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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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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버린 사태 10년, 재벌과 외국인 투자자의 은밀한 공생

2003년 진보·보수 할 것 없이 외국자본의 손에 국내 우량 기업 넘길 수 있다는 경계론 나와… 이후 국내 기업 적대적 M&A는 더 이상 없어
등록 2013-05-05 19:10 수정 2020-05-03 04:27

2003년 4월3일, 서울 여의도 금융감독원에 낯선 이름의 증권사 보고서가 접수됐다. ‘크레스트 시큐리티즈’. 당시 국내 최대 정유회사이자 SK그룹의 지주회사인 SK(주)의 지분을 이미 8.64% 확보했다는 내용이었다. 그 뒤로도 일주일간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매입이 이어졌다. 크레스트증권은 주당 평균 9293원에 SK(주) 주식 1902만8천 주를 사들여(총 1689억원) 자산 규모 17조원 기업의 1대 주주(14.99%)로 등극했다. 외국자본이 시장에서 지분을 매입해 국내 재벌회사의 최대주주가 된 최초의 사건이었다. 최태원 회장 등 총수 일가의 직접지분은 당시 1.39%에 그쳤다. “크레스트증권은 모나코에 있는 소버린자산운용(이하 소버린)의 100% 자회사다. 목표는 주주가치를 확립하며 SK(주)를 한국에서 기업 지배구조의 모델 기업으로 바꾸도록 경영진과 건설적으로 작업할 계획이다.”(2003년 4월14일 크레스트증권 보도자료)

2005년 3월11일 서울 광진구 광장동 워커힐호텔에서 열린 SK(주) 주주총회에서 경영진에게 공세를 펴는 소버린 쪽 인사들. 한겨레 자료

2005년 3월11일 서울 광진구 광장동 워커힐호텔에서 열린 SK(주) 주주총회에서 경영진에게 공세를 펴는 소버린 쪽 인사들. 한겨레 자료

악재를 기회로 본 역발상 투자

당시 최태원 회장 등 SK그룹 경영진은 검찰 수사와 재판을 받고 있었다. SK글로벌(현 SK네트웍스)에서 1조5587억원에 이르는 분식회계를 한 사실이 적발됐고, JP모건과 옵션 이면계약을 체결해 회사에 1112억원의 손해를 끼치는 배임 행위를 했다는 이유에서다. 악재 탓에 1만~2만원대를 오가던 SK(주)의 주가는 5천원대까지 추락했다. 너도나도 SK(주) 주식을 팔아치우기 바쁠 때 소버린은 반대로 주식을 대량 매입해버렸다. 악재를 기회로 본 역발상 투자였다.

2003년 6월 최태원 회장은 1심 재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가 보석으로 풀려났다. 하지만 이듬해 1월 손길승 SK그룹 회장이 1조원의 비자금을 조성한 혐의로 구속됐다. 이때부터 소버린은 최태원 회장과의 본격적인 전쟁에 돌입한다. 3월 주주총회를 앞두고 SK그룹과 독립적인 위치에서 SK(주)의 경영에 참여할 사외이사 5명을 추천하고 정관개정안을 제안한다. 제임스 피터 소버린 대표는 “주주들에게 사기를 친 혐의로 유죄 선고를 받은 이사들이 여전히 이사회에 남는 것은 문제가 있다. 아버지가 회사의 창립자인 최태원 회장의 경우라도 마찬가지다”라고 말했다. 소버린 안은 사내·사외 이사의 자격 조건을 ‘금고 이상의 형이 확정되지 않은 자’로 통일하는 것으로, 사외이사에만 자격 조건을 두는 SK 안과 차이가 있었다. 주주총회에서 분식회계 혐의로 징역형을 받은 최태원 회장의 운명이 엇갈릴 수밖에 없었다. 결과는 소버린의 완패였다. 이후 소버린은 임시주주총회를 신청했지만 법원이 기각해 무산됐고 이듬해 다시 경쟁을 펼쳤으나 패배했다. 소버린 지지 세력이 50%에 못 미쳤기 때문이다. 2005년 6월 SK(주)의 보유 목적을 ‘경영 참여’에서 ‘단순 투자’로 바꾼 소버린은 그해 7월18일 주식 전량을 처분했다. 이익은 주식 매매 차익과 배당금, 환차익을 합산해 9437억원에 이른다. 2년4개월 만에 투자금의 4배가 넘는 수익을 거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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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튀’ 논란이 거셌다. 외국자본이 한국 주식시장을 휘저어놓더니 결국 SK(주)의 주식을 모두 팔아치웠고, 이 과정에서 1조원에 가까운 돈을 벌었으니까 말이다. 또 적대적 인수·합병(M&A)이 판치는 주주자본주의가 뿌리내려 외국자본의 손에 국내 우량 기업을 넘겨줄 위험이 있다며 ‘외국자본 경계론’도 나왔다. 보수·진보 가릴 것 없었다.

