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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판결에 슈퍼세이브 카드를~

심사위원들이 그냥 지나칠 수 없던 의미 큰 올해의 판결들… “법원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보여준 판결”
등록 2012-12-21 19:43 수정 2020-05-03 04:27

“전문가들 생각과 대중의 생각이 이렇게 다른가요?” 케이블 채널 오디션 프로그램 심사위원인 가수 이승철이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러곤 카드를 집어들었다. 탈락자를 구제해주는 ‘슈퍼세이브’ 카드였다. 객석에서는 탄성이 터져나왔다. 이승철은 그렇게 탈락의 낭떠러지에 매달린 ‘딕펑스’를 살려냈다.

홍성수 숙명여대 법대 교수는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부산행 희망버스를 탄 참가자들의 일반교통방해 혐의 등을 무죄라고 판단한 서울동부지법 등의 판결도 “법원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보여준 판결”이라고 설명했다.

2011년 7월30일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를 촉구하며 부산 영도구 청학동 앞 도로에 온 희망버스 3차 참가자들이 문화 행사를 하는 모습(왼쪽). 이명박 정부의 4대강 낙동강 사업 구간 가운데 경북 칠곡군 석적읍에 있는 칠곡보 건설 현장. 한겨레 박승화 기자, 김명진 기자

2011년 7월30일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를 촉구하며 부산 영도구 청학동 앞 도로에 온 희망버스 3차 참가자들이 문화 행사를 하는 모습(왼쪽). 이명박 정부의 4대강 낙동강 사업 구간 가운데 경북 칠곡군 석적읍에 있는 칠곡보 건설 현장. 한겨레 박승화 기자, 김명진 기자

 

“사법부 변화하는 시작 되지 않을까”

이런 감동적인 장면, 이라고 못할쏘냐. 그래서 올해에는 우리도 준비했다. 두툼한 판결문 사이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보석 같은 판결, “당신 생각과 내 생각이 이렇게 다른가요?”라며 심사위원 사이에서 외면당해 묻힐 뻔한 판결들까지. 심사위원들에게 ‘올해의 판결’에는 못 올랐지만, 우리 사회를 한 발짝 나아가게 한 판결들을 하나씩 뽑아달라고 했다. 이름하여 ‘올해의 슈퍼세이브 판결’이다.

심사위원들은 과거사·인권·환경·여성·정보통신 등 자신의 전문분야에서 아쉬운 카드를 뽑아들었다. 한가람 변호사는 군 복무 중에 자살했더라도 직무 수행과의 상관관계가 인정되면 국가유공자로 예우해야 한다고 판단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을 추천했다.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군인이 군 복무 중 자살로 사망한 경우에도 교육·훈련 또는 직무 수행과 사망 사이에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는지 여부에 따라 국가유공자 등록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며 “자유로운 의지가 완전히 배제된 상태에서의 자살이 아니라는 이유로 국가유공자에서 제외 돼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한 변호사는 “우리는 자살사건을 두고 ‘사회적 타살’이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살이라고 해서 일률적으로 국가유공자에서 배제하는 판단은 잘못이라는 점을 알려준 판결”이라고 소개했다. 한 변호사는 수용자의 서신을 봉하지 않은 상태로 교정시설에 제출토록 한 것은 위헌이라고 밝힌 헌법재판소의 결정도 수형자 인권 측면에서 큰 시사점을 줬다고 평했다.

홍성수 숙명여대 법대 교수는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감옥살이를 했던 박형규 목사의 재심 판결(서울중앙지법)을 추천했다. 재심 공판에서 검사가 이례적으로 무죄를 구형해 화제가 됐던 사건이다. 당시 검사는 “이 땅을 뜨겁게 사랑하여 권력의 채찍에 맞아가며 시대의 어둠을 헤치고 걸어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몸을 불살라 그 칠흑 같은 어둠을 밝히고 묵묵히 가시밭길을 걸어 새벽을 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분들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으로 민주주의의 아침이 밝아, 그 시절 법의 이름으로 그분들의 가슴에 날인했던 주홍글씨를 뒤늦게나마 다시 법의 이름으로 지울 수 있게 됐습니다”라며 유신정권 당시의 기소와 판결이 잘못됐다는 참회의 소회를 밝혔다. 홍 교수는 “검사의 무죄 구형이(사법부가) 변화하는 시작이 되지 않을까 한다”고 평가했다. 홍 교수는 또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부산행 희망버스를 탄 참가자들의 일반교통방해 혐의 등을 무죄라고 판단한 서울동부지법 등의 판결도 “법원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보여준 판결”이라고 설명했다.

