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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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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쥐어주며 ‘무상교육’, 사립만 살찌는 ‘시장교육’

등록 2013-01-26 15:18 수정 2020-05-03 04:27
과연 왔을까. 정부는 올해 누리과정을 확대하며 “사실상 무상보육의 시대가 열렸다”고 선언했다. 누리과정은 미취학 영유아가 어린이집·유치원에서 같은 내용을 배울 수 있는 교육 매뉴얼 프로그램이다. 그동안 유치원은 교육과학기술부가, 어린이집은 보건복지부가 짜오던 교육과정을 한데 묶었다는 의미가 있다. 하지만 더 큰 변화는 바로 ‘누리과정 지원금’이다. 정부는 올해부터 소득에 관계없이 누리과정을 밟는 만 3~5살 아동에게 지원금을 지급한다. 그러나 보육 현장에서는 지원금을 둘러싼 잡음이 커지고 있다. 은 누리과정 확대 도입 뒤 유치원·어린이집에서 나타나는 혼란과 문제점을 짚어봤다. _편집자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영어교육박람회. 윤운식 기자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영어교육박람회. 윤운식 기자

신·의·사·예·자.

 유치원·어린이집 보육교사들은 ‘신체운동·건강, 의사소통, 사회관계, 예술 경험, 자연탐구’ 등 누리과정 5개 분야를 한 글자씩 따서 이렇게 부른다. 고교생의 ‘국·영·수·사탐·과탐’처럼 누리과정을 배우는 미취학 영유아들은 정부가 정해준 교육 범위 안에서 교육을 받는다.

자료 파악할 수 있는 곳, 모두 인상 

그러나 학부모들은 누리과정을 떠올릴 때 ‘신·의·사·예·자’보다 지원금을 먼저 연상하는 게 사실이다. 소득수준에 관계없이 월 22만원씩 한 해 동안 모두 264만원을 지원받기 때문에 그만큼 가계에 보탬이 된다. 지원금은 정부가 정한 ‘아이사랑카드’를 학부모가 만들어 유치원·어린이집에서 결제하면 정부가 해당 계좌에 입금해주는 ‘바우처’ 방식이다. 지원 금액도 내년부터 해마다 24만→27만→30만원 수준으로 올라간다(표1 참조).

 그런데 누리과정 지원금이 등장하자 사립 유치원비도 덩달아 뛰는 ‘풍선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자세한 사례를 들여다보려고, 서울 마포구 지역 영유아 학부모들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이 지역의 최근 유치원 원비 인상 실태를 물었다. 이곳의 만 3~5살 영유아 학부모들이 보내고 있는 사립 유치원의 올해 원비 내역을 보니, 23곳 가운데 9곳이 지난해보다 원비나 입학금을 올려 받을 계획인 것으로 나타났다. 나머지 14곳은 올해 원비를 정확히 밝히지 않았거나 확인할 수 없었다. 인상 전 원비는 교과부의 ‘유치원 알리미’(e-childschoolinfo.mest.go.kr) 공시 정보를 기준으로 삼았다. 지난해 한국교육개발원의 통계를 보면, 전국의 영유아 가운데 22.3%만 수업료를 사실상 면제받는 국공립 유치원에 다니고 나머지는 사립 유치원을 이용하고 있다.

자료 : 보건복지부

자료 : 보건복지부

 매달 내야 하는 원비 인상 방식은 유치원별로 다양했다. 1년 사이에 6만5천~26만원까지 학부모 부담분이 늘어났다(표2 참조). 원비의 바탕이 되는 수업료뿐만 아니라 급식비, 교통비, 방과 후 활동비 등에서 인상 폭을 조정했다. B유치원의 경우 수업료는 1만원만 올리고 방과 후 활동비를 13만원 올려 원비를 14만원 올렸다. 이 유치원을 보내는 학부모는 누리과정 보육료를 받아도 실제 보육료는 지난해보다 8만원 적어지는 데 그친다. E유치원의 경우에는 학부모가 지난해보다 오히려 4만원을 더 내야 한다. 입학금도 일제히 올라 원복·가방값을 합치면 한 달 원비가 30만원 이하인 곳을 찾기 어려웠다. 지방자치단체마다 차이가 있지만 입학준비금이 5만~10만원을 넘지 않도록 규정한 어린이집과 대조적이다. 설문에 참여한 한정숙(29·가명)씨는 “발 빠른 유치원들은 이미 지난해부터 원비를 올렸다. 오르지 않은 유치원이 거의 없다. 누리과정 보육료 대부분이 결국 집으로 오는 게 아니라 유치원으로 가는 셈”이라고 말했다.

