적인 모습도 있었다. 이명박 정부와 달라야 하니까. 그런데 이제는 아예 역사를 안 건드리는 방향으로 가는 것 같다. 한국 근현대사를 제대로 가르치면 민족의 문제가 나올 수밖에 없고, 그러면 지배와 저항이라는 관점이 중심이 된다. 그렇게 되면 박근혜 정권의 약점인 친일이나 독재의 문제도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것을 피하기 위해 근현대사는 되도록 가르치지 않으려고 하는 듯하다. 지금이 국민을 조직적으로 동원하는 시대가 아니라는 것도 큰 작용을 하는 것 같다. 1970년대에는 산업전사라는 말처럼 조국과 민족을 위해 죽을 수도 있는 사람을 만들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인간형을 만드는 데 민족주의가 중요했다. 지금은 금융자본이 자본 축적의 핵심이다. 금융자본이 증식하는 데 노동력은 중요하지 않다. 돈 빌리고 갚는 사람만 있으면 되는 것이고, 어떤 인간형을 굳이 공들여 만들 필요도 없는 것이다. 국민이나 민족으로 호명해서 동원하는 방식이 폐기된 상황에 가깝고, 어찌 보면 역사가 필요 없는 시대가 됐다고 볼 수도 있다.

그래도 시민들 입장에서는 역사가 필요할 텐데.

그렇다. 다른 대안을 생각할 때 역사에서 배울 수 있는 부분이 많다. 독립운동에도 다양한 노선이 있었다. 단순히 목숨 바쳐 싸웠다는 게 아니라 새로운 사회를 위한 어떤 모색이 존재했는지 생각할 수 있다.

최근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미국에 가서 ‘이승만을 국부의 자리에 앉혀야 한다’는 식의 발언을 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이승만을 국부로 만들려는 시도는 1950년대 중·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1955년이 이승만이 80살이 된 해다. 서울 남산에 동상도 세우고 신격화하는 수준까지 갔다. 지금 이승만을 대단한 사람이라고 말할 때, 그것을 통해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지 봐야 한다. 이승만에 대한 평가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들에게 무슨 이익이 생길까, 그것을 통해 무엇을 가리려고 할까를 봐야 한다. 한국의 제헌헌법은 대통령 중심제가 아니라 국무원 중심제였다. 대통령도 국무위원의 한 명이었고 대통령이라고 해서 혼자 무엇을 결정할 수 없도록 돼 있었다. 그런데 당시 국무회의록을 보면, 이승만은 1949년 3월부터 헌법을 무시해 자신이 결재하지 않은 국무회의 결의는 무효라고 선언하고 있다. 헌정 초기부터 이승만은 헌법을 위배하면서 자기 권력을 절대화했다.

이승만이 국무총리제를 없앤 이유‘내가 대통령이니 국회의원도 내 뜻대로 한다’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1950년대 중반까지 이승만은 국회와 갈등이 많았다. 박근혜 정권과 비슷한 대목이 있다. 국무총리를 지명할 때마다 인준이 안 되는 거다. 그래서 이승만은 1954년 개헌 때 국무총리제를 아예 없애버렸다.


<i>“한국의 제헌헌법은 대통령 중심제가 아니라 국무원 중심제였다. 대통령도 국무위원의 한 명이었고 대통령이라고 해서 혼자 무엇을 결정할 수 없도록 돼 있었다. 그런데 이승만은 1949년 3월부터 헌법을 무시해 자신이 결재하지 않은 국무회의 결의는 무효라고 선언하고 있다.”</i>
이승만 정권의 긍정적인 측면은 없나.

항상 이승만 정권의 치적으로 언급되는 게 학교를 많이 세워 의무교육을 시행했다든가 현재 한국 사회의 기초가 된 부분이 주를 이룬다. 그러나 그것이 이승만 때문에 그런 것인가. 그것은 한국 사회의 성과다.

친일 청산 문제가 해마다 반복적으로 언급된다.

친일파가 왜 문제인지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일본과 가까웠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 지배에 협력했다는 것이 문제다. 친일 문제는 결국 권력의 문제와 연결된다. 막연한 이미지로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 제국이 어떻게 굴러갔고 거기서 친일파는 어떤 위치에서 무엇을 했는지, 디테일한 상상력을 가지고 생각하지 않으면 쉽게 반박당할 수 있다.

어쩔 수 없이 그랬다는 ‘친일 불가피론’도 있다.

