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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죄가 아니야, 어떤질문도 괜찮아”

‘그냥 대화하자’는 아이디어에서 휴먼라이브러리 시작한 로니 아베르겔 인터뷰
등록 2014-01-14 14:57 수정 2020-05-03 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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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청소년. ‘휴먼라이브러리’를 창립한 로니 아베르겔(41)의 사람책 목차는 다소 의외다. 1993년 덴마크 코펜하겐 시내에서 한 10대 청소년이 칼에 찔려 숨졌다. 길에서 사소한 폭행 시비가 붙었는데 칼부림으로까지 번진 것. 아베르겔도 그 자리에 있었다. 숨진 사람은 친한 친구였다. 그 뒤 아베르겔은 비폭력 청소년운동에 뛰어들었다.

한국의 ‘닫힌 문화’를 여는 도전이 되길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은 또 우연히 찾아왔다. 2000년 한 음악축제에 ‘서로 미워하는 사람들이 좋은 이웃으로 성장하게 하는 이벤트를 개최해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아베르겔은 단순한 아이디어를 냈다. ‘그냥 대화를 하자.’ 다양한 사람들과 대화를 하면 남을 이해하게 되고, 편견을 없애면 폭력도 줄어든다는 생각이었다. 행사는 4만 명이 참가하는 대성공을 거뒀다. 전세계 70여 개국으로 퍼진 ‘휴먼라이브러리’ 운동의 시초였다.

지난해 12월6일, 코펜하겐 시내의 한 사무실에서 아베르겔을 만났다. 그는 덴마크노총에서 출판·언론 담당자로 잠시 일하고 있었다. 휴먼라이브러리와 관련해 ‘테드’(TED) 강연에 출연하는 등 세계 곳곳을 누비며 그는 인권 저널리스트, 환경 다큐멘터리 기획자 등으로도 일해왔다.

아베르겔은 “2월 한국에서 열릴 컨퍼런스는 휴먼라이브러리를 짧은 시간에 확산시킬 큰 기회”라고 기대했다. 특히 그는 휴먼라이브러리 운동이 한국 사회의 ‘닫힌 문화’를 여는 도전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한국은 마치 사회가 하나의 꽉 짜인 상자 안에 들어 있는 듯하다. 학생들이 아침부터 밤까지, 심지어 버스 안에서도 공부하는 모습은 충격적이다. 노동자들은 유럽보다 2배 이상 오래 일한다. 한국 사람들이 유명인의 가십에 즐거워하는 건, 정형화된 틀에서 벗어난 얘깃거리이기 때문이다. 휴먼라이브러리는 그 가면을 벗어던지고, 잠시만 휴식하면서 사람과 사람이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깊은 마음속 이야기를 꺼내보자는 거다.”

이를테면 “조용한 호수에 돌을 던지자”는 뜻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한국 사람들은 큰 몸짓을 섞어 말하지 않는 것만 봐도, 부끄러움이 많고 소심한 면이 있다. ‘난 동성애자야’라고 말하는 게 한국에선 굉장히 부끄러운 일이다. 그걸 열린 대화의 공간으로 초대하는 거다. ‘당신의 죄가 아니다’라고 깨닫도록. (사람책뿐 아니라 독자 입장에서도) 소심한 한국 사람들이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도 된다. ‘어떤 질문을 해도 괜찮아’라고 응원해주는 거다. 공사장 인부와의 대화를 통해 편견을 없애는 게 사회 양극화가 심한 한국 사회에 새로운 해법을 던질 수도 있다.”

세계적이지만 굉장히 지역적인 운동

아직 한국에 와본 적이 없다면서도, 그는 한국에 대해 깊은 관심과 고민을 드러냈다. “휴먼라이브러리는 ‘우리 학교에서 사람책을 빌려줘보면 어떨까?’ 하는 단 한 사람의 생각으로부터 시작되기도 한다. 한국 컨퍼런스에서 도서관·공공기관·지자체·시민단체 등 여러 아이디어가 모이면 확산에 가속도가 붙을 거다.”

하지만 정작 운동이 시작된 덴마크에서는 요즘 활동이 뜸하다. “500명의 사람책이 있긴 한데, 2011년 이후로는 아무런 이벤트 행사도 열지 않고 있다. 덴마크 정부가 휴먼라이브러리 활동 지원에 소극적이기 때문이다.” 아베르겔은 덴마크 정부의 보수적인 태도에 단단히 화가 나 있었다.

휴먼라이브러리는 세계적으로 퍼져 있긴 하지만, 사실은 굉장히 ‘지역적’인 운동이다. 덴마크에 있는 사람책을 한국으로 빌려오긴 쉽지 않은 공간의 한계 탓이다. 각 나라의 문화적 차이도 크다. “영국에선 TV 다큐멘터리를 통해 빨리 알려졌다면, 완벽함을 중시하는 일본에선 천천히 흘러가는 식”이다. 아베르겔은 “우린 씨를 뿌릴 뿐이다. 그 씨를 어떻게 가꿔서 꽃으로 피울지는 각 나라의 상황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오는 2월 그는 ‘씨앗’을 품고 한국에 온다. 로니 아베르겔이라는 사람책에는 최근 ‘싱글대디’라는 단어가 새로 추가됐다. 2013년 5월 그는 아내를 암으로 잃었다. 슬픔으로 가득 찬 가슴 한켠에, 희망의 씨앗을 품고 온다.

코펜하겐(덴마크)=글·사진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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