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정보위원장을 맡고 있는 서상기 새누리당 의원(대구 북구을)이 6월20일 오후 4시45분 새누리당 동료 의원들과 서울 여의도 국회 본관 1층 정론관 기자회견장에 입장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선 그가 입을 열었다.
휴지 조각 된 보안각서
“오늘 본 의원은 공공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에 근거해 국가정보원의 2007년 남북 정상회담 기록 중 노무현 전 대통령의 NLL 발언에 대한 열람을 공식 요청했습니다. 이 공식 자료를 정보위 소속 의원들과 검토한 결과, 2007년 남북 정상회담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NLL을 포기하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을 확인했습니다.”
‘야당이 계속 부인하면 전문을 공개하겠다’는 엄포를 놨을 뿐, 내용을 직접 인용하진 않았다. 뒤이어 마이크를 잡은 이들도 구체적인 내용은 없이 “가슴이 많이 뛴다”(조원진·대구 달서병), “정말 부끄럽다.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조명철·비례), “할 말이 없다”(윤재옥·대구 달서을) 등 뚱딴지같은 감상 소감만 밝힐 뿐이었다. 이는 ‘열람한 내용을 외부에 유출하지 않겠다’는 보안각서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앞서 오후 4시5분부터 본관 5층에 있는 정보위원장실에 모여 한기범 국정원 1차장이 가져온 관련 기록물을 40분가량 열람했다. 보안각서는 휴지 조각이었을까. 이튿날 등에는 ‘열람한 의원들’의 입을 빌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발언 내용이 보도됐다. 서상기 위원장은 “(나를 뺀) 나머지 정보위원 4명이 ‘라인바이라인’(한 줄씩)으로 외우다시피 했다”고 했다. 사진 촬영이나 필사가 허용되지 않는 상황에서 사실상 ‘유출’을 목적으로 암기 실력을 뽐낸 셈이다.
이 자리에 야당 의원들은 없었다. 서상기 위원장은 야당 의원들에게도 통보했다고 밝혔지만, 실제로는 열람 1시간 전인 오후 3시7분 서상기 의원실 ㅈ 보좌관이 정보위 야당 간사인 정청래 민주당 의원의 ㅇ 보좌관에게 전화를 건 게 전부였다.
서 위원장 쪽 ㅈ 보좌관은 전화를 통해 “NLL 대화록에 대해 서상기 의원이 개인 자격으로 열람을 요청했는데, 지금 국정원에서 오고있다. 4시부터 보기로 했으니 야당 의원들도 왔으면 좋겠다. 정청래 의원에게 전해달라”고 했다. 여야 합의에 기반한 스케줄은 물론 아니었고, 야당 의원들로선 준비하기도 빠듯했다. 경북 문경에 있던 ㅇ보좌관은 즉각 정청래 의원에게 전화로 보고했다. 그제야 상황을 공유한 민주당 의원들은 국정원을 접촉하면서 서둘러 국회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새누리당 의원들만 입회한 ‘열람’을 마치고 황급히 계단을 내려가는 한기범 차장의 모습이 민주당 한 보좌진의 카메라에 담기기도 했다.
관건은 국정원장의 결단모든 게 갑작스럽고 뜬금없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7년 남북정상회담에서 했다는 서해 북방한계선(NLL) 관련 발언 논란은 지난해 10월 통일부 국정감사에서 정문헌 새누리당 의원이 제기하면서 시작됐고, 지난해 대선에서 중요하게 다뤄진 이슈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지금에 와서 새삼스레 거론될 만한 계기는 없었다. 민주당이 ‘허위 사실 유포’라며 고발했던 관련 송사도, 지난 2월 검찰이 “허위 사실로 보기 어렵다”며 무혐의 처분한 터였다. 한 신문은 ‘야당이 허를 찔렸다’고 표현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국정원의 태도가 바뀌었다는 점이다. 지난해 10월 논란이 처음 불거졌을 때 원세훈 당시 국정원장은 비공개 국정감사에서 “여야가 합의해서 온다면 공개 여부를 판단하겠다”고 했다. 여당은 줄기차게 대화록 공개를 요구하고 야당은 반대해 입장 차가 극명하게 갈렸던 상황임을 감안하면, 국정원이 사실상 거부한 셈이다. 당시 서상기 정보위원장은 원세훈 원장을 직권남용과 직무유기 등의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관건은 국정원장의 결단이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박근혜 정부의 첫 국정원장인 남재준 원장은 이 사건에 대해 공식적인 견해를 밝힌 바 없다. 다만 민주당 의원들이 갑작스런 자료 열람에 항의하며 국정원을 접촉했을 때, 국정원에선 “여야가 합의해서 요청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는 답이 돌아왔다고 한다. 새누리당 의원들만 자료를 열람하는 상황이, 상식적으로 ‘여야 합의’일 리 없다. 국정원과 새누리당의 교감이 초래할 수 있는 문제를 우려해 국정원이 거짓 답변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여야 합의’는 더 이상 필요조건이 아니었던 셈이다.
그런 면에서 남재준 원장의 판단은 원세훈 전 원장과 달랐다. 그 배경은 국정원이 거짓 답변을 해야만 했던 이유에 해당할 것이다. 혹자는 남 원장의 ‘털고 가자’는 인식을 지목한다. 그가 추진하는 국정원 개혁 방향이 국내 파트 축소, 대북 정보 및 산업안보 강화인 이상, 개혁에 부담이 될 수 있는 국내 정치 문제에서는 발을 빼고 싶어서 태도를 바꿨을 거란 시각이다.