그들이 일제에 저항할 수 없었다는 논리는, 사실 지금 권력에 저항할 수 없다는 의식과 연결되어 있다. 권력에 순응해야 한다는 논리가 친일 행위를 정당화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친일에 대해 생각한다면, 개개인의 선택이라든지 구체적 상황에서 봐야 한다. 그래야 그런 권력에 어떻게 저항할지 생각할 수 있고, 현재의 권력에 저항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저항 가능성이다. 항상 대안이 없다는 인식에서 친일을 정당화하고 독재를 미화하는 행위가 비롯된다. 다른 가능성이 없다면, 절망적인 상황을 미화라도 하지 않으면 견디기 힘든 게 인간의 심성이다. 이승만이나 박정희를 훌륭한 지도자로 치켜세우려는 이들은 이런 심성을 이용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저항이 가능하다는,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다.

친일·부역한 사람들이 여전히 사회·경제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있다.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은 저평가되어 있고.

민족 문제가 결국 계급 문제라는 걸 보여주는 거다. 한국 사회에서 사회주의라는 게 긍정적으로 안 쓰이고 학교에서도 그렇게 안 가르친다. 사회주의가 무엇인지 제대로 배운 학생이 없는 거다. 예전 반공교육이랑 요즘 하는 게 비슷하다. 연평해전·천안함에 대한 글을 쓰게 하고. 학교 반공교육이 다시 심해지고 있다. 편향된 이념교육을 하니까 제대로 보기 힘들게 된다. 역사의식이라는 게 없어질 수밖에 없다.

누가 봐도 민주주의 안 하고 있잖나역사의식을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있나.

모든 것은 변한다, 모든 것에는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라는 인식을 갖는 게 역사의식이다. 역사를 배운다는 것은 그때가 과도기였다는 걸 아는 거다. 항상 기로에 있는 것이다. 다양한 선택의 총체가 역사라는 걸 알아야 하고 역사교육은 그걸 배우는 것이다.

해방 이후 70년간 민주주의·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교육은 어떤가.

민주주의에 대해서 말하자면, 우선 각자가 주권자로서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교육하지 않는 것이 큰 문제다. 자신이 속한 국가와 사회를 유지하는 것만 중요하게 가르친다. 이는 아까 얘기한 역사가 폐기되는 문제와도 관련되는데, 새 사회를 만들 수 있는 주체로 학생을 적극적으로 키우기보다는 ‘애국심’과 같은 잣대로 통제하는 방향으로 가려는 듯하다.

박근혜 정부의 정체는 무엇인가.

독재다.

겉으로는 민주정부를 표방하고 있는데.

누가 봐도 민주주의를 안 하고 있다. 그런데 중요한 건 박근혜가 무능하기 때문에 대통령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무능한 사람을 위에 모셔놓으면 밑에서 해먹을 수 있는 여지가 많이 생긴다. 새누리당이 박근혜를 떠받드는 이유다. 유능하면 밑에 있는 사람 입장에서는 괜히 골치 아프다. 이명박과 박근혜의 관계는 전두환과 노태우의 관계와 비슷하다. 이명박은 ‘디테일 리’라고 불린 것처럼 세세한 것에도 신경을 썼지만 박근혜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밑에서 부정부패하기에는 좋은 지도자다.

이명박보다 박근혜가 더 무능하다는 말인가.

그렇다. 어떻게 보면 텅 비어 있는 존재다. 그렇기에 아무거나 집어넣을 수 있다. 박근혜를 지지하는 세력을 보면 한국 보수의 집대성이다. 상징성 말고는 뚜렷한 노선도 없고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오히려 다양한 사람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말하자면 ‘상징 대통령제’ 같은 것이다. 일본 천황제도 어떻게 보면 텅 비어 있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통합 기능을 할 수 있다. 롤랑 바르트가 이를 두고 ‘공허한 중심’이라고 표현했는데, 박근혜라는 기호의 기능도 비슷한 것 같다. 툭하면 외국 나가서 패션쇼 하는 것도 천황 역할과 비슷하다.

예쁘고 쾌적한 감옥을 위하여70년 전 해방 공간에는 수많은 가능성이 존재했었다.

그렇다. 그런데 해방 직후에 대한 교육을 안 하려고 한다. 그런 가능성이 우리에게도 있다는 걸 가르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아무런 선택지도 없다고 교육하고 싶어서다. 대안이 없다고 생각하도록 하고 상상력을 제한한다. 지금 사회에 불만을 가져봤자 좋을 일 없다는 식이다. ‘헬조선’이라고까지 불리는 감옥 같은 사회에서 살아야만 한다면, 이 감옥을 예쁘고 쾌적한 것으로 생각해야 위안을 얻을 수 있다. 그러니 대한민국이 이렇게 훌륭하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밑바탕에는 이 사회를 바꿀 수 없다는 절망이 깔려 있다는 것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전진식 기자 seek16@hani.co.kr
이지민 교육연수생 aaaa346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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