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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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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던 그를 우리는 안아주지 못했다

세월호 유가족에게 적극 도움 주다 스스로 목숨 끊은 김아무개 경감…

가족과 지인들이 증언하는 참사 뒤 김 경감의 73일
등록 2014-10-17 15:02 수정 2020-05-03 04:27

세월호가 침몰하던 날, 한 남자의 삶도 급작스럽게 변했다. 꼬박 73일 동안, 전남 진도 팽목항과 실내체육관은 그의 거처이자 사무실이 됐다. 바쁜 생활을 이어가던 6월26일 밤, 남자는 진도대교에서 스스로 몸을 던졌다. 진도경찰서 정보보안과 정보경비계장이던 고 김아무개(49) 경감 이야기다. 지난 7월 과 만난 세월호 유가족 김아무개(46)씨는 “주검을 수습해 헬기에 태워 보내줄 때면 그분이 그렇게 엉엉 우셨다. 많은 도움을 주었던 분”이라며 애통해했다. 당시 유가족은 “고인이 극심한 업무 피로감과 스트레스로 심신이 극도로 허약해져 스스로 목숨을 끊어 숨졌다”며 공무원연금공단에 유족보상금을 청구했다. 이에 대해 지난 9월 공무원연금공단은 공무원연금급여심의회를 거쳐 “공무상 사망으로 볼 수 없다”는 결론을 통보한다. “고인의 투신이 업무상 과로나 스트레스가 주된 원인이 되었다기보다는 기대했던 특진 심사에서 탈락한 데 따른 좌절감으로 과도하게 마신 술이 결정적인 원인이 됐다.” 세월호 참사 이후 73일은 김 경감에게 어떤 날들이었을까. 남겨진 가족과 지인, 동료 등으로부터 지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아내 김아무개(41)씨는 일곱 살 난 어린 딸이 받을 심리적 충격을 감안해, 고인의 실명을 언급하지 말아줄 것을 부탁했다. _편집자


윤이 나도록 닦인 갈색 남자 구두가 현관문 앞에 놓여 있다.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서자 낯선 듯 낯익은 김 경감의 얼굴이 보인다. 22년 동안 입었던 경찰 제복도 거실 한편에 걸려 있다. 매일 아침, 아내 김씨의 시선은 제복에 머문다. 어깨 위로 무궁화 두 송이가 얹어져 있다. 숨진 뒤 경위에서 경감으로 1계급 특진됐다. 전남 진도군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위치한 해남군에 김 경감의 집이 있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뒤 73일 동안, 멀지 않은 집에 들어와 제대로 머무른 건 세 번뿐이었다.

‘자식 잃은 슬픔’ 안다던 김 경감

아내가 본 남편은, 부모 도움 없이 스스로 삶을 개척한 사람이었다. 2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대학을 자퇴하고 군 복무 뒤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비싼 학비를 감안한 선택이었다. 1992년 순경에 임용되면서 경찰 생활을 시작했다. 2004년 대학 공부를 다시 시작해 이후 법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올해 들어 거의 나가지 못했지만, 조선대 대학원 교육학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었다. 공무원 퇴직 뒤엔 가르치는 일을 하고 싶어 했다. 아내는 충북 충주에서 남편을 처음 만났다. 중앙경찰학교 교관으로 일하던 시절이었다. 그에겐 한 차례 결혼에 실패한 아픔이 있었다. 결혼식을 올린 2006년, 전남지방경찰청 진도경찰서로 자리를 옮겼다. 고향 해남과 가까운 곳이었다. 손재주가 좋은 남편이 뚝딱뚝딱 만들었다는 탁자 위로 아내가 차와 과일을 내왔다. 남편이 떠났다는 사실이 아직 실감나지 않는다고 했다. 지금도 집 밖 어디에선가 일하고 있을 것만 같다.

4월16일 오전 9시께, 전남 진도군 조도면 병풍도 인근 해역에서 여객선이 침몰하고 있다는 신고가 무전을 통해 울려퍼졌다. 관할 경찰서 정보보안계장인 김 경감도 상황 파악을 위해 사고 해역으로 출동한다. 인양된 주검이 맨 먼저 도착하는 팽목항과 실종자 가족들이 머무는 진도 실내체육관을 오가며 현장 상황을 가장 먼저 파악해 정보를 공유하는 일이 주된 업무였다.


아내와 통화할 때면 ‘오늘은 몇 명이 바다에서 나왔다’ ‘누가 나왔다’라며 울기도 했다. 김 경감은 늘 손수건을 가지고 다녔다. 한 실종자 가족은 김 경감을 ‘대인기피가 있었던 나에게 몇 번이고 먼저 다가와 의지가 돼주었던 사람’으로 기억했다.


지난 10월8일 김 경감의 아내 김씨가 최근 딸아이가 만든 가족카드를 보고 있다.