 인천의 사립 유치원 사정도 비슷했다. 인천에 사는 정아무개(35)씨는 올해부터 누리과정 보육료를 받게 될 만 5살 딸의 원비가 6만원 정도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수업료는 지난해보다 2만원 정도만 올랐지만 특강비·다문화교육비라는 이름의 방과 후 활동비를 새로 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 원비가 저렴하다고 해서 주변 유치원들의 항의가 많다. 그동안 무상으로 운행하던 셔틀버스 비용이라도 받으라고 해서 고민 중이다.”-서울 소재의 한 유치원 원장
사립 유치원이 적극적으로 원비 인상에 나선 배경에는 ‘누리과정 특수’도 한몫을 톡톡히 했다. “누리과정은 유치원 교육과정과 다름없기 때문에 유치원 교사가 전문가”라는 홍보 전략이 먹혔다.

‘통 큰’ 신설 유치원, 월 65만원 

서울 중구의 한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이 학습활동을 하고 있다. 올해부터는 소득에 상관없이 만 3~5살이면 누리과정 지원금을 받는다. 아래는 누리과 정 지원금을 받는 데 필요한 ‘아이사랑 카드’와 신청서 양식. 한겨레 김태형 기자

서울 중구의 한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이 학습활동을 하고 있다. 올해부터는 소득에 상관없이 만 3~5살이면 누리과정 지원금을 받는다. 아래는 누리과 정 지원금을 받는 데 필요한 ‘아이사랑 카드’와 신청서 양식. 한겨레 김태형 기자

 새로 문을 여는 사립 유치원은 아예 ‘통 큰’ 인상에 나서기도 했다. 인천 서구의 한 신설 유치원에 보내려면 누리과정 보육료 22만원을 받아도 월 40만원을 더 내야 한다. 서울 서대문구에 새로 들어선 유치원은 방과 후 활동비를 포함해 모두 월 65만원이 넘는 금액을 받고 있다. 이름을 밝히길 꺼린 이 유치원 학부모는 “원생을 모두 종일반으로 등록해 정부에서 별도로 종일반 지원금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누리과정 시행에 맞춰 지역 유치원들이 짬짜미해 원비를 올렸을 개연성도 보였다. 서울 소재의 한 유치원 원장은 “우리 원비가 저렴하다고 해서 주변 유치원들의 항의가 많다. 그동안 무상으로 운행하던 셔틀버스 비용이라도 받으라고 해서 고민 중이다”라고 말했다.

 사립 유치원이 적극적으로 원비 인상에 나선 배경에는 ‘누리과정 특수’도 한몫을 톡톡히 했다. “누리과정은 유치원 교육과정과 다름없기 때문에 유치원 교사가 전문가”라는 홍보 전략에 “원비가 비싸도 취학 준비를 하려면 유치원이 효과적일 것”이라는 학부모들의 맹신 탓이다. 육아정책연구소가 지난해 만 5살 누리과정 시행 뒤 전국 학부모 1605명을 조사한 결과를 보면, 학부모의 교육비 지출액은 누리과정 도입 전에는 월평균 20만1200원이었다가 누리과정 도입 뒤 월평균 11만1800원으로 줄어들었다. 결국 지난해 책정된 만 5살 누리과정 보육료였던 월 20만원 가운데 절반 가까이는 유치원·어린이집의 교육비 인상분으로 흡수된 셈이다. 교과부가 매해 사립 유치원 납입금 동결을 권유하고, 인상하더라도 물가 인상 폭을 넘지 않도록 권장했던 게 무색한 상승 폭인 셈이다.

 ‘누리과정 특수’에 맞춰 유치원이 전체적으로 원비를 올리는 것과 별개로, 어린이집에서는 ‘특별활동비’가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정부 보조금을 받는 어린이집은 유치원과 다르게 ‘수납한도액’ 제도가 있지만, 특별활동비를 편법으로 올리는 어린이집도 있다. 영유아보육법에서는 지역별로 ‘보육위원회’를 열어 학부모한테서 받을 수 있는 ‘기타필요경비’(특별활동비, 현장학습비, 준비물 비용 등)의 한도액을 정하도록 하고 있다. 이 가운데 외국어·컴퓨터·한글·수학 등 외부 강사가 가르치는 데 드는 특별활동비를 얼마까지 받을 수 있느냐가 어린이집 보육비의 변수가 되는 경우가 많다. 2011년 보건복지부가 조사한 지역별 특별활동비 수납한도액을 보면, 가장 높은 곳은 서울 강남구로 월 23만원이었고 가장 낮은 곳은 경기 평택·안성(3만원)이었다.

