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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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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웃을 것인가

현대차 사내하청 노동자 1569명 근로자지위 확인소송 1심 선고 또 연기돼…

불법파견 인정 판례 있으나 해석은 천차만별
등록 2014-08-27 16:37 수정 2020-05-03 04:27
현대자동차 울산 비정규직지회 등이 지난 8월21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재판부의 ‘선고 연기’ 결정을 규탄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현대자동차 울산 비정규직지회 등이 지난 8월21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재판부의 ‘선고 연기’ 결정을 규탄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누군가는 이기고, 누군가는 진다. 재판에 무승부란 없다. 승패가 분명하다. 지난 8월21~22일을 주목했던 까닭이다.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 1569명이 현대차를 상대로 낸 근로자지위 확인소송의 1심 결과가 나올 예정이었다. 국내 처음이자, 최대 규모의 불법파견 집단소송이다.

패자가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2010년 대법원에서 불법파견을 인정받고 ‘현대차 정규직 1호’ 판결을 끌어낸 최병승씨는 선고 예정일 하루 전인 지난 8월20일 말했다. “최병승 판결이 ‘나도 정규직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막연한 기대를 갖게 해줬다면, 이번 집단소송 판결은 실제로 많은 비정규직들이 ‘정규직이 돼야 한다’는 사실을 확인해줄 거다. 집단적인 불법성이 확인되면 검찰은 4년간 묵혀뒀던 정몽구 회장 등의 파견법 위반 고발사건을 결론 내려야 한다. 현대차도 누군가 책임져야 한다.” 그래서 현대차 공장에서 일하는 사내하청 5500여 명은 손꼽아 판결을 기다렸다.

그런데 한편으론 누군가는 이기고 누군가는 진다는 게 또 문제였다. 원고 1569명 가운데 승소자와 패소자가 갈릴 게 분명했다. 자동차의 차체를 조립하는 ㄱ은 정규직으로 인정받아 웃고, 자동차에 색을 입히는 도장 라인에서 일했던 ㄴ은 정규직으로 인정받지 못해 울고. 울산공장에서 아반떼를 만든 ㄷ은 불법파견이고, 전주공장에서 버스를 만든 ㄹ은 불법파견이 아니고. 10년 넘게 회사를 상대로 함께 싸웠던 동지들 간에 희비가 엇갈리고, 혹시 내가 패자가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마치 8월21일이 ‘데드라인’이라도 되는 양, 비정규직지회 조합원들은 조급해했다.

지난 8월19일 노사 잠정합의안을 조합원 찬반투표에 부치기에 앞서, 임인종 아산사내하청지회장이 했던 말에는 이런 고민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법원 판결에서 패소할지 모를 도장부 동지들이 함께 정규직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2013년 중앙노동위원회 판정 때 패소한 동지 80여 명이 있다. 판결에 앞서 합의한 건 최대한 많은 조합원을 살리는 쪽으로 선택한 거다.”

서울중앙지법 민사41, 42부는 판단을 3주 뒤인 9월18~19일로 미뤘다. 기다림의 시간은,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을 더 키운다. 선고 연기가 누군가에겐 다행이지만, 누군가에겐 불행이다. 현대차(피고)보다 비정규 노동자들(원고)이 더 불안해하는 이유는 뭘까?

“입법부와 행정부의 무책임한 직무유기에 대항한, 외로운 투쟁의 결과물이다. 2010년 최병승 판결은 원청업체의 불법적인 관행에 제동을 걸고 건전한 고용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새로운 기준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조경배 순천향대 법학과 교수 ‘사내하청에 대한 법원 판례의 의미’) 최병승 판결이 ‘기준’을 보여준 건 맞다. 컨베이어벨트를 이용한 자동흐름 방식으로 진행되는 자동차 조립·생산 작업에서 정규직과 혼재해 일하고 현대차가 직접 업무지휘를 했으면 도급이 아니라 불법파견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사내하청 업체의 현장관리인 등이 구체적으로 지휘명령을 했더라도 현대차가 통제한 것에 불과했다면 역시 불법파견이다. 제조업 직접생산 공정의 파견노동자 고용은 법으로 금지돼 있다.

그런데 최병승 판결의 구체적인 해석을 두고선 의견이 분분하다. 당장 현대차만 해도 “최병승 개인에 대한 판단일 뿐”이라고 선을 긋는다. 전체 불법파견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최씨는 의장 공정에서 일했다. 의장은 차체에 계기판과 시트 등을 장착하고 배선·배관 작업을 해서 자동차의 꼴을 갖추는 작업이다. 2010년 서울고법의 현대차 아산공장 판결, 2013년 중노위 판정 등에서도 의장 공정은 모두 불법파견 사실이 인정됐다. 이 때문에 노동계 안팎에선 적어도 의장에서 일했던 노동자들만큼은 승소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다.