지난 10월8일 김 경감의 아내 김씨가 최근 딸아이가 만든 가족카드를 보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월호가 침몰했다. 진도 팽목항과 실내체육관은 국가에 대한 ‘불신’으로 들끓었다. 분노의 화살은 일선 공무원에게로 향했다. 공무원과 가족들 사이엔 넘어설 수 없는 벽이 있었다. 김 경감이라고 해서 사정이 다르지 않았다. 더구나 ‘정보과 경찰’이었다. 아내는 남편에게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처음엔 가족들한테 물벼락도 맞고 손찌검도 당했다고 했어요. 누군가 ‘자식 잃은 슬픔을 아느냐’고 하기에 ‘나도 안다’며 먼저 자기 이야기를 꺼냈다고 하더라고요.” 세월호 유가족들처럼, 자식을 가슴에 묻은 적이 있었다. 두 해 전, 당시 스무 살이던 아들을 먼저 보냈다. 첫 결혼생활에서 얻은 아이였다. 국외에서 오래 생활하던 아이는 이혼 소식을 뒤늦게 알게 됐다. 군 입대 전날 가족이 함께 살던 아파트 옥상에서 스스로 몸을 던졌다고 했다. 아이의 주검을 수습하던 날엔 비가 내렸다. 그리고 한동안 비가 올 때마다 남편은 술잔을 기울였다.

주검이 올라올 때마다 가슴을 쳤을 그

열악한 환경에서 동고동락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마음의 문을 연 실종자 가족들이 하나둘 생겼다. 어느 날 새벽 집에 들어온 남편은 아침상에 차려진 갓김치를 보곤 아내에게 따로 싸달라고 부탁했다. 실종자 가족들이 전라도 김치를 먹으면 없던 입맛이 돌아올지 모른다는 말이었다. 가족들을 체육관 밖으로 데리고 나가 식사를 대접하기도 했다. 이 자리에 종종 함께했던 동료 경찰관은 김 경감과 실종자 가족들이 원래 알던 사람들처럼 서로 허물없이 지냈다고 했다. “계장님이 가족들의 슬픔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것 같았다. 원래 말씀을 참 잘한다. 나는 말실수라도 할까봐 가족분들이 조심스러웠지만, 계장님은 그런 게 없었다.” 친형제에 버금갈 정도로 막역한 지인 권현준(40)씨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함께 식사하던 중에 가족들로부터 전화를 받으면 곧바로 체육관으로 향한 적이 여러 번이었다. 왜 그렇게까지 하는지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 사람들 아픔을 알기 때문에, 나도 자식을 잃어봤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더라. 그런데다 책임감이 강한 성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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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서 인양된 주검을 확인하는 현장에도 그가 있었다. 훼손이 심한 주검을 차마 가족들이 확인하지 못하면 대신 주검을 보고 와서 상태를 설명해주었다. 그러곤 다시 주검안치소로 들어가 슬픔을 함께했다. 아내와 통화할 때면 ‘오늘은 몇 명이 바다에서 나왔다’ ‘누가 나왔다’라며 울기도 했다. 김 경감은 늘 손수건을 가지고 다녔다. 한 실종자 가족은 김 경감을 ‘대인기피가 있었던 나에게 몇 번이고 먼저 다가와 의지가 돼주었던 사람’으로 기억했다.

실종자 가족과 정부 간 갈등을 중재하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가족들에게 불편한 사항이 생기면 관련 부처에 통보해 언제까지 조처가 취해질지를 확인하고, 다시 가족들에게 알려주었다. 동료들은 이 업무가 간단히, 한 번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누군가 시키지 않아도 능동적으로 업무를 처리하다보니 일은 끝이 없었다. 거의 매일 밤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그는 자신의 차량으로 향했다. 일과를 마친 뒤 그곳에서 쪽잠을 잤다. 권현준씨는 “이 사실을 알게 된 실종자 가족들이 체육관에 설치된 텐트로 잠자리를 옮길 것을 권하기도 했다. 그러나 ‘코를 곤다’며 그곳을 이용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일주일에 한 번 아내는 옷가지를 싸들고 진도를 찾았다. 남편의 얼굴을 보는 건 10분가량이 다였다.

김 경감은 왜 그토록 바빴던 것일까. 참사 직후와 비교해 6월까지도 업무량은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고 동료들은 말했다. 교대해줄 인력도 부족했다. 그만큼 가족들과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김 경감이 수행하던 업무는 현재 경찰관 3명이 교대로 맡고 있다.

