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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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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가장 가난한 자를 받아준 바다

난민·이주자의 평화적 정착을 돕는 이탈리아 리아체의 ‘치타푸투라’ 프로젝트 270명 난민이 죽어가던 도시를 살려
주민들 “저 아이들은 우리 모두의 아이들”
등록 2014-01-02 12:29 수정 2020-05-03 04:27
아프리카·중동에서 온 난민의 아이들이 이탈리아 리아체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다. 나이지리아에서 온 글로리아 자매(오른쪽 첫 번째·두 번째)가 아프가니스탄에서 온 친구들과 리아체 중앙의 놀이터에서 웃음짓고 있다.

아프리카·중동에서 온 난민의 아이들이 이탈리아 리아체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다. 나이지리아에서 온 글로리아 자매(오른쪽 첫 번째·두 번째)가 아프가니스탄에서 온 친구들과 리아체 중앙의 놀이터에서 웃음짓고 있다.

“유토피아가 포함되지 않은 세계지도는 들여다볼 가치도 없다. 그런 지도는 인류가 늘 가닿고자 하는 나라를 빠뜨린 것이기 때문이다.” -영국 소설가 오스카 와일드

수평선이 희미하게 반짝인다. 아담 모하메드(23)는 될 수 있는 한 먼 데까지 시선을 뻗어보았다. 해발 300m 높이의 이탈리아 리아체의 산간마을에선, 아담한 집들 너머로 잔잔하게 일렁이는 이오니아해가 잘 보인다. 마을 사람들이 시에스타(낮잠)에 잠긴 한낮이면, 그는 때로 리아체 시청 앞 광장에 나와 얼마 동안이건 바다를 보며 생각에 잠기곤 했다. 그 바다가, 태어나 매일 보던 홍해가 아니어도 관계없는 일이다. 어차피 물길은 모두 서로 닿게 마련 아니던가.

“그들이 저에게 집을 줬어요”

고향 에리트레아는 홍해에 맞닿은 땅이다. 에티오피아의 한 주였던 에리트레아는 1889년 이탈리아에 병합됐다가 2차 세계대전 이후 다시 에티오피아에 예속됐다. 분리 투쟁 끝에 1993년 독립해 나라를 꾸렸지만 이후에도 분쟁은 지속돼 수만 명이 숨졌다. 오랜 전쟁을 겪은 에리트레아는 지독하게 가난하다. 식량의 70%는 수입·원조에 의존한다. 이렇다 할 산업이 없으니 일감도 없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군인뿐이었죠.” 자유로운 삶도 요원하다. 아버지와 형을 잃은 이야기를 모하메드는 자세히 털어놓기를 꺼렸다. 군벌 출신인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 대통령의 독재로 에리트레아는 세계 최악의 언론 자유 탄압 국가로 꼽힌다.

모하메드는 열흘 전 리아체에 왔다. 19살의 아내, 생후 6개월 된 아들 아흐메드와 함께였다. 번번이 ‘파산 위기에 놓인 지역’으로 꼽히는 가장 가난한 반도의 끝, 칼라브리아주에서도 리아체는 작고 후미진 마을이다. 3천km를 도망쳐온 끝에 마을에 도착했을 때 모하메드는 한숨이 나왔다. 신시가지가 있는 바닷가에서 20여 분간 차를 타고 빙글빙글 산비탈을 돌았다. 바다를 마주 보는 고원지대는 에리트레아와 조금 닮은 데가 있었다. 비탈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회벽 바른 집들은 그다지 유복해 보이지 않았다. 로마든 밀라노든, 돈을 벌 수 있는 대도시로 떠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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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하메드의 생각은 곧 바뀌었다. “그들이 저에게 집을 줬어요. 여기, 리아체 사람들이요.” 2013년 12월9일, 모하메드 가족이 살고 있는 2층집에서는 진한 향신료 냄새가 났다. 모하메드의 아내는 2층에서 주방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세간이 없는 방은 썰렁했지만 끼니때 풍겨오는 양식의 냄새가, 이들 가족의 안온한 일상을 대신 말해준다. 안방 침대 위에선 검고 커다란 눈을 가진 아기가 호기심 어린 얼굴로 이방인들을 올려다보았다. 가난과 학정으로부터 탈출한 난민의 궁색은, 생후 6개월의 아흐메드에겐 아직 미치지 못한 듯 보였다.