투자자들이 달라졌다. 주주총회에서 경영진이 제시한 안건에 무조건 찬성하는 거수기 역할을 하지 않고 반대 의견을 내는 경우가 많아졌다.
소액주주운동까지 ‘월가의 논리’ 비판

“헤지펀드가 시장을 교란한 후 차익을 챙기고 떠나면 국부 유출은 말할 것도 없고 국내 투자자들이 나중에 크게 당하게 되는데 그 역시 소홀히 할 수 없다. 진짜로 경영권을 탈취당한다면 이는 더욱 큰 문제다. 차등의결권, 의무공개매수제도, 포이즌 필, 황금주 등의 장치는 미국·일본·영국 등 상당수 국가가 채택한 제도다.”(2006년 3월8일 사설) ‘규제’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던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도 동일한 주장을 펼쳤다. “유럽연합(EU)은 공공질서 유지, 국민의 건강, 국제평화나 안보 등과 관련해 규제가 가능하도록 돼 있다. 특히 필요시 황금주 활용이나 정부의 직접 개입 사례도 있다.”(이승철 당시 전경련 전무)

심상정 당시 민주노동당 의원은 2004년 8월 투기자본 국민대토론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외국자본의 힘을 빌려 무엇인가를 이루려던 재벌은 오히려 자승자박의 형세가 됐다. 외국자본은 이제 금융기관을 비롯한 경제의 핵심 부분을 장악해가고 있고 불평등, 일자리 파괴, 성장률 하락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이런 흐름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진다. 정승일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운영위원은 한발 더 나아가 참여연대가 이끈 소액주주운동까지 ‘월가의 논리’라고 비판했다. “소액주주운동이 주장하는 경제민주화란 수십만 명의 국내 주식투자자들과 1만~2만명의 영미계 투자펀드들을 위한 부의 재분배에 불과하다. 결국 기업 지배구조 개혁은 단지 주식투자자들에게만 좋을 뿐 사회와 국민경제(민족경제)에는 좋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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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소버린 사태가 한국 경제에 해만 끼친 건 아니다. 첫째, 직접적으로는 SK그룹이 이사회제도 등 지배구조를 개선했다. 사외이사 비율을 75%로 확대하고 투명경영위원회 등 하부 위원회를 설치했다. SK 사태 때 소액주주들이 소버린이 아니라 SK 경영진을 지지하도록 이런 조처를 단행한 것이다. 둘째, 투자자들이 달라졌다. 주주총회에서 경영진이 제시한 안건에 무조건 찬성하는 거수기 역할을 하지 않고 반대 의견을 내는 경우가 많아졌다.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 이지수 변호사는 “투자를 하면 목소리를 내는 게 당연하다. 국내자본이든 외국자본이든 마찬가지다. 조용한 투자란 없다. 그게 상식이고 현실이다”라고 말했다.

959호 표지이야기

959호 표지이야기

“재벌기업은 외국인 투자자를 정치권의 재벌기업 규제에 대한 방어 수단으로 활용하고 주가 상승은 외국인 투자자의 이해에 부합해 공생관계가 가능하다.” -디스커버리 인베스트먼트 김승식 부사장
연평균 20조원 수익 외국자본에

소버린 사태가 처음 불거진 지 10년, 국내 증시의 외국인 시가총액 비중은 40% 안팎이며, 특히 이익 규모가 큰 재벌 대기업과 일부 시중은행 등 20~30개 우량 기업의 외국인 지분율은 많게는 80%에 이른다. 하지만 외국인 투자가가 국내 기업에 대한 적대적 M&A를 시도하는 일은 더 이상 없었다. 왜 그럴까? 투자자문회사 디스커버리인베스트먼트 김승식 부사장은 에서 ‘재벌과 외국인 투자 간의 공생관계’를 지적했다. “재벌기업은 주주자본주의를 내세운 외국인 투자자의 힘을 빌려 노동세력을 압박하고(인건비를 축소하기 위해 비정규직 노동자를 늘리고 노조활동 압박) 하도급 관계의 중소 하청업체를 수탈하며 정치권의 재벌기업 규제에 대한 방어 수단으로 활용한다. 이 과정에서 재벌기업의 수익 확대에 따른 주가 상승은 주로 매매 차익을 목적으로 하는 외국인 투자자의 이해에 부합해 이런 공생관계가 가능하다.” 실제로 1992년부터 2007년 9월까지 외국인 투자자에게 지급된 누적 배당 총액은 16조6천억원이며, 국내 주가 상승에 따른 외국인 투자자의 평가차익은 306조6천억원에 이른 것으로 분석된다. 연평균 20조원 규모의 막대한 수익이 외국자본에 넘어간 셈이다.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참고 문헌: 김승식 (2013), 지주형 (2011), 김위생·윤혜경·하준삼 (2006), 이은정 ‘소버린의 SK 주식 매입이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2005), 이찬근 외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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