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부터 들어왔지만, 언제나 이해할 수 없었다. 예컨대 10여 년 전 그분이 커터칼 테러 사건을 당하고 내뱉었다는 그 유명한 “대전은요?” 같은 말을 생각해보자. ‘대전’은 동구·중구·서구·유성구·대덕구로 이루어져 있으며, 한밭수목원·엑스포과학공원·계족산·유성온천·오월드 등을 명소로 하며, 최근에는 튀김소보루빵으로 명성을 떨치기도 하는, 위도 36도·경도 127도에 놓인 대한민국의 한 광역시일 뿐이다. 하지만 그 말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누군가들이 끊임없이 말했)다.
언론, 없는 뜻을 낚아채는 허공의 ‘강태공’어떤 이들에게 그 ‘대전’은 ‘선거 승리’라고 하는 정치인으로서의 가장 절대적인 ‘신념’과, 신체에 대한 직접 위해와 같은 극단의 위기가 닥치더라도 ‘사명감’을 놓지 않는 강건한 성품이 그야말로 유기적으로 결부된 신화적 외침이라고 했다. 그 한마디에 그분을 관통하는 개인사 전부가 소환되었고, 그 개인사의 슬픔과 처연함은 그야말로 풍부한 감동을 갖춘 서사시가 되어 언론을 풍요롭게 장식했다.
그분은 그렇게 복도에서, 그저 한마디 말로, 어떤 때는 그마저도 없이 패션만으로, 대한민국 역사상 그 누구도 이뤄보지 못한 신기루의 정치적 수련을 해오셨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복잡한 맥락과 정치적 함의를 담아 ‘대연정’을 제안했을 때, 당시 야당 대표였던 그분은 “참 나쁜 대통령”이라고 딱 한마디 하셨다. 지난 대선 TV토론에서 보편적 복지와 국가 세수의 상관관계를 따져물으며 ‘증세 없는 복지’의 허구적 함수관계를 추궁당했을 때도 “대통령이 되면 하겠다”는 일관된 말씀을 남기셨다.
지난 10년간의 여의도 정치를 복기해보면, 분명 한 축의 흐름은 그분의 그 간략한 말, 저잣거리의 누군가가 했더라면 그 의미가 너무 모호하고 불분명해 기억조차 해내지 못할 읊조림 같은 것들을 해석하고 또 해석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정 해석이 안 되면 아예 새로운 의미를 ‘창조’해내고, 그 한마디의 기원과 역사를 거의 ‘신화’처럼 써내려간 정치적 훈고학의 연속이었다. 한국 사회 각 부문, 분야에서 방귀 좀 뀌다가 금배지를 달았을 국회의원들은 이상하게도 그분의 한마디가 어려웠는지, 그 얼굴만 봐도 오금이 저렸는지 아니면 그저 그러려니 했는지 오래도록 그 질서 안에서 그분을 조련하고 스스로들을 훈육했다. 물론, 지금 다 잘 먹고 잘 산다.
언론의 역할도 눈부셨다. 그분의 언행은 그게 무엇이건 상상할 수 있는 최대치의 의미로 증폭됐다. 언론은 그분의 있는 듯 없는 듯 있지 않은 뜻을 낚아채는 허공의 ‘강태공’이었다. 그 강태공들이 공동체의 표현 양식에 기여한 바를 감안하면, 대중이 언론을 왜 믿지 못하는가도 어느 정도 납득이 가는 바가 있다.
하여간, 그분을 향한 언론의 유별난 증상은 그분에 대한 독특한 동시대적 ‘합의’로 이어졌다. 다른 정치인들을 규율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상태의 규율이 그분에게만 적용됐다. 그분은 가히 무분별할 정도로 자율적 침묵 상황을 즐길 수 있었다. 그 침묵의 여백과 공백은 말 그대로 ‘그냥 비어 있는’ 것이었는데 언론은 끊임없이 거기에 낚싯줄을 드리웠다. 그분을 하나의 체계라고 한다면 그 체계를 둘러싼 기표와 기의는 대체로 호응하지 않았다. 대개의 경우 결합조차 되지 않는 것이었는데 너무 오래 “그게 아니”란 얘기를 듣다보니 우리는 관습적으로 그 체계가 그 불치와 불통의 완전성을 갖는 것으로 그냥 이해해버렸다.