이 가난한 마을은 모하메드에게 공짜로 집을 내주었다. 이탈리아의 다른 지역에선 볼 수 없는 일이다. 리아체에 오기 전 모하메드는 시칠리아의 카타니아에서 지냈다. 아프리카에서 바다를 건너 이탈리아에 오는 난민들은 대개 리비아에서 이탈리아령 람페두사섬을 경유해 시칠리아섬을 찍는, ‘중앙지중해 루트’를 거친다.

카타니아에서 모하메드 가족은 ‘커다란 집’에서 지냈다. “4천 명이 같이 지냈어요. 방도 없이 커다란 강당에서 뒤섞여 잤죠.” 난민 수용시설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처럼 비참한 광경이 믿기냐는 듯 모하메드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었다.

어느 날 잘못 떠밀려온 배

리아체의 일상은 다르다. 부부는 날마다 2시간씩 마을 학교에서 이탈리아어를 배운다. 이 또한 다른 지역에선 없는 일이다. 한 사람당 200유로(약 28만원)씩, 월 600유로의 생활비도 지원받고 있다. 운명에 쫓기며 살아온 모하메드는 태어나 처음으로 삶을 계획하고 있다. “지금으로선 이탈리아어를 배우는 게 최우선이에요. 말을 배우고 나면, 어디에서든 일하며 살 수 있겠죠.”

‘치타푸투라’(Citta Futura). 모하메드가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이탈리아어 중 하나다. ‘미래의 도시’라는 뜻이다. 치타푸투라는 난민과 이민자들의 정착을 돕는 리아체시의 프로젝트다. 프로젝트를 위해 1999년 설립된 협회의 이름이기도 하다. 인구 1700명, 면적 16km²의 작은 도시 리아체가 유럽연합을 비롯한 전세계의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은 이 작은 마을에 북적이는 이민자들 때문이다.

모든 변화는 잘못 떠밀려온 한 척의 배로부터 시작됐다. 15년 전, 한 무리의 ‘보트피플’이 해류 때문에 리아체 해변으로 떠밀려왔다. 200여 명의 쿠르드족 난민이었다. 지역 주민인 도메니코 루카노(55)는 그들이 지낼 숙소를 알아보았다. 리아체엔 빈집이 넘쳤다. 일일이 집주인에게 연락해 허락을 구했다. “그때 리아체는 이미 죽어가고 있었어요.”

산간지대인 리아체 구시가지에는 기반 산업이 없다. 바닷가에 구축된 신시가지는 관광이나 어업으로 먹고살았다. 1970년대부터 주민들은 이탈리아 북부로 돈을 벌러 가거나 뉴질랜드·북아메리카로 이주했다. 리아체엔 가게도 식당도 없었다. 아이들이 없는 학교는 문을 닫아야 했다. 원래 역사 교사였던 루카노는 이 일을 계기로 치타푸투라협회를 설립했다.

협회의 이름은 17세기 칼라브리아 도미니크 수도회의 수사 토마소 캄파넬라에게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유토피아를 꿈꿨던 캄파넬라 수사는 저서 에서 이렇게 적었다.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서 선물을 받을 수 없을 때 (세계가) 어떻게 될지에 대해서는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루카노는 “우리 칼라브리아에는 늘 환대의 전통이 있었고, 이제 그것을 되살릴 때가 온 거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5년 뒤인 2004년, 그는 이 작은 마을의 시장이 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우리를 구하고, 우리는 그들을 구할 것이다.” 루카노 시장의 슬로건이다.

