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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북 화교’ 출신 유우성씨, 꼬리표 떼기 힘든 탈북자
간첩으로 만들어지기 쉬운 경계에 선 사람들
등록 2014-03-19 14:48 수정 2020-05-03 04:27

“너 인마, 간첩이야?”
김민수(가명)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대학에 다니던 시절, 풍물패 친구들과 농촌 봉사활동에 갔다. 당시 자신을 담당하던 보안과 경찰은 ‘왜 그러한 사실을 말하지 않았느냐’고 추궁했다. 그런 것까지 말해야 하느냐고 되묻자 돌아온 말이었다. 그는 탈북자였다. 마음이 추슬러지지 않아 결국 동아리 활동을 그만두었다. 경계를 넘어선 사람은, 누구의 편인지 늘 의심을 받는다. “통일이 될 때까지 탈북자라는 꼬리표를 뗄 수 없을 것 같다.” 김씨가 한숨을 내쉬었다.

1980년대 화교, 국경 무역 주체로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 피의자 유우성(34)씨는 그보다 더 복잡한 배경을 지니고 있다. 유씨는 함경북도 회령시에서 나고 자란 재북 화교다. 화교란 해외에 거주하는 중국인을 의미한다. 유씨네 가족은 4대째 북한에서 살았다. 재북 화교는 약 6천 명으로 추정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남북한 국가가 성립되기 전 한반도에는 약 8만 명의 중국인이 살고 있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화교 사회도 두 개로 쪼개져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고통을 겪었다. 1960~70년대, 북한 정부는 화교에 대해 적극적인 동화정책을 시행한다. 열악한 처우가 계속되자 화교 일부는 북한 땅을 떠나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이 일어나면서 생계를 위해 북으로 들어와 뿌리를 내린 화교도 있다. 북한 화교는 북에서 살 수 있지만, 국적을 지닌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 사는 화교들과 마찬가지로, 외국인과 내국인의 경계에 있다. 국적은 중국이며, 중국 여권을 취득할 수 있다. 북한을 나와 1년이 지나면, 북한 내 주소지는 말소된다. 이들이 중국 본토에 완전히 뿌리내리려면 다시 중국 정부로부터 호구증(일종의 거류증)을 발급받아야 한다. 3년 이상 중국에 거주하고, 어느 정도 경제적 능력이 있음을 증명해야 하는 등 호구증을 받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1980년대 초까지 재북 화교는 북한 주민들과 다르지 않은 생활을 했다. 1980년대 북-중 양국은 북한이나 중국에 친척이 있는 가정에 한해 왕래를 허용했다.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이 시작된 이후, 국경을 넘나들 수 있었던 화교는 국경 무역의 주체로 떠오른다. 유우성씨네 가족도 중국에서 구입한 생활용품을 북한에서 파는 부업을 했다.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신의주와 마주 보고 있는 중국 랴오닝성 단둥에서 1년6개월 동안 머물며 연구를 진행한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강주원 선임연구원은 “단둥에 머무는 재북 화교는 2천 명이 넘으며, 1년에 한 번 북한으로 가 북한 내 주소지를 유지하는 경우와 수시로 국경을 넘나드는 사람으로 나뉜다”고 설명했다.
재북 화교와 재중동포(조선족)는, 공식적 교류에 제한이 있는 남북한 사람들의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 동대문시장에서 팔리는 옷도 이들을 통하면 이틀 뒤 북한에 도착한다. 국가정보원 증거조작과 별개로, 유우성씨가 간첩임이 확실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탈북자가 북한에 다녀온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단언한다. 2006년 어머니가 숨지자 그는 고향에 다녀온 적이 있다. 이같은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면서 2008년부터 2010년까지 수사를 받았다. 장례식 이후로는 북한에 다녀온 적이 없고, 정보를 넘기는 간첩 행위를 한 적도 없다는 게 그의 일관된 주장이다. 탈북자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어려움이 있긴 하지만 북한에 가는 일이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다. 남한에 살고 있는 탈북자들은 북쪽 가족에게 전화도 하고 송금도 한다. 엄밀히 말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벌받을 수 있는 행동이다.

