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자본주의가 위기다. 회복의 소문만 무성할 뿐, 6년이 지난 지금도 위기는 진행형이다. 자본주의도 사회적 생물체이니 부침이 있기 마련이다. 거대한 공장, 굴뚝 연기, 그리고 노동의 땀으로 버무려 만든 산업혁명이 마무리되던 19세기 말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있기 전까지 자본주의의 호시절이 있었다. 풍요의 노래가 흘렀다. 영국에서는 대영제국에 걸맞게 여왕의 이름을 따서 ‘빅토리아 시대’라 했고, 프랑스에서는 풍요를 문화적으로 승화해 ‘아름다운 시대’(La Belle Epoque)라고 불렀다. 미국의 성공이 유난히 두드러졌다. 화려한 만큼 졸부의 그림자도 생겼다. 그래서 마크 트웨인은 모든 것에 금박을 입혀 부를 과시하는 ‘금박 시대’(Gilded Age)라고 비꼬았다.
물건은 넘치지만 살 사람이 없다
이런 풍요 속에 숨겨진 과잉과 불균형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대공황의 참화를 통해 드러났다. 생산만 늘어나면 만사가 해결될 것이라는, 산업혁명 이후 지속돼온 기술 및 생산 낙관주의에 처음으로 의문이 생겼다. 스스로 만든 늪에 빠진 ‘자본주의 일병’을 구해내려 했던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생각한 자본주의 구출기의 핵심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생산능력이 천문학적으로 팽창해 시장에 물건이 넘치지만, 정작 그 물건을 살 사람이 없다는 게 경제문제의 요체라고 그는 믿었다. 생산수준에 걸맞게 만인의 소득수준이 올라가서 소비가 원활하게 이뤄지도록 해야 하고, 이런 선순환을 만들어내는 것이 곧 사회와 정부의 책임이라고 주장했다. 일부 기업은 이를 본능적으로 이해했다. 자동차 대량생산의 신기원을 열어젖힌 헨리 포드는 하룻밤 새 공장노동자의 임금을 2배 올림으로써 자신의 노동자를 자동차의 생산자이자 잠재적 고객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만신창이 지경인 그들의 자본주의에 대한 자신감도 되찾았다. 특히 20세기 초반, 케인스의 낙관주의는 16세기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를 닮아 있었다. 그의 손자 시대, 그러니까 우리 세대에서는 하루 3시간 노동만 해도 풍족하게 살 수 있을 거라고 단언했다. 생산력은 충분하고 골고루 나눠갖는 ‘쉬운’ 문제만 남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이런 고통을 통해 교훈을 얻었고 한때 자신감도 얻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분배의 균형을 맞추려는 노력이 본격화됐다. 무수히 자라나는 공산주의의 위협을 경계할 필요도 있었다. 기업과 노동이 합심해 자본주의를 운영해보자는 이른바 ‘포드주의적 사회협약’이 명시적이거나 암묵적으로 도입됐다. 또 한 번 유례없이 생산력이 높아지고, 그만큼 임금도 늘었다. 노동생산성과 임금이 사이좋게 발맞춰 증가했다. 시민들은 노동자이자 소비자로서 발언권을 높여갔다. 한 사회의 시민으로서 품위 있게 살아가기 위해, 또 자본주의의 변덕스러운 경기변동으로부터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사회복지 체제가 만들어졌다. 그들의 자본주의에서 ‘우리’가 만난 시기였다. 마크 트웨인이 조롱했던 금박 입힌 자본주의가 아니라, 진짜배기 순금이 보이기 시작했던 시기다. 경제학자들은 ‘자본주의의 황금기’(Golden Age of Capitalism)라고 불렀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황금기는 잠시 빛날 뿐 오래가지 못했다. 그들의 대대적인 반격이 시작됐다. 1980년대 신자유주의의 도입이 그 신호탄이었고, 1990년대에 들어서는 공산주의가 붕괴하고 세계화가 시대정신으로 등장함에 따라 그 여파가 뚜렷해졌다. 연대와 공존 대신, 자유와 시장이라고 쓰인 깃발이 도처에 날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자본주의가 돌아왔다. ‘시장 효율성’과 ‘고성장’이라는 기치 아래 복잡한 이론과 논리가 동원됐지만, 결국 그 핵심은 그들을 위한 분배 투쟁이었다. 임금에는 각박해지고 그들이 분담해야 할 비용은 모르쇠하면서 사회나 정부에 이를 떠넘겼다. 이러한 분배 투쟁에 걸림돌이 되는 간섭과 규제는 시장의 이름으로 결사반대했다. 동시에 공장 확장이나 기계 구입 같은 생산 투자보다는 쉽게 돈을 돌려 이윤을 늘리는 방법도 찾았다. 금융은 생산의 번잡함을 피하면서 돈을 불릴 수 있는 알라딘 램프가 되었다. 이게 금융의 진정한 역할을 방기하는 것이라 걱정하는 이들에게는 훈계가 따랐다. 금융화란 새로운 경제 시대의 도래를 의미하며, 낡은 사고방식을 가진 이들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신개념이라 했다.