사립과 공립 연 300만원 이상 차이

 그러나 이런 구조를 악용하는 경우도 있다. 서울 양천경찰서가 지난해 5월 특별활동 업체로부터 상습적으로 금품을 받거나 어린이집 교사와 영유아를 허위 등록한 뒤 정부 보조금을 챙긴 서울·인천·경기 어린이집 181곳을 무더기로 적발한 사례를 보면 그렇다. 당시 어린이집은 학부모에게서 실제 사용한 특별활동비보다 많은 비용을 받은 뒤, 이를 특별활동 업체에 보내 회계 처리해 업체로부터 다시 돌려받는 형식으로 돈을 챙겼다.

 육아정책연구소의 조사를 보면, 지난해 만 5살 누리과정 시행 전에는 특별활동비로 월평균 4만1천원을 썼으나 시행 뒤에는 월평균 4만5천원을 쓴 것으로 나타났다. 누리과정 도입 뒤 어린이집 특별활동비도 오르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현재 전체의 10%로 턱없이 부족한 국공립 어린이집과 달리 민간 어린이집의 특별활동비는 크게는 연 300만원 이상 차이가 난다는 점도 문제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이 지난해 11월 ‘서울시 보육포털서비스’(iseoul.seoul.go.kr)에 공개된 ‘서울형 어린이집’ 2493곳의 특별활동비 내역을 분석한 자료를 보면, 민간개인 어린이집(월 9만4천원)을 이용하면 국공립 어린이집(월 3만8천원)보다 2.5배 비싼 특별활동비를 내야 했다. 시설 유형별로 특별활동비를 더한 평균 보육료를 추정해보면, 민간개인 어린이집 보육료가 국공립 어린이집을 보내는 것보다 매해 평균 약 300만원 정도 더 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형 어린이집’은 서울시가 인증한 어린이집으로 국공립과 민간개인·법인·부모협동·직장 어린이집 등 다양한 형태가 섞여 있다.

 이런 사정 탓에 누리과정 지원금의 효과를 얻으려면 좀더 면밀히 ‘수납한도액’을 정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남은경 경실련 사회정책팀장은 “누리과정 지원금을 전 계층으로 확대했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부모가 300여만원을 추가로 부담해야 하는 걸 과연 무상보육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지자체가 어린이집의 보육료 정보를 공개해 이를 바탕으로 보육위원회가 현실적인 ‘수납한도액’을 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시는 올해부터 국공립 어린이집과 서울형 어린이집의 특별활동비 공개를 의무화하기로 했으나, 다른 지역에서는 정보공개를 의무화하지 않고 있어 어린이집 보육료 실태 파악 자체가 힘들다.

 그러나 누리과정 도입 과정에서 벌어지는 혼란의 원인을 유치원·어린이집의 부도덕성에서만 찾을 수는 없다. 정부가 열악한 보육기관 지원은 그대로 둔 채 지원금 지급부터 나선 탓에 보육료 인상 현상은 필연적이었다는 지적도 있다. 한 육아정책 전문가는 “현재 유아교육 시장을 그대로 두고서 무상이 어떻게 작동하겠느냐. 국공립 확충 없는 무상보육은 사회적 기반시설이 아닌 시장에 투자한 꼴”이라고 했다. 결국 국공립 유치원·어린이집을 늘리는 근원적 해결책이 필요하지만 정부는 이미 누리과정에 들어간 예산만으로도 벅차다. 경실련은 매해 서울에서 민간 어린이집을 이용하는 10만889명의 한 해 동안의 추가 부담액(157만원)을 합하면 20억원 규모로 국공립 어린이집 80곳을 지을 수 있는 액수라고 지적한다.

그 돈으로 국공립 어린이집 80곳 짓는다 

 “교육은 투자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래서 내년부터 5세가 되면, 내 욕심은 2013년부터 4세, 3세 이렇게 실시하도록 내가 만들어놓고 떠나려고 그래요.” 2011년 12월9일 이명박 대통령은 영유아 학부모들을 만난 자리에서 누리과정 확대 의사를 밝히며 이렇게 말했다. 결국 그는 임기 내 무상보육 실현이라는 ‘욕심’은 실현했다. 그러나 결코 간단치 않을 ‘복지의 톱니바퀴’를 돌리는 작업은 고스란히 남아 있다.

김성환 기자 hwany@hani.co.kr·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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