밤낮없이 일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김 경감의 심신도 쇠약해진 것으로 보인다. 단원고 학생 등 희생자 주검을 수습해 헬기로 후송시킨 뒤, 홀로 통곡하거나 한동안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6월 들어선 동료들에게 힘든 심경을 토로했다. ‘세월호 가족들에게 너무 빠져 있다. 나를 벗어나게 해달라’는 취지였다. 얼굴은 더욱 수척해졌다. 김 경감은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진 않았다. 보다 못한 권현준씨는 평소 알고 지내던 의사와 함께 그가 일하는 곳으로 찾아가 수차례 링거를 맞게 했다. 6월 중순 김 경감은 특별승진 심사를 신청한다. 투신 전날인 6월25일은 면접 심사가 있던 날이었다. 그날 오전에도 실내체육관에 머물다 면접을 보러 갔다. 결과는 좋지 않았다. 평소와 다르게 동료 직원들 앞에서 ‘미안하다’며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참사 수습 참여 않았다면 살아 있었을 것

아내가 남편과 마지막 통화를 한 건 6월26일 저녁 8시 즈음이었다. “저녁 먹으면서 술 한잔 하고 있다.” 웃으며 전화를 걸어왔다. 김 경감은 이날 밤 전남청 직원들이 공유하는 단체 카카오톡방에 심상찮은 메시지를 남겼다. “많이 힘들다. 자녀를 잘 보살펴달라.” 식당 주인의 차를 얻어타고 집으로 향했다. 경찰 조사에서 식당 주인은 김 경감이 불안해 보였다고 했다. “갑자기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눈물을 흘렸다. ‘세월호 참사 이후 집에는 세 번밖에 가지 못했고 딸이 있는데 많이 보고 싶다. 유가족들과 같이 지내다보니 없던 우울증이 생긴 것 같다. 아들이 죽어 힘이 많이 들었는데 유가족을 보니 더 괴롭다’ 이런 말들을 했다.” 불안한 마음에 차가 멈춰섰다. 차에서 내린 김 경감은 진도대교로 향했다. 인근에서 식사 중이던 동료 경찰관이 달려와 20여 분간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바다에 뛰어내리는 그를 막을 순 없었다. 김 경감은 실종된 지 9일 만인 7월5일 주검으로 발견됐다. 수색 작업 당시, 실종자 가족들은 자신들 가족보다 김 경감을 먼저 찾아달라고 요청했다.


김 경감은 ‘세월호 참사 이후 집에는 세 번밖에 가지 못했고 딸이 있는데 많이 보고 싶다. 유족들과 같이 지내다보니 없던 우울증이 생긴 것 같다. 아들이 죽어 힘이 많이 들었는데 유가족을 보니 더 괴롭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김 경감은 왜 이런 선택을 한 것일까. 공무원연금공단은 죽음의 결정적 원인을 ‘특진 심사 탈락으로 인해 과도하게 마신 술’이라고 보았다. 아내는 이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 세월호 참사 수습 과정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남편이 숨질 이유는 없었다는 것이다. 이름을 밝히길 꺼린 동료 경찰관도 “진급에만 매달린 분이 아니다. 세월호 업무에 집중했다. 그 과정에서 특진이 안 되니까 속상한 부분이 있었겠지만, (세월호 업무를 떼어놓고) 승진 누락 부분만 죽음의 원인으로 부각시키면 안 된다고 본다”고 말했다. 세월호 실종자 가족과 자원봉사자들도 김 경감의 ‘공무상 사망’을 인정해줄 것을 정부에 탄원했다.

전문가들은 재난이 발생할 경우 피해 당사자들을 돕는 경찰관이나 소방관·상담사 등도 대리 외상(2차 트라우마)에 노출된다고 설명한다. 재난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하더라도, 피해자들이 느끼는 고통과 비슷한 심리적 아픔을 경험했던 사람들의 경우엔 기존의 심리적 상처나 우울증이 심해지는 현상도 관찰된다. 매일같이 자식을 떠나보내는 현장에서, 김 경감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채정호 교수는 ‘오랜 기간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사실이 많은 것을 의미한다고 지적했다. “2차 트라우마를 막으려면 체력을 보전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중요하지만 우리는 이런 부분이 부족하다. 김 경감의 경우엔 자식을 잃었다는 상실감을 견디면서 살아오다 건강하지 않은 상태에서 급성으로 우울해진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자살 한 건이 발생하면 주변 20명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알려져 있다. 그 역시 그러한 아픔이 있지 않나. 괜찮은 조직이라면 이러한 위험 요인을 고려해 업무를 맡기거나, 교대를 많이 시켜주어야 했다.”

국가, 그의 죽음은 “공무와 상관없다”

세월호 참사로 수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숨졌다. 참혹한 현장을 수습하는 과정 중에 또 다른 생명이 사라졌다. 국가는 이러한 죽음이 공무와는 상관없다, 말한다. 공무상 사망이 아니라면 순직 신청이 받아들여지는 일도 요원해진다. 김 경감의 유해는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 전남 목포에 위치한 절에 임시로 안치돼 있다. 순직 인정을 받으면 현충원에 안장하려 했기에 집안 선산으로 모시지 않았다.

많은 전문가들은 우려한다. 세월호 참사로 인한 심리적 아픔이 어디까지 확산될지. 한 세월호 유가족은 빈소에서 아내에게 손수건을 쥐어주었다. 남편의 것이었다. 세월호 유가족의 눈물을 닦아주었을 손수건 위로 아내의 눈물이 떨어졌다. 49재를 지내는 날, 단 한 장 남겨진 김 경감의 손수건은 불타 없어졌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비극은 여기서 멈추란 듯이.

진도·해남·목포=글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사진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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