노동생산성은 2% 증가, 임금은 1% 증가새로운 시대가 가져온 결과는, 그러나 전혀 새롭지 않은 것들이었다. 우선 노동소득은 상대적으로 줄어들고 그만큼 자본소득은 늘어났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의 경우, 총소득 중 노동이 가져가는 비율을 의미하는 노동소득분배율은 2010년 기준으로 1970년대보다 10%포인트 이상 떨어졌다. 일본에선 하락폭이 15%포인트를 넘었다. 생산과 노동소득의 균형이 붕괴됐기 때문이다. 노동생산성은 1970년대 이후 약간 감소했으나 꾸준히 연평균 2% 전후로 증가했다. 하지만 임금증가율은 이에 훨씬 못 미쳐 1% 전후에 머물렀다. ‘임금 절약’을 통해 투자가 늘어나서 결국 노동자에게도 이익이 될 거라는 기대도 있었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투자는 이윤 증가만큼 늘지 않았고, 투자되지 않은 이윤은 금융권으로 몰려들었다.
분배의 실패는 여기서 끝난 게 아니다. 전체적으로 줄어든 노동소득 몫이 개별 노동자들 사이에 분배되는 방식도 더 불평등해졌다. 엘리트 봉급생활자의 월급이 매년 치솟아오르는 반면, 하층 노동자에게 그런 봄날은 찾아오질 않았다. 미국에서는 하층 10%의 임금이 지난 20여 년 동안 줄어드는 기현상까지 생겼다. 봄날은커녕 매서운 한파였다. 유럽도 예외는 아니었다. 정보기술(IT)과 세계화로 무장한 ‘아름다운 시대’의 도래를 노래하는 동안, 빈곤층과 저임금층은 늘어났다. 고용이 곧 복지라면서 취업을 강권하는 사회가 되었지만, 일을 해도 빈곤한 경우가 늘어났다. ‘근로빈곤층’(Working Poor)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났다. 이를 문제 삼으면서 정부와 기업에 복지와 노동시장 대책을 요구하면, 그들은 성공한 1%를 가리키며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성경 말씀을 인용했다. 그러나 이 말은 성경에 나오질 않는다.
노동소득 몫이 줄고 그마저 불평등하게 나누어졌으므로, 소비 수요에 비상이 걸렸다. 생산은 계속 늘어나는데 소비가 따라가지 못했다. 케인스가 일찍이 자본주의 고질병으로 걱정했던 이른바 ‘유효수요 부족’ 문제가 불거졌다. 그렇다고 그들은 소득분배의 균형을 바로잡으려는 정공법을 택하진 않았다. 그 대신 국내 소비력 제약으로 팔리지 못하는 생산물을 다른 나라에 수출하거나, 가계에 싼 대출을 주선해서 소비를 부추겼다. 자연히 수출을 둘러싼 경쟁이 가열돼 전세계적인 불균형(Global Imbalance)이 심화됐고, 다른 한편으로는 가계부채의 급속한 증가가 위험수위에 도달했다. 어느 쪽 방식이든 지속 가능하지 않았다.
