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나라는 자원이 풍부했으나 빈부 차에 멍들었다. 외국 다국적기업이 지하자원을 독식했다. 1970년 진보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지하자원을 초국적기업으로부터 되찾았다. 복지를 확대하고 토지개혁을 실시했다. 보수주의자들은 진보 대통령을 증오했다. 1973년 극우파 장군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칠레의 진보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는 기관총을 들고 쿠데타군과 싸우다 죽었다. 피노체트 군사독재가 오래 지속됐다. 1987년 ‘칠레의 봄’이 왔다. 대중의 저항에 직면한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대통령이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내가 대통령직을 유지하는 것에 동의하는가’를 묻기로 했다. ‘위키피디아’를 보면, 중도개혁 정당부터 급진적 진보정당까지 공동전선을 펼쳤다. 기독교민주당, 인본주의자당, 환경주의자당, 사회당, 급진당, 더 급진적인 사회주의 운동그룹이 연대해 피노체트 반대투표를 조직할 ‘NO라고 외치기 위한 정당 연합’(Concertacion de Partidos por el NO)을 만들었다. 이들은 54%의 반대표를 조직해 피노체트를 물러나게 했다. 과제가 남았다. 반대하는 진보가 아니라 집권하는 진보가 돼야 했다. ‘NO 연합’은 ‘민주주의를 위한 정당 연합’(Concertacion de Partidos por la Democracia)으로 조직을 업그레이드했다. 정치학자들이 보통 ‘콘세르타시온’이라고 부르는 개혁진보 연합이 탄생했다. 1990년 총선에서 승리한 콘세르타시온은 2010년 선거까지 무려 20년 동안 연속 집권하며 칠레 사회의 민주화를 이끌었다.
캠프 쪽 “뒤지는 판세, 박빙으로 바뀔 것”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칠레와 한국의 교집합은 자유무역협정(FTA)만이 아니다. 열흘도 남지 않은 한국의 대선판에도 ‘연대’ 변수가 등장했다. 안철수 전 후보가 12월6일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와 만나 지원을 선언했다. 만남 뒤 안 후보는 “오늘이 대선의 중요한 분수령이 될 것이다. 많은 분들의 열망을 담아서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새 정치 실현’ ‘정권 교체 협력’ ‘대선 이후에도 협의’ 등을 골자로 한 합의문도 발표했다.
다음날인 12월7일부터 당장 지원 활동이 시작됐다. 안 전 후보는 자신의 고향이자 최대 격전지인 부산에서 첫 지원 유세를 펼쳤다. 안 후보는 그날 오후 5시15분께 서면 롯데백화점 지하분수대에서 문 후보와 함께 섰다. 강금실 전 장관도 함께했다. 먼저 문 후보가 마이크를 잡았다. “저와 안철수 후보가 함께 왔습니다. 우리는 하나가 됐습니다. 함께 힘을 합쳐서 반드시 정권 교체 이루고 대선 후에도 새 정치를 위해서 긴밀하게 협의하기로 했습니다. 부산 시민 여러분, 아름다운 단일화 이제 완성된 거죠? 맞습니까? 아름다운 단일화 완성시켜주신 안철수 전 후보님께 박수 한번 부탁드립니다.” 양쪽 지지자와 시민 1천여 명이 “안철수!”를 연호했다. 이어 마이크를 잡은 안 후보는 “새 정치를 위한 열망이 얼마나 큰지 잘 알고 있습니다. 새 정치 실현을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라고 짧게 말했다. 현장 분위기는 뜨거웠으나 두 사람의 발언은 길지 않았다. 두 사람은 공동 유세 뒤 각자 다음 유세 장소로 이동했다. 이후 안 후보는 오후 6시께 자갈치역 출구 ‘BIFF(부산국제영화제)광장’에서 부산 시민들을 상대로 문 후보 지원 발언을 했다. 저녁 7시30분에는 부산역 광장에서 지지 발언을 했다.
