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딸을 키우는 동화작가 강경숙(56)씨는 지난 봄날을 “슬픔과 분노가 치밀어오르다가 죄책감과 무력감으로 망연자실한 나날”로 떠올렸다. “수학여행 간다고 들뜨고 설레는 가슴으로 배를 탄 꽃 같은 아이들 수백 명이 바다 밑으로 가라앉는 (세월호) 참극”을 생생하게 지켜본 탓이다. 그만이 아니었다. 맥없이 세탁기를 돌리며 아침 설거지를 하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젖은 손으로 든 수화기 저편에서 느닷없이 터져나오는 친구의 통곡 소리. “엉엉엉…. 생때같은 자식들 깊은 물속에 가둬놓고 이제 저 부모들은 어찌 살아가노!” 내 자식 같은 아이들 수백 명이 죽어가는 모습을 몇 날 며칠 생방송으로 봤으니 아무렇지 않은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font size="3"><font color="#A48B00">부조리 방관자, “나는 죄인이었다” </font></font>김은비(17)양은 ‘과연 나라면 나올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이 맴돈다고 했다. “나는 아마 기울어져가는 배에서 나오지 못했을 거다. 어려서부터 어른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았던’ 아이였을 뿐이지 저항하거나 거절했던 아이는 아니었으니까. 어른들의 말을 거절한다고 해서 돌아오는 이득은 없고 잘 따랐을 때는 칭찬이 뒤따랐다. 그러니 가만히 있으라고 외치는 방송을 나는 절대로 거절하지 못했을 것 같다.”
4월16일 세월호 참사 이후 한국 사회는 집단 트라우마(trauma·정신적 외상)를 앓고 있다. 의 저자인 김태형 심리연구소 ‘함께’ 소장은 “무기력과 죄책감, 불안감이 심해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는 사회적 외상이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고, 이제 안전하다고 확신이 들면 나아진다. 사후 대처를 잘하면 자연스레 치유될 수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진상을 밝힐 수도, 재발을 막을 수도 없다면 트라우마가 심해진다.”
지난 8월 교직에서 퇴직한 최연경(62)씨는 “아이들이 가득한 배가 서서히 침몰하는데 어른들은 그 주위를 맴돌며 지켜볼 뿐이었다. ‘우리나라가 이런 수준밖에 안 되는 나라였나’ 한탄스럽다”고 했다. 더 염려스러운 것은 앞으로 이런 일이 또 일어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다. 대형사고가 나면 늘 그렇듯 법석을 떨다가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흐지부지되는 예를 수없이 겪어왔기 때문이다. 서해 페리호 침몰,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 붕괴, 화성 씨랜드 화재, 경주 마우나리조트 붕괴 등 반복되는 참사 때마다 고쳐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200일(11월1일)이 가까워지는데 유가족들은 오늘도 길 위에서 ‘성역 없는 진상 규명’을 부르짖고 있다.
최씨는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한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그토록 오만하게 온갖 부조리한 관행을 저지를 때 나는 무얼 했을까. ‘정치인들은 다 똑같다’라는 생각으로 미리 포기하고 생활했던 사람이 다름 아닌 나였다. 나는 내 권리를 포기하며 그들이 제멋대로 설칠 수 있도록 방관해온 죄인이었다.”
<font size="3"><font color="#A48B00">공개 집단상담, 안도감과 극복할 힘 얻는 길 </font></font>많은 사람들이 ‘집단적 트라우마’라는 측면에서 세월호 참사와 ‘9·11 테러’를 비교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책임 소재도 내·외부로 달랐지만, 무엇보다 사후 대처 과정이 차이가 난다. 미국 뉴욕에서 클리닉을 운영하는 정신분석가 권혜경씨는 “9·11 사건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뉴욕 시민들은 오히려 자부심을 느꼈다. 정부가 제대로 대처한다는 믿음을 준 덕분”이라고 했다. 권씨는 뉴욕대 외래교수를 겸임하며 ‘통합적 트라우마 전문 치료사’로 활동하고 있다. “트라우마는 사건 자체가 아니라 사건에 대한 ‘반응’이다. 같은 사건을 겪어도 우는 사람이 있고 이유 없이 화를 내는 사람이 있다. 공통점은 ‘안전’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라는 것이다.”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려면 “여러 반응을 억압하지 않고 표출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게 중요하다”고 권씨는 말했다.
미국에서 9·11을 추모하는 자리가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듯 세월호에 대해서도 한국 사회가 지속적으로 말하고 감정을 교류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과 서울시 치유활동가 집단 ‘공감인’이 10월22일부터 진행하는 서울시 힐링 프로젝트 ‘누구에게나 엄마가 필요하다-트라우마 편’이 그 첫걸음인 셈이다(26쪽 참조).
서울시 힐링 프로젝트를 맡고 있는 박유미 보건의료정책과장은 “세월호 사고의 생존자와 희생자 가족이 치유되려면 공감하고 이해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돼야 한다. 그렇게 시민들이 사회적 재난을 더불어 극복해야 심리적 안정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아르헨티나 심리사회연구센터 EATIP의 루실라 에델만 박사는 “길거리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면 그것은 개별 외상 사건이다. 하지만 세월호 사건은 집단적 또는 사회적 외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집단적 트라우마는 개인적 치유뿐 아니라 상호작용을 기반으로 한 사회적 치유가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에델만 박사는 국가폭력·고문 피해자들을 30년 이상 심리치료해왔다.
집단 트라우마의 치유 방법은 공개 집단상담이다. 그래야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라는 보편성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깊은 상처를 입은 사람은 나만 외롭고 내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고립감이 자꾸 깊어진다. 이때 그 사람을 환자로 취급하면서 밀폐된 공간으로 집어넣으면 더 큰 상처를 입는다. 오히려 비슷한 고통을 경험한 집단끼리 진솔하게 이야기를 나누게 해야 한다. 그러면 ‘내가 아픈 게 이상한 것이 아니구나’ ‘더한 경우도 있구나’ 하며 안도하고, 허우적거리던 자신의 상황에서 한발 빠져나올 힘을 얻는다. 또 집단상담에선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존재’라는 걸 반복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내 경험을 진솔하게 얘기했을 뿐인데 다른 사람이 큰 도움을 받았다고 얘기하는 경우다. 그럴 때 내 자존감이 높아지고 고통을 견디는 심리적 에너지가 생긴다. ‘상처 입은 치유자’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font size="3"><font color="#A48B00">살아남은 자의 ‘새로운 본능’ </font></font>상처 입은 치유자는 새로운 길을 개척할 수 있다. 2007년 미국 버지니아공대에서 총기 난사가 발생해 33명이 죽고 29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곳에 있던 한 노교수가 날아오는 총알을 향해 몸을 던지며 제자들에게 창문으로 도망치라고 외쳤다. 총탄이 퍼붓는 출입구를 노교수가 막아섰기에 많은 학생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노교수의 이름은 리비우 리브레스쿠,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였다. “아우슈비츠에서 겪었던 참혹한 인간성 말살의 기억이 자신의 안위를 지켜 살아남고자 하는 생존 본능마저 거스르는 ‘새로운 본능’을 만들어주었던 것이다.”(풀꽃평화연구소, 2007년 5월4일)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font color="#A48B00">■ 참고 문헌</font> (한겨레·2014년 9월), (인디고서원·2014년 8월), (서해문집·2013년 5월)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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