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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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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통의 운명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과 같은 재판부에서 재판받는 원세훈 전 국정원장
판결문 “다소 아쉬움을 남긴다”는 검찰에 힘 실어주지만 특별수사팀 공중분해되고 물증 제출하지 않아 재판부에 질타받기도
등록 2014-02-13 14:50 수정 2020-05-03 04:27
<YONHAP PHOTO-1371> Sjinkie Knegt (R) of the Netherlands' team gestures next to Victor An (L) of the team of Russia celebrating after Russia won the men's 5000m relay final race of the ISU European Short Track speed skating Championships in Dresden, eastern Germany, on January 19, 2014. Russia won the race ahead of the Netherlands (2nd) and Germany. AFP PHOTO / ROBERT MICHAEL../2014-01-20 16:22:57/ <저작권자 ⓒ 1980-2014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Sjinkie Knegt (R) of the Netherlands' team gestures next to Victor An (L) of the team of Russia celebrating after Russia won the men's 5000m relay final race of the ISU European Short Track speed skating Championships in Dresden, eastern Germany, on January 19, 2014. Russia won the race ahead of the Netherlands (2nd) and Germany. AFP PHOTO / ROBERT MICHAEL../2014-01-20 16:22:57/ <저작권자 ⓒ 1980-2014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 이후 100여 건의 관련 형사사건이 서울중앙지법에 쏟아졌다. 신영철 당시 서울중앙지법 원장(현 대법관)은 촛불 사건을 일부 재판부에 몰아줬다. 대법원 예규를 보면, 사건 배당의 원칙은 접수 순서에 따라 기계적으로 재판부에 배분하도록 돼 있다(무작위 배당). 하지만 신 대법관은 특정 재판부를 고집했다. 같은 해 7월14일 몰아주기 배당에 판사들이 집단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자 이튿날부터 ‘무작위 배당’으로 방식을 바꿨다. 배당을 균형 있게 하겠다고 약속하며 신 대법관은 ‘비밀 엄수’를 요구했다. 하지만 그 뒤에도 촛불 사건은 일부 재판부 사이에서 배당됐고, 10건은 특정 재판부에 지정 배당됐다. 대법원은 2009년 3월16일 이에 대한 진상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신 대법관이 지정 배당에 대한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는 점 등에 비추면, 배당 예규의 취지를 벗어나는 사법행정권의 남용으로 볼 소지가 있다.”

쌍둥이처럼 닮은 두 사건

‘촛불 사건 몰아주기 배당’은 재판을 어떤 판사가 맡느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재판부에 따라 형사사건의 유무죄가 엇갈릴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2월6일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에게 무죄를 선고한 서울중앙지법 형사21부(재판장 이범균)는 원세훈(63) 전 국가정보원장의 대선 개입 의혹 사건도 담당하고 있다. 원세훈 전 원장도 무죄를 선고받을 거라는 전망이 일찌감치 정치권에서 나오는 이유다. 게다가 두 사건은 쌍둥이처럼 닮았다. 첫째, 2012년 12월11일 서울 역삼동 국정원 직원 김하영씨의 오피스텔이 출발점이다. 둘째, 같은 검찰 수사팀(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팀)에서 같은 날(2013년 6월14일) 기소했다. 셋째, 두 피고인은 재판에서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차이점이라면 원세훈 전 원장의 대선·정치 개입 사건이 ‘몸통’이고, 이 몸통을 축소·은폐한 게 김용판 전 청장 사건이라는 것이다. 김 전 청장의 판결문을 분석해 은 ‘몸통의 운명’을 가늠해봤다.

“수서경찰서가 2012년 12월16일 발표한 (국정원 직원 불법 선거운동 혐의 사건 중간수사 결과) 보도자료와 17일 언론 브리핑이 시기와 내용 면에서 최선이었는지 다소 아쉬움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경찰은 대선 사흘 전 후보들 간 텔레비전 토론회가 끝나자마자 중간수사 결과 보도자료를 냈다. “디지털 증거분석 결과, 문재인·박근혜 후보에 대한 지지·비방 댓글이 발견되지 않았다.” 이 수사 결과에 재판부가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고 밝힌 이유는 이렇다. “예컨대 (국정원 여직원) 김하영이 40개의 아이디와 닉네임을 사용했음을 확인한 이상 이를 기초로 수사가 확대될 여지가 있음을 밝히는 등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는 방법으로 (경찰이) 업무를 처리할 수도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문재인·박근혜 후보 관련 댓글이 없다’는 당시 경찰의 중간수사 발표가 부적절했음을 인정한 것이다. 또한 국정원의 대선·정치 개입 의혹 사건 수사를 확대해 기소한 검찰에도 힘을 실어준 것이다.