‘문-안 연대 효과’는 열흘도 남지 않은 대선판을 뒤흔들 수 있을까? 전망은 갈린다. 선거전 당사자인 민주당과 새누리당의 시각은 당연히 정반대다. 문재인 캠프의 우상호 공보단장은 “2.5%부터 많게는 4%까지 확장 폭을 유연하게 보고 있다. 작게는 3%, 많게는 5% 정도 뒤지는 것으로 나와 있던 지금의 판세는 박빙의 판세로 바뀌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새누리당은 영향력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은 채지지 선언 자체를 주로 비판하며 지지 선언 효과를 경계했다. 정옥임 새누리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 대변인은 12월7일 KBS 라디오 에서 “영향력이 있을 것으로, 조금 있을 것으로 예상을 한다. 그런데 영향력의 파장이 어느 정도일지에 대해서는 단정하기 어렵다”고 조심스럽게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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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 효과’가 크다는 주장이 있다. 윤희웅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 조사분석실장은 12월7일 CBS 라디오 에서 긍정적인 견해를 밝혔다. “현재 부동층 비율이 한 12% 정도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중 절반 정도가 안철수 전 후보의 사퇴 이후로 생긴 부동층이다. 이른바 신부동층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6%포인트 가량이 안철수 전 후보의 지지층 특정표를 가지고 있는데 이 중 절반 정도는 (안 후보) 지지 선언으로 적극적 지지 표명으로 옮아갈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되면 지금 격차가 5~6%포인트 있는데 일정 부분 경쟁 구도의 재형성 가능성은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윤 실장은 ‘지지 선언 실기론’과 관련해 “(안 후보의 지지 선언이) 시기가 다소 늦어진 측면이 있겠지만 그것이 크게 문제되진 않을 것이다. 관심도가 워낙 높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다만 윤 실장은 민주당이 새 정치 실천 방안을 내놓고 안 후보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지지 유세를 하느냐에 따라 효과가 다를 수 있다는 조건을 달았다. 시사평론가 유용화씨도 12월7일 채널A 뉴스에서 “20대층은 기존 여론조사를 보면 절대적으로 안철수 전 후보를 지지했다. 안 전 후보가 유세 다니고 적극적으로 (문 후보를) 지원해 20~30대가 대선에 관심을 갖게 하고 투표장에 나오게 하느냐, 이것이 가장 중요한 변수”라고 말했다.
반론도 적지 않다. 안 전 후보가 지지 선언을 너무 늦게 해 때를 놓쳤다는 논리다. 신율 명지대 교수는 12월7일 YTN 뉴스에 출연해 안철수 전 후보가 부산 지지 연설을 하는 장면을 본 직후 회의적인 견해를 밝혔다. “안 전 후보 지지층 중에 문재인 후보 지지할 사람은 벌써 갔고 박근혜 후보 지지할 사람도 벌써 떠났다. 문재인 후보와 박근혜 후보 둘 다 지지할 수 없다는 사람이 부동층으로 남은 것이고 이들은 비노·반노 세력으로 보인다. 안 전 후보가 민주통합당을 지지한다 할지라도 (이들이) 문재인 후보를 지지할 가능성은 적다고 본다. 극적 이벤트 효과로 맥시멈 3% 정도 올라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큰 폭의 상황 변화는 없을 것이다.”
시사평론가 김종배씨도 12월7일치 인터뷰에서 “안 전 후보가 이미 타이밍을 놓쳤기 때문에 20대에서 부동층으로 돌아선 유권자들이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20대가 감성세대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한 번을 하더라도 안 전 후보가 어떤 메시지와 어떤 모습으로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느냐에 따라 20대의 마음이 크게 움직일 수도 있다”고 제한적으로 평가했다. 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도 같은 지면에서 “안철수 효과는 분명히 영향력이 있다. 그러나 판세를 역전시킬 정도는 아닐 것이다. 시기를 이미 놓쳤다. 문재인 후보가 박근혜 후보와의 격차를 좁혀갈 수 있는 ‘반전의 계기’를 잡았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다소 냉정하게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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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정치평론가들이 안철수 효과가 있는지는 12월8~12일 증명되리라는 데 동의한다. 12월8~12일 여론조사에서 문재인 후보가 단한 번이라도 박근혜 후보를 이기지 않는 한, 객관적으로 야권의 대선승리를 예측하기 어렵다. 선거법상 12월13일부터 여론조사 공표가 금지된다. 유권자는 12월12일 마지막 여론조사의 분위기에 영향받은 상태에서 12월19일 투표장으로 향한다.