과연 공개해도 되는 자료인가남 원장의 ‘물타기’ 의혹을 제기하는 이도 있다. 서상기 위원장이 기자회견을 하던 날 오전 여야는 국정원에 대한 국회 국정조사에 합의했다. ‘검찰 수사’ 완료 시점을 언제로 볼지 등 의견 차가 없진 않았지만, 국정원 선거·정치 개입 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와 재판 이외에 국회에서의 정치적 진상 규명 절차가 확정된 셈이다. 여야가 국정원 개혁에 ‘즉각’ 착수한다는 합의도 함께 나왔다. 불리한 상황에 부담을 느낀 국정원이 새누리당에 ‘역공 카드’를 제공했다는 시각이다. 쇄신 의지가 됐든 물타기가 됐든 새누리당으로선 환영할 일이다. 국정원과 이해가 맞아떨어진 것이다. 지난해 대선과 관련해 원세훈 전 원장과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 등이 선거법 위반을 포함한 혐의로 최근 기소된 상황에서, 새누리당은 자칫 사건의 여파가 박근혜 정부 출범의 정당성을 위협할까 전전긍긍하며 수세에 몰렸다.
그러나 국정원의 태도 변화는 법적 문제도 불러오고 있다. 새누리당 의원들에게만 공개한 자료가, 과연 공개해도 되는 자료였는지 또한 논란거리인 탓이다.
관계자들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2007년 남북 정상회담 대화록은 국정원이 작성했다고 한다. 녹음 상태가 좋지 않아 녹취에 관해선 전문가 집단이라 할 수 있는 국정원이 맡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당시 국정원은 참석자들이 말한 그대로 적은 녹취록을 우선 만든 뒤, 문맥이 맞지 않거나 회담과 관계없는 부분을 정리해 대화록 정본을 만들었다. 대화록 정본은 청와대에 정식으로 전달됐고, 이는 국가기록원에 보관됐다.
“대화록을 모두 공개하자”국정원에는 대화록뿐 아니라 사전 논의 내용과 메모, 회담 뒤 정리 내용 등이 두툼한 자료집 3권으로 정리·제본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조명균 청와대 외교안보정책조정비서관이 초안을, 김만복 국정원장이 최종 책임을 맡았다. 노무현 정부 시기에 정본과 자료집 이외에 발췌본 또는 요약본은 없었으며, 10·4 선언 1주년인 2008년 10월 국정원이 자료집을 추리고 정리해 한 차례 요약본을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이명박 정부의 대북 정책에 대한 비판에 대응하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한다.
국가기록원에 보관된 정본은 열람과 사본 제작이 금지된 ‘대통령 기록물’로 취급된다. 2007년에 만든 ‘대통령 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은 민감한 내용도 기록으로 남겨 보존하되 공개를 엄격히 제한해, 대통령이 자신의 행위를 기록으로 남기도록 했다. 국정원의 자료집에 대해선 규정이 없다. 새누리당과 국정원은 자료집은공공기록물이기 때문에 공개해도 큰 문제가 없다는 태도다.
민주당 쪽에선 국정원 자료집도 대통령 기록물에 준해서 취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설령 보관 장소가 달라서 ‘대통령 기록물’으로 다뤄질 수 없다 하더라도, 정상회담 기록이라면 최소한 열람과 공개가 제한되는 ‘비밀기록물’이어야 한다는 논리다. 민주당 의원들은 새누리당 정보위 소속 의원들과 남재준 국정원장 및 한기범 1차장을 6월21일 검찰에 고발했다.
지난해 대선을 앞두고 불거진 NLL 논란은, 노무현 정부의 이미지를 벗지 못했던 문재인 후보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실체와는 무관하게 ‘남북관계를 위해 영토주권을 포기한 정부 출신 후보’란 인식이 형성됐다. 이 문제가 결국 중도층 공략에서 발목을 잡았다는 분석도 나왔다. 반대로, 박근혜 대통령은 근래 북한을 상대로 강경한 모습을 보이면서 지지율이 오르는 ‘재미’를 톡톡히 보고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주화파보다는 주전파가 더 많은 대중적 인기를 누리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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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같은 구도가 전혀 희석되지 않은 상태에서 NLL 논란이 다시 불거지면, 일단 정부·여당에 유리하게 작용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 결국 국정원은 또다시 여권을 위한 정치 개입을 하고 있는 구조다. ‘원세훈 국정원’의 정치 개입이 일으킨 문제의 여파 속에서, ‘남재준 국정원’이 또 다른 정치 개입을 하고 있는 형국이라고도 볼 수 있다. 민주당에선 논란을 차단시키기 위해 ‘대화록을 모두 공개하자’는 고육책도 나온다. 새누리당이 불리할 때마다 NLL 문제를 들고나오는 걸 막아보겠다는 의도라면, 내용엔 자신이 있다는 얘기다. 민주당은, 다른 한편으론, 지난해 대선에서의 국정원 선거·정치 개입 사건이 희석되는 걸 이대로 지켜볼 수만은 없는 처지이기도 하다. 그러나 서상기 위원장 등의 돌발 기자회견에서 보았듯, 정보를 장악하지 못한 야당은 한발 느리다.
대통령 직속 정보기관 국정원박근혜 대통령은 논란에서 한발 비켜섰다. 청와대는 ‘우리와 무관하다’며 시선을 피하고 있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국정원에서 문제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문건을) 공개한 것으로 안다. 해당 기관의 일”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해당 기관인 국정원은 대통령 직속 정보기관이다.
‘원세훈 국정원’의 정치 개입 사건에서 가장 큰 수혜자는 사실상 박근혜 대통령이었다. ‘남재준 국정원’의 정치 개입 사건은 누굴 또 수혜자로 만들 것인가.
김외현 기자 oscar@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