게다가 원세훈 전 원장의 사건에는 김용판 전 청장의 사건보다 훨씬 많은 물적 증거가 있다. ‘원장님 지시·강조 말씀’과 3차장 산하 심리전단 요원들이 남긴 게시글과 추천·반대 클릭 내역이다. “종북좌파들은 북한과 연계해 다시 정권을 잡으려 하는데, 금년에 확실히 대응하지 않으면 국정원이 없어진다.” “야당이 되지 않는 소리 하면 강에 처박아야지. 4대강 문제라 이렇게 떠들어도 뭐. 왜 우리가 가만있어.”(2012년 2월17일 원장님 지시·강조 말씀) 2013년 11월23일 ‘오늘의 유머’ 사이트에 심리전단이 쓴 “연평도 포격 2년… 그늘을 잊었는가”를 보자.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는 천안함 폭침 후 나온 5·24 대북 제재 조처까지 해제하겠다고 한다. 국민은 어떤 후보가 우리의 안보와 국익을 수호하고 책임질 수 있는지를 눈여겨봐야….”

불리한 증언했던 국정원 직원 진술 번복

하지만 유죄를 섣불리 예단할 수는 없다. 김용판 전 청장의 재판에서처럼, 국정원 직원들은 원세훈 전 원장에게 대선·정치 개입을 지시받지 않았다는 취지로 증언했기 때문이다. 검찰에서 원 전 원장에게 불리한 증언을 했던 직원도 법정에서 진술을 번복했다. 심리전단 직원 황아무개씨는 검찰 조사 당시 “원장님 지시가 있으면 (이종명) 차장, (민병주) 국장, 과장(파트장)의 단계적 회의를 거쳐 (지시가) 구체화돼 일선 직원에게 전달된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재판에선 “잘 알지 못하고 당시 내 생각을 진술한 것”이라고 말을 바꾸었다. 앞서 권은희 송파경찰서 수사과장(전 수서서 수사과장)을 제외한 나머지 17명의 경찰관은 모두 김 전 청장의 축소·은폐 지시가 없었다고 진술했다. 이에 재판부는 권 수사과장의 진술을 믿을 수 없다고 배척해버렸다.

물적 증거도 ‘법관으로서의 양심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판결문을 보면, 서울경찰청 분석팀은 ‘이정희 남쪽 정부 발언에 대한 비판’ 글, ‘다음 대선에서 문제인이 당선될 수 없는 이유’ 글에 찬성을 클릭한 사실, ‘저는 이번에 박근혜 찍습니다’ 글을 열람한 사실 등을 확인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국정원 대선·정치 개입을 경찰이 축소·은폐한 것이 아니라고 결론 냈다. “일부 정치 개입 혹은 선거 개입이라고 해석될 여지가 있는 글들을 보았지만, (경찰청) 분석관들은 (국정원 직원) 김하영이 이를 단순 열람했거나 국정원의 대북 업무에 포함된 것으로 판단했다. 따라서 피고인(김용판 전 청장)은 박근혜 지지 또는 문재인 비방 글은 없다는 취지로만 보고받은 것으로 판단된다.”

국정원 대선·정치 개입 사건을 맡았던 검찰 특별수사팀은 이미 완전히 공중분해된 상태다. 지난 1월 평검사 인사로 초기 수사팀 검사 7명 가운데 오직 1명만 남았다. 채동욱 검찰총장 찍어내기로 시작된 수사팀 무력화 작전이 윤석열 수사팀장에 대한 감찰 조사 및 좌천 인사를 거쳐 수사팀 해체로 마침표를 찍었다. 공소 유지에 ‘빨간불’이 켜진 검찰에 재판부는 이렇게 질타했다. “검사는 (경찰청) 분석 과정에서 김하영이 대선 후보, 정당 및 그 정책과 관련된 인터넷 게시 활동을 한 자료가 다수 발견됐다고 주장하면서도 실제로 발견된 자료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물증을 전혀 제출하지 않고 있다.”

재판부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원세훈 전 원장 재판에서도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재판부는 말했다. 검찰이 2013년 11월 2차 공소장을 변경해 국정원 트위터 계정을 2600개 제출했는데 이를 법정에서 제대로 입증하지 못해서다. 원 전 원장 쪽은 일부 트위터 계정이 국정원 직원의 것이 아니라는 반박 증거를 내놓았다. 결국 김용판 전 청장이 무죄판결을 받는 날(2월6일), 검찰은 국정원 직원으로 추정되는 트위터 계정을 1100개로 축소하는 내용의 3차 공소장 변경을 했다.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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