안 전 후보 쪽은 첫 지원유세 방식으로 격전지역 방문을 택했다. 안 전 후보 쪽은 ‘맥주 번개모임’ 등 기존 정치인과 다른 선거운동 방식을 고민하고 있다. 본인의 강점을 살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도 적극 활용할 것으로 전망된다. 구체적인 지원유세 계획은 12월 8~9일 확정될 것으로 보인다. 선거법상 문 후보가 안 전 후보를 지원유세 연설원으로 지정하면 선거운동원 등록 없이도 지지 연설을 할 수 있다. TV 연설도 운동원 등록 없이 가능하다. 안 전 후보 쪽은 수행·비서·공보·민원·행정·메시지 등 6개 팀에 30명 안팎의 실무진도 꾸렸다. 다만 ‘정권 교체와 새정치를 위한 국민연대’에는 선을 그었다. 안 전 후보 캠프 공동선거대책본부장이던 송호창 의원은 12월7일 MBC 에서 “독자적으로, 별도로 힘을 더해주는 것이 문재인 후보의 승리를 위해서 훨씬 의미가 있지 않을까 그런 취지에서 참여하지 않는 것”이라고 밝혔다.
문재인 후보가 ‘안철수 효과’ 외에 기대하는 것이 ‘국민연대’ 카드다. 야당과 진보 진영은 12월6일 ‘정권 교체와 새 정치를 위한 국민연대’를 출범시켰다. 정치인은 물론 학계의 조국·안경환 교수, 문화계의 소설가 황석영·이외수·공지영씨, 미술평론가 유홍준 교수, 영화감독 이창동씨, 정신과 의사 정혜신씨, 영화배우 김여진씨, 종교계의 도법 스님 등 명망가들이 참여자로 이름을 올렸다. ‘국민연대’는 같은날 문재인 후보를 ‘국민후보’로 추대했다. 중도부터 진보세력까지 모두 대표하겠다는 취지에서 ‘국민후보’로 명명했다. 작가 황석영씨는 이 모임을 1987년 민주화운동 시절의 ‘국본’에 비유했다. 1987년 6월 항쟁 시절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 등 정치권, 시민사회, 학생운동을 망라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가 만들어졌다. 민주화 이후 20년이 지났고, 국본에 참여했던 야당 정치인이 차례로 집권했으며, 그중 한 명(김영삼 전 대통령)은 최근 박근혜 후보를 지지한다고 밝히는 등 국본 참여 명망가들의 20년 뒤 인생 경로가 제각각인 마당에 다시 ‘국본’을 비유법으로 든 것은, 절박함 때문이다. 이회창·이인제씨 등이 모두 박근혜 후보 지지 의사를 밝히며 자연스레 형성된 ‘보수대연합’에 맞서 ‘진보대연합’으로 뭉쳐야 한다는 것이다. 생물학적으로 대부분 40대 이상인 이 진보 명망가들의 절박한 외침이, 2007년 투표율이 각각 49.4%와 54.9%에 그쳤던 20대와 30대 유권자에게 얼마나 공감을 불러일으킬지가 관건이다.
한국판 ‘콘세르타시온’
칠레와 한국의 교집합은 FTA뿐만이 아니다. 둘 다 1987년 민주화를 맞았다. 여기서부터 다르다. 칠레 중도개혁 세력과 진보세력은 ‘콘세르타시온’이라는 동일한 깃발 아래 20년 동안 장기 집권했다. 한국은 진보정당이 아닌 보수세력과 연합한 개혁세력이 겨우 10년 동안 집권하고 다시 보수에 권력을 넘겼다. 민주당은 2012년에 다시 한국판 ‘콘세르타시온’을 만들고 싶어 한다. 안 전 후보는 그 깃발 아래 들어가지 않기로 했다. 안 전 후보가 ‘문재인-국민연대-안철수’의 느슨한 연대를 집권시킬 힘을 가졌는지는, 12월12일 전에 드러난다.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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