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국으로 치닫는 듯했던 국정원 국정조사(국조)가 일단은 다시 궤도에 오르려 한다. 그러나 궤도에 올라 전진이 가능할지는 불투명하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국조를 지켜본 이들은 이미 김이 빠져버렸다.
국정조사 특별위원회(특위)는 지난 8월5일 국정원의 기관보고를 진행한 데 이어, 애초 8월15일까지였던 기간을 연장하기로 했다. 8월7~8일 이틀로 예정됐던 청문회는 날짜를 바꾸고 하루를 보태 8월14·19·21일 세 차례에 걸쳐 실시하기로 했다. 증인 채택에서도 여야는 1차적으로 증인 29명, 참고인 6명의 명단을 확정지었다. 이번 국정조사의 ‘대어’ 격인 원세훈 전 국정원장과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은 청문회 첫날인 8월14일, 나머지 증인은 둘쨋날인 19일에 소환하기로 했다. 아직 합의를 보지 못한 증인과 출석하지 않은 증인은 8월21일에 소환한다.
증인 명단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뉜다. 댓글 등을 통한 국정원의 선거 개입 사건, 경찰의 수사 결과 축소·은폐 사건, 그리고 새누리당이 주장하는 민주당의 ‘매관매직’ 및 국정원 직원 ‘감금’을 통한 인권유린 사건이다.
국정원 선거 개입 사건과 관련해서는 구속 중인 원세훈 전 원장 외에 이종명 전 국정원 3차장, 민병주 전 심리전단 단장, 최형탁 심리전단 소속 팀장 등 댓글 사건의 당사자인 국정원 직원 김하영(당시 28살)씨의 직속 상관들이 포함됐다. 특위는 8월7일 증인 명단을 발표하면서 김하영씨의 실명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그러나 청문회 당일 얼굴까지 공개할지는 미지수다. 국정원 직원법은 비밀·첩보 업무를 맡는 요원들의 신원을 노출하지 못하도록 한다. 특위는 국정원 직원들이 증인석에 설 때 칸막이 및 이동식 커튼을 설치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쟁점이 됐던 박원동 전 국정원 국익정 보국장도 증인 명단에 포함됐다. 그는 대선 사흘 전인 지난해 12월16일 김용판 당시 서울경찰청장에게 전화를 걸어 ‘선거 개입 증거 없음’이란 중간 수사 결과 발표를 독촉한 인물이다. 박 전 국장은 당일 권영세 당시 새누리당 선대위 상황실장(현 주중대사)과 여러 차례 통화를 한 사실도 밝혀진 바 있다. 민주당이 이번 국정조사에서 ‘권영세-김용판-박원동’ 3각 구도의 실체를 입증해낸다면, 국정원 관련 수사 결과 축소 발표에 새누리당이 명백히 관여한 게 된다. 박 전 국장의 증인 채택에 총력을 기울여온 민주당은 청문회를 벼르는 표정이다. 김무성 새누리당 의원이나 권영세 대사의 증인 채택은 새누리당이 완강히 거부하고 있다.
경찰 수사 축소·은폐 사건 관련 증인으로는 구속 중인 김용판 전 청장 외에, 김 전 청장의 개입을 폭로한 권은희 당시 수서경찰서 수사과장과 국정원 댓글 자료를 분석한 조사관들이 대거 채택됐다. 최근 잇따라 공개된 서울경찰청 디지털증거분석실 폐쇄회로텔레비전(CCTV) 화면을 보면, 경찰은 이미 김하영씨의 활동 내용을 상당 부분 파악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선거를 사흘 앞둔 시점에 ‘선거 개입 증거없음’이란 발표를 내놓게 된 과정에 대한 집중 추궁이 예상된다.
새누리당이 주장하는 민주당의 ‘매관매직’ 및 국정원 직원 ‘감금’사건과 관련해선, 강기정 민주당 의원이 사건 당시 문재인 민주당 후보 캠프의 간부였다는 이유로 증인으로 채택됐다. 현역 의원으로선 유일한 증인이다. 민주당에 김하영씨 관련 사실을 제보한 전직 국정원 간부 김상욱씨 등도 포함됐다. 새누리당은 그동안 ‘인권유린’과 ‘매관매직’이란 프레임을 강조하며, 사건에 대한 관심의 초점을 애써 돌려놓으려 했다. 국정원의 선거 개입이나 경찰의 수사 축소·은폐 등 이슈만 부각되면, 새누리당은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다. 청문회에서도 새누리당은 ‘프레임 전환’을 통한 반전을 시도할 전망이다.