시적 전율, 무지를 에두르지 않는 용기비로소 완성된, 하나의 체계가 된 불치와 불통. 그것이야말로 그분의 일관성이며, 변치 않는 속성이며, 영원한 존재 동력이다. 지구 역사상 가장 유명했던 한 정치인(1)은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도록 하는 것은 헌신이며, 대중을 행동하고 실천하게 만드는 것은 일종의 광란 상태”라고 규정했다. ‘아몰랑’으로 대변되는 그분을 향한 유희적 광란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넘어, 공론장에까지 번져나가는 이 실천적 상황이야말로 그분의 일관된 헌신, 그리고 그 헌신에 너무 크게 감읍해 이제는 더 이상 무엇을 해볼 도리와 의지조차 상실해버린 이들이 벌이고 있는 가장 실천적인 행위다. 요새 유행하는 표현을 빌리면 “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 아무거나 하는 것이다. 표현의 자유 이전에 이것은 도모되지 않는 정치에 대한 최후의 감정적 발화이며, 손수건을 매달아놓을 깃대조차 상실하게 된 이들이 벌이는 최소한의 자구적 치유책이다.
당연하다. 그분의 정치는 유럽의 한 작가(2)가 말했던 “이론이 아닌 신념과 감정의 시(詩)”와 같다. 온 국민이 지켜봤던 세월호 침몰 상황에서 의문의 7시간을 보내고 나타나 그분은 “학생들이 구명조끼를 입었다던데 그렇게 찾기가 어렵습니까?”라고 발화했다. 솔직히 말해보자. 시적 전율이 온다. 완벽하리만큼 순정하고 무결한 무지, 그 무지를 에두르지 않고 직설적으로 고백하는 용기, 복합적 표현으로 청자를 얼어붙게 만드는 반전에 이르기까지. 세계 정치사에 굵직한 족적을 남긴 한 정치인(3)은 “나는 정치가가 아니라 광기 어린 시인이고 싶었다”고 말했는데, 이쯤 되면 그분이야말로 가히 시인이라고 아니 할 수 없지 않은가.
‘웃음’은 ‘역설’(逆說)이다. ‘역설’은 ‘패러독스’(Paradox)다. ‘패러독스’는 모순되어 보이나 실제로는 옳은 설인 동시에 세간의 통설에 반(反)하는 의견이다. 그분의 모든 행보가 그 역설이다. 웃음이다. 그분을 향한 웃음도 역설이다. 실제로 옳은 설이다. 그래서 그분 앞에선 싸움도 불가능하다.
분명, 의료 선진국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사실이 명명백백하게 까발려지고, 방역 실패의 속살이 낱낱이 드러나는 동안 단 한 번도 모습을 비치지 않았던 분이 처음 공식 석상에서 곧장 정부를 질타하는 ‘유체이탈 화법’을 구가해버리는데 어찌 싸운단 말인가. 웃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나는 곧 정부이고, 정부에 대한 공격은 유언비어이며, 그 유언비어가 ‘메르스’만큼이나 위험하다 설파하는 그 고결하고 일관된 ‘뇌외망상’은 정색하고 비판할 수 없으며, 그걸 정색하고 비판한들 이제 와 새삼 또 무슨 소용이냔 말이다.
이것은 국가인가, 동아리인가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권력, 위에 있는 척만 하되 아래선 뵈지도 않는 권력, 거기 있다지만 항상 없었던 그분의 존재 앞에 대중은 그저 광란적으로 행동하고 실천하는 것 외에 달리 그 역설을 돌파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그분을 향한 한바탕 웃음은 신념의 체계에 따른 전복적 행위라기보다는 ‘욱’이라고 하는 신체의 반응에 따른 역설적 실천일 뿐이다.
이쯤에서 앞서 언급한 이들을 밝혀야겠다. (1)의 정치인은 그 유명한 아돌프 히틀러다. (2)의 작가는 괴벨스의 후원을 받아 ‘유럽작가연맹’을 결성했던 프랑스의 로베르 브라지아슈다. (3)의 정치인은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다. 이 글을 쓰는 동안 메르스 환자가 더 늘었는데, 그 감염 경로는 아직 모르겠다고 한다. 이것은 국가인가, 동아리인가. 흔들어라, 권위를. 한 번도 흔들어보지 않았던 것처럼. 그분의 질서에서 웃으며 탈주하라. 한 번도 존중해보지 않았던 것처럼.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부디 운 좋게 생존할 수 있기를 바란다. 굿 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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