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촛불이다.
6월14일 검찰 수사 발표로 드러난 국가정보원의 대선 여론 조작, 정치 개입 의혹은 사람들을 광장으로 불러내기에 충분했다. 검찰은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취임 뒤 줄곧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야당·시민단체·노조를 ‘종북좌파’로 만들고, 노골적인 선거 개입을 진두지휘한 사실을 밝혀냈다. 그러나 청와대는 입을 닫았고, 새누리당은 주춤거렸다. 결국 긴 장마 속에 켜켜이 쌓인 대중의 분노는 촛불집회로 이어지고 있다. 말 그대로 ‘시나브로’ 커지고 있는 중이다.
촛불 심지에 가장 먼저 불을 댕긴 이들은, 대학생이다. ‘21세기한국대학생연합’(한대련) 소속 대학생 30여 명은 6월21일 저녁 서울 광화문 KT 본사 앞에 모여 촛불집회의 시작을 알렸다. 이날 무대 뒤 지하철역 난간에는 ‘국정원 규탄 민주주의 수호 대학생 촛불문화제’라고 쓰인 펼침막이 내걸렸다. 자유롭게 청중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이른바 ‘토크 콘서트’가 벌어졌다. “국정원의 실체, 어땠습니까? 드라마에서 보던 것처럼 멋졌습니까? 아닙니다. 완전히 찌질한 ‘키보드 워리어’의 모습이었습니다.”이날 대학생들이 쏟아낸 말에는 ‘국정원’과 ‘반값 등록금’, 그리고 ‘박근혜’라는 공통분모가 있었다. 그 연결고리를 따라 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한대련 등 대학생들은 2011년 이맘때 반값 등록금 도입을 촉구하는 촛불집회를 열었다. 그러나 경찰은 집회에 참가한 학생 가운데 150여 명을 연행·기소했고, 약 1억5천만원의 벌금을 부과했다. 국정원의 선거 개입 의혹이 불거지는 과정에서는, 국정원이 학생들의 반값 등록금 운동을 막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담은 문건을 만들었다는 내용이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 반값 등록금을 막아선 국정원→그 국정원의 대통령 선거 개입→선거 개입 논란 속에 당선된 박근혜 대통령→그 박근혜 대통령이 침묵하고 있는 반값 등록금 공약. 국정원을 꼭짓점으로 시작해 마치 ‘끝말잇기’처럼 이어지는 현실에 분노한 대학생들이 거리로 나온 것이다. 광화문 일대에서 소규모로 열린 촛불집회는 6월 말까지 이어졌다.
각 대학의 학생회 등에서 자발적으로 실시한 릴레이 시국선언도 촛불집회에 힘을 보탰다. 서울대·이화여대·경희대·성공회대 총학생회는 6월20일 국정원의 선거 개입과 경찰의 축소 수사를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시국선언은 곧 교수·종교단체 등으로 확산됐다. 그 다음날에는 전남대 총학생회,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실천불교전국승가회 등이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고등학생도 시국선언 대열에 합류했다. 산청·금산·제천간디학교와 산마을학교 등 대안학교 4곳의 학생들이 6월30일 서울 광화문광장에 나와 국정원의 선거 개입을 규탄하는 시국선언을 발표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969호 표지이야기 ‘시국선언의 시작은 돈가스덮밥!’ 참조). 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 소속 교수 1천여 명도 시국선언에 동참했다. 6월 말~7월 말에 전국적으로 대학생·교수·청소년·전문직, 그리고 종교계 등에서 국정원 규탄 시국선언에 참여한 이는 1만8천여 명에 이른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기폭제가 됐던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4·13 개헌 추진 중단 선언을 규탄하는 시국선언(당시 두 달 동안 5500여 명)에 동참한 인원보다 훨씬 많다.