 

친족 성폭력에 부모 책임 강제한 판결도

여성학자 권김현영씨는 ‘올해의 판결’ 최종 후보에 오르지 못한 여성 관련 판결들을 꺼내들었다. 친딸을 지속적으로 성폭행한 아버지에게 18년형을 선고한 사건(의정부지방법원)에서 재판부는 딸이 성폭행당하는 것을 방관한 어머니에게도 공모죄로 5년형이라는 중형을 선고했다. 권김현영씨는 “가정에서 친족 성폭력이 일어났을 때 부모의 책임을 높은 수준으로 강제할 수 있는 판결이다. 어머니가 공범인지 양육 책임을 방기한 것인지 등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언론 보도에서는 선정적인 부분만 부각되고 중요한 의미가 전달되지 않았던 것 같다”고 했다. 그는 또 고려대 의대 성추행 사건의 피해자가 ‘인격장애가 있다’는 내용을 담은 문서를 동료 학생들한테 돌린 성추행 가해자와 그의 어머니에게 ‘2차 가해’를 엄격히 적용해 징역 1년을 선고한 서울중앙지법 판결도 높게 평가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법정 구속까지 됐는데도 항소심에서 벌금형으로 감형됐다”며 이후의 과정을 아쉬워했다.

양홍석 변호사는 대출광고에 속아 자신의 통장을 넘긴 소시민들을 구제한 대법원 판결을 높게 평가했다. 전자금융거래법상 양도할 수 없는 통장을 넘긴 피해자들이 벌금형 대상이 된 사건에서, 대법원은 “단순히 접근 매체를 빌려주거나 일시적으로 사용하게 하는 행위는 포함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양 변호사는 “언론이나 수사기관도 대포통장 자체를 넘기면 무조건 처벌받는다는 식으로 보도하고 수사를 하는데 대법원이 정리를 잘해주었다”고 평했다.

김보라미 변호사는 “남성 성기 사진을 블로그에 올린 박경신 고려대 교수의 게시물이 음란물이 아니라고 판단한 서울고등법원의 판결이 가지는 의미가 크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인터넷 심의에 항의하려고 삭제된 음란물을 게시한 박 교수에게 1심 재판부는 벌금 300만원을 선고했었다. 음란물을 판정할 때 전체적인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례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이 사건은 대법원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

최재홍 변호사는 예비타당성 조사를 받지 않은 4대강 낙동강 사업은 위법이라 판단한 부산고등법원 판결을 소개했다. 재판부는 “위법성이 있더라도 사업을 취소해야 하는지는 다시 생각해야 할 문제다. 원상회복을 한다는 것은 국가재정, 환경, 기술적 문제 등을 고려할 때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며 ‘사정판결’을 했지만, 그럼에도 4대강 사업 관련 소송 중 유일하게 사업의 위법성을 인정한 판결이라는 점을 높게 샀다.

 

내년에도 더 많은 활약 부탁

안은정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는 수원역 노숙소녀 살인사건의 재심을 결정한 대법원과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서울고법 판결을 꼽았다. 범인으로 몰린 피해자는 구속된 지 5년 만에 무죄판결을 받을 수 있었다. 사회적 약자에게 가해지는 강압 수사와 불공정한 법 집행을 바로잡아낸 판결이었다. 안 활동가는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해야 했던 5년의 세월이 너무 안타깝다. 좋은 변호사를 만나지 못했다면 해결하지 못했을 사건이다”라고 말했다.

심사위원들의 ‘슈퍼세이브’ 카드를 받은 재판부들이여, 내년에도 더 많은 활약 부탁드린다.

김성환 기자 hwa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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