마을에 생명을 불어넣는 아이들

그가 당선된 뒤, 리아체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 그새 270명의 난민들이 뿌리를 내렸다. 오전 풍경을 보면, 멀지 않은 과거의 리아체를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마을의 중심인 시청광장에는 60대를 넘긴 노인들이 열을 맞춰 앉아 있다. 지저귀는 새소리가 귀를 간지럽힐 뿐, 사람의 소리가 없다. 구시가지 주민의 대부분은 노인들이다.

시에스타가 끝나는 오후 4시가 가까워오면, 광장은 느닷없는 활기를 띤다. 리아체에 살고 있는 이민자라면, 아이와 어른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학교에 가야 한다. 이탈리아어와 문화를 배운다. 4시에 시작하는 오후 수업을 듣기 위해 다양한 국적과 인종의 아이들이 거리로 나오는 풍경은 이채롭다. 아이들이 없어 문을 닫았던 학교는, 난민들을 위한 교실로 다시 문을 열었다. 광장 한 귀퉁이에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는 리아체의 노인들은 “저 아이들은 우리 모두의 아이들”이라고 말한다.


사막에 핀 꽃처럼, 가난과 분쟁에서 살아남은 아이들은 시들어가던 마을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히잡을 두른 아프가니스탄 소녀 시타라도, “이 동네는 모두 노인들뿐이라서 심심하다”는 이집트 소녀 루지나도, 리아체에서 태어났다는 이탈리아 소녀 루나도 모두 “글로리아”를 외친다.


사막에 핀 꽃처럼, 가난과 분쟁에서 살아남은 아이들은 시들어가던 마을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나이지리아에서 온 글로리아 자매는 그 틈바구니에서도 눈에 띈다. 커다란 링귀걸이에 빨간 바지를 입은 14살 글로리아는 놀이터를 메운 아이들의 ‘왕언니’쯤 된다. 히잡을 두른 아프가니스탄 소녀 시타라도, “이 동네는 모두 노인들뿐이라서 심심하다”는 이집트 소녀 루지나도, 리아체에서 태어났다는 이탈리아 소녀 루나도 모두 “글로리아”를 외친다. 글로리아의 손을 잡은 조그만 흑인 소녀의 이름도 글로리아다.

“내 이름은 원래 니예예요. 동생은 티미고요. 이민국에서 증명서에 이름을 적어줬는데, 둘 다 글로리아래요. 이유는 몰라요. 다들 큰 글로리아, 작은 글로리아, 그렇게 부르죠.” 이탈리아어, 아프가니스탄어, 아랍어, 영어. 모국어도, 믿는 신도 모두 다르지만 아이들은 너나없이 서로 정겹다. 글로리아는 새 친구들도, 새집도, 새 이름도 마음에 든다. 무엇보다 엄마의 표정이 전보다 밝아졌다.

글로리아 자매의 엄마 타요 아무(34)는 3년 전 남편과 두 딸과 함께 이탈리아에 왔다. 나이지리아의 언론인이던 아무는 이슬람에 대해 비판적으로 쓴 글 때문에 가택연금되었다. 리아체에서 그녀는 자수공예 워크숍에 참여하고 있다. 워크숍에 참여하면 월 500유로(약 72만원)의 지원금이 추가로 나온다.