중국인도 북한 주민도 아닌

한족 혈통이지만 북에서 나고 자란 사람(재북 화교), 북에서 나고 자란 사람(북한 공민), 조선 혈통이지만 중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조선족). 세 집단의 국민·민족 정체성을 무 자르듯 잘라 구분하기란 쉽지 않다. 현행법상 재북 화교는 북한이탈주민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중국인 아버지와 북한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김아무개(51)씨는 1992년 중국으로 건너갔다가 2004년 몽골에서 북한이탈주민 보호신청을 냈다. 한국 입국 과정에서 화교임이 밝혀진 그는 서울출입국관리사무소로 넘겨졌고 이듬해 중국으로 추방된다. 그런데 중국은 신원불명을 이유로 그를 다시 한국으로 돌려보냈다. 결국 무국적자가 된 김씨는 취업이 허용되지 않는 기타(G-1) 체류자격으로 한국에서 어렵게 살고 있다.


안씨는 “국가정보원 지시로 몽골 주재 북한대사관 인물들에게 접근해 정보를 획득하는 과정에서 독침 등을 받게 되자 북한에 남은 가족의 신변 안전을 지키기 위해 지령을 수행하는 척 ‘시늉’을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경계를 넘나든 사람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받는 동시에, 갈 수 없는 사회를 들여다보는 창이다. 남북 정보기관은 이들을 접촉해 정보를 수집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2012년, 북한 지령을 받고 보수단체 대표를 ‘독침’으로 살해하려 한 혐의(국가보안법상 특수잠입·탈출, 목적수행, 자진지원·금품수수 등)로 안아무개(57)씨가 재판에 넘겨졌다. 안씨는 북한 군인 출신으로 1995년 남한으로 건너와 정착했다. 몽골에 나가 대북교역 사업을 추진하던 중, 북한 당국자를 만나 살해 지령과 도구를 받아 2011년 9월 범행을 실행에 옮기려는 순간 계획을 알고 현장에 도착한 국정원 수사관들에게 체포된다. 안씨는 “국가정보원 지시로 몽골 주재 북한대사관 인물들에게 접근해 정보를 획득하는 과정에서 독침 등을 받게 되자 북한에 남은 가족의 신변 안전을 지키기 위해 지령을 수행하는 척 ‘시늉’을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앞서 또 다른 탈북자를 암살해달라는 부탁을 듣자, 귀국한 뒤 국정원 직원에게 이러한 사실을 알리며 ‘쇼’를 할 것을 제안했으나 거절당한 적이 있었다. 2012년 4월 서울중앙지법 형사21부는 “북쪽 인사들과 접촉하게 된 데에는 대북 정보를 수집하려던 국정원의 요청과 물적 지원이 하나의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면서도 “‘쇼’라고 보기엔 어려울 정도로 구체적이고 치밀한 준비를 했다”며 안씨에게 징역 4년에 자격정지 4년을 선고했다. 그해 말 대법원은 원심 선고를 확정한다.

‘통일대박론’ 시대에 여전한 누명 씌우기

최근 2~3년 사이 북한 노동자의 중국 진출이 늘어나는 추세다. 삶의 기회를 찾아 경계를 넘나드는 사람은 더욱 많아질 것이다. 한반도 냉전체제는 변하지 않았다. 국가보안법은 여전히 강력하다. 간첩 누명을 누군가에게 덧씌울 가능성은 ‘통일대박론’ 시대에도 여전하다는 의미다.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 참고 문헌 (강주원·2013), ‘북한 화교의 형성과 역할에 관한 연구’(이승엽·2012), ‘무국적 탈북자 보호를 위한 법제도적 대응방안 모색’(이규창·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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