완전고용을 대체한 ‘고용 없는 성장’완전고용도 사라졌다. 경제는 성장하지만 고용은 그만큼 늘지 않는 ‘고용 없는 성장’(Jobless Growth)이 완전고용을 대체했다. 중앙은행과 경제 담당 부서들도 공식 문서에서 ‘완전고용’이라는 단어를 슬그머니 지우기 시작했다. 한때 경제성장과 고용창출이 혼연일체가 되었던 미국에서도 1990년대 말부터는 경제만 홀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유럽에서는 청년실업이 두드러져 정치·사회 문제로 등장했다. 복지 혜택이 지나쳐서 노동 의욕을 꺾는다며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비판도 높아갔지만, 먹기 위해 일을 찾는 이들에게는 정작 일자리가 주어지지 않았다.
분배와 고용의 동시적 실패는 기업의 힘을 키웠다. 기업은 이렇게 강력해진 힘을 주저 없이 휘둘렀다. 과거엔 기업이 부담했던 비용이 정부와 사회에 전가됐다. 숙련과 직업훈련은 국가와 기업의 공조를 요하는 투톱 전술을 필요로 하는데, 숙련 기술의 혜택자인 기업은 관련 비용을 점점 더 정부나 개인에게 떠넘겼다. 국가경쟁력 강화라는 명분하에 정부는 훈련비용을 더 많이 떠안게 되었고, 특히 대기업은 자체 훈련보다 중소기업에서 훈련된 직원을 데려오는 손쉬운 방법을 택하게 되었다. 기업의 ‘태업’이었다. 채용도 마찬가지였다. 능력과 잠재력이 있는 젊은이를 잘 살펴 뽑도록 채용 과정에 투자하는 것이 기업의 마땅한 도리지만, 채용비용은 갈수록 구직자들에게 전가됐다. 구직자가 경쟁적으로 스펙을 쌓아 스스로 가치를 입증해야 하는 본말전도가 생겨났다.
그들의 사회·경제적 기여는 이렇게 줄었음에도, 역설적으로 그들의 목소리와 영향력은 되레 커졌다. OECD 국가들의 평균 법인소득세는 1981년 49%에 육박했으나, 2013년 현재는 32%에 불과하다. 개인소득세의 변화는 더 두드러졌다. 한때 최고 세율이 70% 이상 육박했던 것이 지금은 대부분 40% 수준이다. 예전보다 훨씬 더 가져갔지만 훨씬 덜 내는 구조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들의 힘이었다. 난공불락의 1 대 99 사회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이런 분배 투쟁으로 그들의 부가 쌓여가는 만큼 그들의 자본주의는 위태로워졌다. 상위 1%가 가져간 소득 비율이 역사상 최정점이던 시기가 두 차례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그 뒤를 이어 역사상 최악의 경제위기가 찾아왔다. 첫 번째가 1930년대 대공황(Great Depression)이고, 두 번째가 현재의 위기, 경기대침체(Great Recession)다. 그들이 자초한 일이니, 결자해지를 기대했다. 십시일반으로 돈보따리를 만들어 안겨주며, 수습하는 일도 그들에게 맡겼다. 언성을 높이긴 했으나 멱살 잡는 일은 없었다. 경제를 위해 애쓴다는 그들의 발목을 잡았다는 볼멘 투정이 나올까 걱정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여전히 빈손만 내보인다. 오히려 당당해졌다.
‘분배의 재구성’은 곧 일의 재구성그럼 어떡할 것인가? 결국 분배다. 우선, 분배 문제를 색안경을 끼고 보는 태도가 바뀌어야 한다. “사회주의는 비참함을 공평하게 나누는 경제이고, 자본주의는 축복을 조금 불평등하게 나누어가는 경제”라는 윈스턴 처칠 식의 고전적인 꼼수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그간 분배 개선을 마치 인위적이고 비시장적인 것이라 터부시해온 분배중립주의론은 역설적으로 가장 분배지향적이었고 ‘그들을 위한 분배’를 실질적으로 정당화했을 뿐이다. 분배중립적 정책은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유토피아적이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마이클 스펜서가 이끈 다보스포럼의 ‘현인 위원회’(Global Agenda Council on New Growth Models)는 지난 수십 년간의 불평등은 시장중심주의가 낳은 불공정한 결과라고 선언했다. 또 분배 형평성은 소득과 소비의 건실한 성장을 통해 안정적 경제를 이룰 수 있다고 인정했다. 따라서 자본주의를 위해서라도 이젠 분배를 중시하는 새로운 모델이 필요하다.