리아체시는 현지 주민과 이주민의 ‘통합’을 중요시한다. 공방에서 리아체 주민으로부터 뜨개질을 배우고 있는 아프가니스탄·나이지리아 여성들, 청소노동조합에서 함께 일하고 있는 주민 다미아노와 가나 출신 이주민 대니얼, 열흘 전 리아체에 도착한 에리트레아출신 난민 모하메드의 가족(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리아체시는 현지 주민과 이주민의 ‘통합’을 중요시한다. 공방에서 리아체 주민으로부터 뜨개질을 배우고 있는 아프가니스탄·나이지리아 여성들, 청소노동조합에서 함께 일하고 있는 주민 다미아노와 가나 출신 이주민 대니얼, 열흘 전 리아체에 도착한 에리트레아출신 난민 모하메드의 가족(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난민의 자립 능력을 북돋는 워크숍은 치타푸투라 사업의 핵심 과제다. 여성들을 대상으로 뜨개·유리공예·도예 워크숍을 운영 중이다. 칼라브리아의 이웃 도시들도 이 사업을 벤치마킹하고 있다. 치타푸투라협회 직원인 안토넬라(42)는 “새로 도착한 사람들이 리아체를 떠나더라도 기술을 배워 새로운 삶을 꾸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정책의 목표다”라고 설명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테그라치오네’(Integrazione·통합)다. 지역 주민과 이주민을 유기적으로 결합시키는 것이다. 아무에게 기술을 가르치는 이는 리아체 주민 카테리나(51)다. 안토넬라는 “리아체의 지역 주민과 이주민이 일대일로 일하도록 하고 있다. 이를 통해 이주민들은 빠르게 이탈리아 문화와 언어를 습득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가정주부였던 카테리나는 이 일을 시작하면서 직장을 갖게 됐다. “결과적으론 두 사람의 일자리가 생긴 거죠. 치타푸투라는 나에게도 아주 큰 도움이 됐어요.” 카테리나가 말했다.

카테리나처럼 다미아노(50)도 새 일자리를 구했다. 리아체에서 태어난 그는 젊어서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북부를 돌았다. 공장에 다니거나 공사장에 나갔다. 대부분의 남자들이 다미아노와 비슷한 삶을 살았다. 3년 전, 이주민을 위한 청소노동조합 ‘아퀼로네’가 생기면서 그도 고향에 다시 뿌리내릴 수 있었다. “하루 100유로씩 벌 때보다 30유로를 버는 지금이 더 좋습니다. 어쨌든 고향에서 친구들과 함께 있으니까요.” 다미아노가 가나에서 온 단짝 동료 대니얼(32)을 보며 웃음지었다.

‘제노포비아’의 한가운데서

리아체 사람들은 난민들과 함께 살면서 “지역 경제도 나아졌다”고 말한다. 난민들의 정착지원금은 고스란히 지역 내에서 소비된다. 물론 모든 변화는 국내총생산(GDP)에도 잡히지 않을 미미한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지구 어딘가의 가난한 마을에서, 우리 사회가 한 번도 상상하지 않은 인류애의 지평은 분명히 실재하고 있다.

리아체 주민들이 특별히 우리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한 인류는 아닐 것이다. 그들은 그저 저물어가던 마을에 실질적인 생기를 가져온 이들에게 감사를 표할 뿐이다. 쇠락하는 마을은 기반시설을 짓거나 예산을 붓는다고 살아나지 않는다. 사람만이 마을을 살릴 수 있다. ‘가난한 사람들이 리아체를 구하고, 리아체가 그들을 구할 것’이라던 루카노 시장의 공약은 천천히 실현되고 있는 셈이다.

2010년 1월 칼라브리아의 로사르노 지역에선 주민과 이주민의 갈등으로 차별에 반발한 이주민 수백 명이 마을에 불을 지르는 등 폭동을 일으켰다. 결국 1천여 명의 이주민이 인근 수용시설로 이송됐다. 제노포비아(이주민 혐오)가 심각한 이탈리아 남부에선 종종 비슷한 갈등이 일어난다. 15년을 이주민과 어깨를 맞대고 살면서 리아체에선 마주친 적 없는 일이다.

지방자치와 좌파정치의 역사가 깊은 이탈리아의 이야기는 그 역사를 공유하지 않은 우리에게 물선 이야기일지 모른다. 그러나 주민들을 설득해 완전히 새로운 이주민 정책을 펼치고 있는 루카노 시장은 어느 정당에도 속한 적이 없다. 다만 그는 넬슨 만델라와 간디, 체 게바라, 로자 파크스로부터 영감을 얻는다고 했다. 이주민을 배척이나 증오의 대상으로 보기보다 인류애 관점에서 포용하려는 개방성이 결여된 것은, 어쩌면 개방성과 포용성을 북돋는 리더가 우리에게 없기 때문은 아닐까.

리아체(이탈리아)=글·사진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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