새누리, ‘매관매직’으로 프레임 전환 시도
야당은 청문회를 통해 이번 사건의 부조리와 부당성을 대대적으로 홍보할 생각이다. 걱정스러운 것은 국민의 무관심이다. 민주당은 8월1일 ‘무기한’을 선언하고 서울광장에 천막 상황실을 마련했다. 그러나 생각만큼 국민의 호응이 좋진 않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촛불을 사실상 ‘불법 세력’으로 규정하는 보수언론은 ‘민주당의 장외투쟁이촛불과 어떤 방식과 규모로 결합하는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민주당은 적극적으로 나서기도 부담스럽다. 장외투쟁이 열흘도 되지않은 시점에 ‘출구전략’을 거론하는 목소리도 당내에서 나온다. 아무런 대안도 없이 장외 싸움만 이어갈 순 없는 것 아니냐는 논리다. 시간이 갈수록 당내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이해관계에 따라 더욱 복잡하게 얽힐 수밖에 없다.
반면 새누리당은 국정원 사건 관련 사항은 일체 국조에 넘겨놓고, 이른바 ‘민생 행보’에 나섰다. 최근 새누리당 지도부는 전방 부대, 대학 창업 현장, 코넥스 시장(중소기업 전용 주식시장) 등을 방문하며 ‘정치권은 정쟁을 중단하고 민생에 집중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강조하고 있다. 국회의 새누리당 소속 의원들은 9월 정기국회가 열린 뒤 시작할 국정감사 준비에 일찌감치 돌입하기도 했다. 국감 준비에 몰두하고 있다고 밝힌 새누리당 소속의 중진 의원실 관계자는 “국정원이니 북방한계선(NLL)이니 일반 국민의 삶과는 아무 상관이 없지 않나. 국회의원 본연의 임무를 소홀히 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민생과 원내 활동 같은 원칙만 강조하면 되는 여당이, 부여잡은 현안을 자세히 설명하면서 국민적 관심까지 호소해야 하는 야당보다 한결 여유로워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국민적 홍보와 공감을 목표로 하고 있는 야당에게는 현재 잡혀 있는 청문회 일정도 녹록지 않다. 8월14일 첫 청문회는 박근혜 정부의 ‘벼랑 끝 전술’로 성사된 7차 개성공단 실무회담과 날짜가 같다. 8월19일 두 번째 청문회는 을지프리덤가디언 훈련 시작일과 날이 겹쳤다. 협상의 향배나 북한의 반응에 따라 국민적 관심이 분산될 가능성이 크다. 지난 8월5일 국정원의 기관보고도 청와대의 참모진 개편과 같은 날 열렸다. 이날 국정원 심리전단의 확대 개편이 이명박 전 대통령의 재가 아래 진행됐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출석 않으면 ‘국조 거부’ 다시 나올 듯
민주당은 원세훈 전 원장과 김용판 전 청장이 출석하기로 예정된 8월14일 청문회를 향후 방향을 결정할 기준으로 삼을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 모두 출석 여부를 확답하진 않았지만, 부정적인 반응이 감지된다. 원세훈 전 원장을 변호하는 이동명 변호사는 “본인이 결정할 문제지만, 최근 면담에서 안 나가실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김용판 전 청장은 청문회 당일이 두 번째 공판 준비 기일과 겹쳤다. 만약 두 사람 모두 출석하지 않는다면, 민주당에서는 ‘국조 거부론’이 다시 한번 불거질 전망이다. 민주당이 다시 국조를 박차고 뛰쳐나가면 국조는 결국 아무 성과 없이 끝나게 된다. 그러나 원 전 원장이나 김 전 청장 없이 국조를 그대로 진행시켜도, 성과가 없긴 마찬가지다.
김외현 기자 oscar@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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