경찰은 학생들의 촛불집회를 막아섰다. 매일같이 열리는 촛불집회가 자칫 2008년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처럼 대규모로 번지는 것을 막으려는 듯 강경 대응을 했다. 6월23일 서울 청계광장 옆 파이낸스빌딩 앞에서 열린 촛불집회를 경찰이 진압하는 과정에서 고등학생의 얼굴에 최루액을 발사해 논란을 빚기도 했다. 당시 한대련이 파악한 내용을 보면, 경찰이 그즈음 계속된 집회에 참여한 시민 32명에게 소환장 또는 출석요구서를 보냈는데 이 가운데 대학생만 28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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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규모 촛불집회로 불씨가 옮겨붙은 계기는, 남재준 국정원장의 북방한계선(NLL) 대화록 공개와 박근혜 대통령의 이른바 ‘국정원 셀프 개혁’ 주문이 알려지면서다. 남 원장은 국정원의 대선 여론 조작, 정치 개입 의혹을 밝힌 검찰 수사 발표 열흘 뒤, NLL 논란의 핵심이던 남북 정상회담 회의록 내용을 공개했다. 국정원 대선 개입 정국의 흐름을 바꾸기 위한 ‘꼼수’였다. 민심은 촛불로 그대로 전해졌다. 금요일(6월28일) 전국적으로 국정원을 규탄하는 촛불집회가 이어졌고, 서울 시청광장에서 열린 ‘1차 범국민대회’에는 모두 5천 명(경찰 추산 1800명)이 모였다. 박근혜 대통령이 국무회의를 통해 “국정원 자체적으로 개혁을 추진하라”는 지시를 내린 뒤 열린 3차 범국민대회(7월13일)에는 2만 명(경찰 추산 5500명)까지 참여 인원이 늘었다. 여야가 국정원 국정조사에서 증인 채택 합의에 실패하고, 민주당이 장외 투쟁을 선언한 뒤 열린 8월3일 촛불집회에서는 3만 명(경찰 추산 4000명)이 서울 시청광장에 모이는 등 촛불집회 참여 인원은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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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 인원이 늘어나면서 시민사회단체도 본격적인 행보에 나섰다. 5년 전 촛불집회가 이어지면서 시민사회단체가 ‘광우병국민대책회의’를 결성한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6월27일에는 시민사회단체 280여 곳이 참여한 ‘국가정보원 정치공작 대선개입 진상 및 축소은폐 의혹규명을 위한 시민사회 시국회의’(시국회의)가 출범했다. 시국회의는 주말마다 서울 시청광장과 전국에서 열리는 범국민대회 일정 등을 조율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시국회의는 8월10일 ‘10만 국민 촛불대회’가 촛불집회의 향배를 가를 것으로 보고 있다. 한동안 파행을 빚었던 국회 국정원 국정조사가 다시 열리고, 여야가 합의한 증인 출석 등의 결과에 따라 국정원 정국에 변화가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국정조사가 마무리되는 주말인 8월24일도 민심을 표출할 수 있는 시기로 보고 있다. 그러나 변수도 많다. 8월15일 광복절부터 주말은 징검다리 휴일이라 촛불집회 참여율이 줄어들 수 있다. 그리고 정치권의 상황에 따라 국정조사증인 출석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면, 촛불집회가 장기화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시국회의는 지난 8월8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기자회견을 열며 촛불집회 참여를 적극 호소했다. 박석운 한국진보연대 공동대표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여전히 국정원의 대선개입을 정당한 업무 수행으로 몰고 가는 현 사태가 매우 심각하다”며 촛불집회 참여를 호소했다. 국정조사가 재개됐지만 답보된 상황이 오래갈 경우 촛불집회의 동력도 떨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광우병 때와는 다른 흐름
촛불집회 참가자는 늘고 있지만 예전보다 호응이 더딘 점은 시국회의의 고민이기도 하다. 2008년 촛불집회는 평일에도 집회가 열렸지만, 현재는 주말을 중심으로 촛불집회가 열리고 있다.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 자체가 “국가권력이 민주주의를 침해했다”는 문제로 읽히는데도 불구하고, 5년 전과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먹을거리의 위험성이라는 접근하기 쉬운 문제로 시작해 4대강 사업, 공기업 민영화 등으로 공감대를 넓혀간 광우병 쇠고기 반대 촛불집회와 달리, 아직까지는 국정원 대선 개입문제가 대중에게 ‘먼 이야기’로 읽힌다는 점을 지적한다. 광우병 쇠고기 반대 촛불집회는 먹을거리·외교주권의 문제와 결합하며 공감대를 얻었고, 청소년들의 시위 참여가 대중적 집회로 가는 도화선이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와 다르게 지상파 방송사 등이 촛불집회를 제대로 다루지 않는 등 언론 지형이 변화한 점을 감안하더라도 현재 상황은 대중이 국정원 정국의 흐름 자체를 따라가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조대엽 고려대 교수(사회학)는 “정치 민주화는 우리가 공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고, 개인적 삶도 공적인 삶을 보장받을 때 윤택해질 수 있다. 국정원 이슈도 그런 해석의 연장선에서 대중이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 부분이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는 “현 상황이 국정원 비민주성, 선거 개입, 불법성 등의 단어로만 읽힌다면, 촛불집회 참여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서동진 계원예대 교수(교양과정부)는 “개인적 측면에서 촛불집회는 분명히 개입해야 하는 이슈로 받아들여지지만, 촛불집회를 통해 (국정원 사태에 대해) 어떤 형태의 대안을 만들 것이냐는 논의는 빠져 있어 참여에 대한 저항감이 생길 수 있다”고 말했다.
현재 시국회의는 촛불집회를 통해 국정원 국정조사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5년 전에는 자발적으로 촛불집회에 참여한 이들의 요구사항을 시민사회단체가 받아들이고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지만, 이번에는 국정원 대선 개입 문제를 시민들의 일상생활에 가깝게 끌어내리는 역할을 해야 한다. 국회에서 민의가 반영되지 않는 상황에서 국정조사가 정상적으로 진행되도록 야당에 힘을 실어줘야 하는 역할도 맡고 있다. 여야가 국정원 사태에 대한 조사를 정치적 절충이나 눈치보기로 끝내거나, 미봉적 타협에 그치지 않도록 압박해야 하는 시기다.
시민이 가깝게 문제를 느낄 방법은
시국회의를 이끄는 박근용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은 “박 대통령이 김기춘 비서실장 등 유신 시절 인사를 내각에 앉히며 국정원 정국에 대해 본인 나름의 답을 표현한 것”이라며 “국민이 흔들리지 않고 국정조사를 통한 진상 규명과 처벌을 요구한다면, 박 대통령의 정국 전환을 위한 행보에 대한 국민의 구체적 반응을 보여주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시나브로 커진 촛불은 불볕더위의 한가운데에서 과연 타오를 수 있을까.
김성환 기자 hwany@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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