“자동흐름 방식, 불법파견 여지 많아”

어느 생산공정까지 불법파견으로 인정할지는 판결 선고를 앞둔 최대 관심사였다. 2010년 서울고법이 내린 현대차 아산공장 판결에서는 의장뿐만 아니라 차체, 엔진·변속기, 생산·품질관리 부문 등에서 일했던 비정규직 4명이 원고승소했다. 반면 2013년 중노위는 현대차 32개 사내하청 업체의 278명을 불법파견으로 판정하면서 엔진·변속기, 시트, 생산·품질관리 부문 등을 불법파견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도장에 대해서도 일부만 불법파견으로 봤다.

비록 다른 회사이긴 하지만 2013년 한국GM 창원공장에 대한 대법원 판결은 불법파견 범위를 폭넓게 인정했다. 프레스, 차체, 도장, 엔진, 변속기, 생산·품질관리, CKD(제품 반조립) 등이 포함됐다. 사실상 모든 직접생산 공정에서 불법으로 사내하청 노동자를 부리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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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판사 시절부터 노동법 전문가로 유명했던 최은배 변호사는 “각 협력업체가 시트, 차체 등 생산공정의 일부분을 맡을진 몰라도, 컨베이어벨트 흐름 전부를 관장하는 건 결국 현대자동차다. 자동흐름 방식에 따른 공정을 모두 불법파견으로 볼 여지가 많은 건 그래서다. 이 기준을 적용해보면 최병승 대법원 판결은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현대차 전체를 다룬 판결이었다”고 말한다. 이미 최병승 판결에서부터 현대차의 불법은 확인됐다는 것이다.

더 넓게 해석하자면, 자동차 완성업체는 물론이고 전자·철강 등 컨베이어벨트 생산방식에서 근무하는 제조업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경우 모두 불법파견 소지가 있을지도 모른다. 실제 기아자동차, 한국GM, 금호타이어, 현대하이스코 등의 제조업 사내하청 노동자 760여 명이 2010년 최병승 판결 이후 원청인 대기업을 상대로 집단적인 근로자지위소송을 내놓은 상태다.

현대차 쪽은 ‘역공’을 편다. 일부 공정이 자동흐름 방식이 아니라는 논리도 끌어왔다. 전주공장의 버스 생산라인은 기존 컨베이어벨트와 달리 일정 시간 동안 세웠다가 이동시키는 ‘택타임’(Tact-Time) 방식이어서 불법파견이 아니라고 주장한 것이다. 버스·트럭 등 상용차를 생산하는 전주공장의 비정규직지회에서 잠정합의안 찬성률(71.6%)이 높게 나온 배경이기도 하다. 참고로 전체 원고 1569명 가운데 의장은 1182명, 엔진·변속기나 시트 공정이 161명, 생산·품질관리 등이 226명이다(일부 원고들이 소 취하하기 이전인 8월20일 기준).

원고가 2005년 7월 이전 입사자인지, 이후 입사자인지에 따라서도 판결 결과가 엇갈릴 전망이다. 2007년 7월 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파견법)이 개정되기 전까지 2년 이상 근무한 사람은 당연히 현대차 노동자로 간주(‘고용의제’ 조항)되지만, 이후로는 현대차가 노동자로 고용할 의무(‘고용의무’ 조항)만 있을 뿐이다. 현대차는 고용의무를 다하지 않아도 과태료만 내면 된다. 1569명 중 고용의제 조항에 해당하는 인원은 1426명, 고용의무 조항에 해당하는 인원은 143명이다.

외로운 싸움, 이제 버틸 수가 없다

이처럼 승소 가능성을 이리저리 저울질하며 비정규 노동자들은 지쳐간다. 누군가는 그저 버티면 되지만, 누군가는 이젠 버틸 수가 없다. 권영국 변호사는 “소송을 낸 지 거의 4년이 다 돼간다. 원고인 비정규 노동자들은 매우 힘들게 지금까지 지속해왔다. 그런데 사법부가 3번이나 선고를 연기한다는 건 직무유기다. 권리구제를 해주려면 신속한 재판이 중요하다. 법원이 현대차의 재판 지연 전술에 약한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9월18~19일 판결 선고가 또다시 미뤄지면 안 되는 이유다. ‘외로운 투쟁의 결과물’을 마냥 기다리기엔 그들이 점점 더 외로워지기에.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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