일각에서는 기술주의적 해석을 제시한다. 컴퓨터가 주도한 기술혁명으로 불평등을 피하기 힘들고, 고용의 어려움도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기술혁명은 산업혁명 이래 자본주의의 숙명과 같은 것으로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진정한 쟁점은 어떻게 기술을 사회와 경제에 이롭게 할 것인가 하는, 정책과 제도의 문제다. 그 옛날 산업혁명 시절에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일자리를 뺏어가는 기계를 파괴하려 했지만, 오늘날 노동자는 러다이트(Luddites·기계파괴론자)가 아니다. 신기술을 배우려는 기술순응주의자에 오히려 가깝다. 어느 때보다 기술 변화의 순효과를 극대화할 조건이 성숙돼 있다는 뜻이다. 기술혁신을 근거로 전파되는 숙명주의는 정책무위론의 손쉬운 핑계이기 쉽다.
‘분배의 재구성’은 곧 일의 재구성이다. 그들의 자본주의에서 노동의 변화는 심대했다. 우리가 익히 아는 노동 개념으로는 오늘의 노동 일상을 아우르기가 힘들다. 노동의 세계도 고임금과 저임금으로 양극화돼 있고, 차별이 구조화돼 있다. 분배의 재구성은 여기서도 필요하다. 일해도 빈곤해질 수 있는 사회에서는, 시민들에게 여하한 상황에서도 기본적인 소득 안정성을 보장해줄 필요가 있다. 현금을 벌어오지 않지만 사회적 가치가 큰 활동도 ‘일’로 당당히 인정하고 사회적으로 보조해줘야 한다. 그렇다고 이 모든 것을 복지에 맡겨서도 안 된다. 지난 30여 년 동안, 기업은 노동자에게 노동생산성에 못 미치는 ‘불공평한’ 임금을 지급했고, 이로 인한 생계의 어려움을 사회에 떠맡겼다. 즉, 노동시장의 분배를 바로잡는 게 급선무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소득분배 정책이 정치적으로나 재정적으로 어려워져서 종국에는 분배 정책 전체가 무너질 위험이 있다.
“운 좋은 자가 운 없는 자에게 부리는 횡포”결국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정치가 문제다. 자본주의 경제를 위해 거침없는 목소리를 낸 루트비히 폰 미제스는 자유방임 자본주의 원리가 영속적 평화의 첫 번째 조건이라고 공언했다. 하지만 러셀은 이 말에 숨겨진 자유의 의미를 오래전에 간파했다. “자본주의 옹호자들은 자유의 신성한 원리에 자주 호소하려고 하는데, 이건 기실 한 가지 격언으로 구체화된다. 운 좋은 자가 운 없는 자에게 아무 걸림돌 없이 횡포를 부릴 자유를 의미한다.” 러셀의 단언은 다소 과장됐지만, 결국 자유의 형식적 존재가 아니라 그 내용을 보라는 경고다. 민주주의도 마찬가지다. 형식적·절차적 민주주의가 존재해 국민의 대표를 뽑는다고 해서 분배 형평성이 높아지는 건 아니다.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의 대런 애서모글루와 그의 동료들의 연구에 따르면, 민주주의가 분배 개선을 해준다는 증거는 아직 없다. 오히려 민주주의는 비대화된 부와 기형화된 권력에 포획될 수 있다. 한쪽으로 부가 쏠리면, 그 부를 기반으로 정치와 정부를 포섭하고 이를 통해 부를 증식하게 하는 정책을 유도해낼 수 있다. 형식화된 정치적 민주주의는 이렇게 경제적으로 비민주적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그들의 민주주의가 그러했다.
따라서 이제는 그들의 자본주의를 그들의 손에서 가져올 때다. 어렵고 낯선 일이다. 하지만 그들의 자본주의는 불안하고 고통스럽다. 그들, 그동안 수고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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