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 취임 보름 만인 2008년 3월11일 아침 7시. 불법파견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직접 고용을 주장하며 서울 여의도 증권선물거래소 앞에서 182일째 농성 중이던 코스콤정규지부 천막농성장이 강제 철거됐다. 영등포구청은 직원과 용역 직원 200여 명을 동원해 코스콤 노동자 60여 명을 끌어냈다. 경찰 10개 중대 1천여 명이 농성장 주변을 봉쇄해 철거 작업을 도왔다. 이 과정에서 코뼈가 부러지는 등 노동자 6명이 크게 다쳤다. 이명박 정부가 내세운 법치주의가 어떤 식으로 노동운동 탄압과 연결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MB 정권 5년을 예고하는 사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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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정권의 새로운 시작이 누구에게는 허한 마음이나 ‘멘붕’ 정도를 떠나 그 사람의 생존과 존재 기반을 흔드는 일이 되기도 한다.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 당선인이 되자 그런 존재의 불안을 느끼는 이가 많다. “화해와 대탕평”을 꺼내든 박 당선인이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다.
MBC와 YTN의 해직 언론인이 그렇다. 박근혜 당선인은 지난 6월 김재철 MBC 사장의 사퇴를 MBC 노동조합 쪽에 두 차례나 약속했다. 파업 중이던 노조가 업무에 복귀하면 김 사장 퇴진에 적극적인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MBC 노조는 지난 1월 말부터 김 사장 퇴진과 공정방송 회복을 내걸고 140여 일째 파업을 이어가고 있었다. 박 후보는 “노조가 명분을 걸고 들어오면 나중 일은 내가 책임지겠다. 내가 당을 설득하겠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새누리당 역시 같은 달 야당과 ‘MBC 최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 새 이사회가 방송의 공적 책임과 노사관계에 대한 신속한 정상화를 위해 합리적 경영 판단과 법 상식, 순리에 따라 처리되도록 협조한다’고 합의했다. 김 사장을 퇴진시키겠다는 뜻이었다.
한 달여 뒤 MBC 노조가 170일간의 파업을 풀자 박 후보와 새누리당은 약속을 걷어차버렸다. 10월 말에는 새누리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총괄선거대책본부장이라는 거창한 직함을 가진 김무성 본부장이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에게 전화를 걸어 “김재철을 스테이시켜라”고 말한 사실이 드러났다. 결국 대선을 코앞에 둔 11월8일 방송문화진흥회는 김재철 사장의 해임안을 부결시켰다. ‘원칙과 신뢰의 정치인’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키는 정치인’이라던 박 후보가 ‘뻥을 친’ 자리에는, 사상 최악의 불공정 대선 보도로 화답한 MBC 뉴스가 비집고 들어왔다.
박 당선인은 대선 과정에서 자신의 언론관을 명확하게 밝힌 적이 없다. 공영방송 공공성 강화, 사장 선출 방식 투명화를 언급했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건너뛰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 YTN 구본홍 사장 임명으로 시작된 정권의 방송 장악은 KBS와 MBC 등으로 번지며 지난 5년 가까이 한국 언론의 상황을 말 그대로 개판으로 만들었다. 이제는 대통령이 된 박 당선인이 그의 언론관으로 답할 차례다. 자기 입으로 자신의 언론관을 말하지 못하는 지도자는 민주국가에 존재하지 않는다.
대선 다음날 시작된 수사
MBC는 김재철 사장 아래에서 9명이 해고당하고 82명이 정직당했다. 감봉·대기발령·근신 등까지 합하면 230명에 달한다. 정영하 MBC 노조위원장은 “국민도 그 심각성을 느끼는 공영방송의 파행에 대해 유력 대선 후보가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은 가운데 대선이 끝났다. 언론 자유는 집권자의 의지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 이 부분에 대해 아무런 검증을 받지 않은 박 후보가 당선된 것에 대해 MBC 구성원들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새 정부가 언론을 이 지경으로 묶어놓고 사회 통합을 말하는 것은 국민의 눈과 귀를 가려놓은 일방적인 통합에 불과하다. 박 당선인이 원칙과 신뢰의 정치인이라는 것을 보여주려면 지금이라도 사장 퇴진 약속을 이행해야 한다”고 했다. 전국언론노조 집계를 보면, 이명박 정부 5년 동안 MBC 말고도 YTN(해고 6명, 정직 26명 등 51명), KBS(정직 15명, 감봉 15명 등 133명), (정직 4명, 감봉 1명 등 9명), (해고 2명, 정직 2명, 직무정지 1명), (해고 3명, 정직 6명, 대기발령 6명 등 20명) 등에서 모두 452명의 언론인이 해고·정직·감봉 등의 징계를 당했다.
권력의 속성은 ‘보복’에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식이 열리기도 전인 2008년 2월 중순, 검찰은 17대 대통령 선거운동 과정에서 당시 한나라당으로부터 여러 건의 고소·고발을 당한 정동영 전 대통합민주신당 대통령 후보에게 출석요구서를 보냈다. 대선에서 떨어진 후보를 검찰이 소환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야당은 “정치 보복” “야당 탄압”이라고 비난했다. 대선 후보까지 조사하겠다는 마당에 선거운동에 한 발 걸쳤던 숱한 이들이 검찰을 통한 치졸한 보복극을 피할 길은 없었다.
이번에도 비슷한 수순을 밟게 될까. 18대 대선이 끝난 다음날 에는 여성 대통령 당선 소식과 함께 인터넷 팟캐스트 (이하 )에 대한 검찰 수사가 시작됐다는 기사가 실렸다. 는 대선을 사흘 앞둔 12월16일 서울 여의도 새누리당 불법 선거사무실 비용 등을 국가정보원에서 대줬다는 녹취록 내용을 내보냈다. 국가정보원은 곧바로 진행자인 김어준씨 등 3명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박 당선인의 동생 지만씨도 대선을 앞두고 5촌 조카들의 살인사건에 자신이 관련돼 있다는 의혹을 제기한 를 고소했다. 지루한 수사와 재판이 그들을 지치게 할 것이다.
강정·쌍용·송전탑… 기약 없이 갇힌 목소리
재판 등을 통해 싸워볼 여지조차 남아 있지 않은 이들도 있다.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 천막에는 쌍용자동차 해고자 복직, 강원도 삼척 핵발전소 반대, 제주 강정 해군기지 건설 백지화, 경남 밀양 송전탑 건설 반대, 용산 철거민 참사 진상 규명 목소리가 기약 없이 갇혀있다. 와 경찰, 서울 중구청이 합세한 강제 철거 움직임만이 뚜렷하다. 박 당선인은 ‘줄푸세’를 말한다. 세금 줄이고 규제 풀고 법질서를 세우겠다는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도 정권 초기 법질서 확립을 강조했다. 그가 말했던 법질서는 결국 낮은 수준의 법치주의, 공안몰이로 판명 났다. 박 당선인의 법질서는 어떤 모습으로 첫발을 뗄까. 농성장을 쓸어버리는 것으로 시작한다면 그의 5년은 이명박 정부의 연장, ‘이명박근혜’를 추인할 뿐이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새누리당 의원들과 김무성 총괄본부장은 대선 뒤 쌍용차 문제 해결을 위한 실효성 있는 국정조사를 약속했다. 이번에는 약속을 지켜라.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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