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훈을 주는 단일화 사례가 있다. 하나는 교사로, 다른 하나는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 같다. 2002년 단일화는 실패했다. 노무현 후보가 2002년 4월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확정됐다. ‘노풍’이 불었다. 국민참여경선을 통해 당내 비주류였던 노 후보가 쟁쟁한 후보들을 꺾었다. 경쟁자들은 패배를 쉽사리 인정하지 않았다. 2002년 6월 지방자치단체 선거에서 민주당이 참패했다. 노무현 흔들기가 시작됐다. 민주당 의원 일부가 국민경선으로 뽑은 자당 후보를 흔들었다. 경선에서 패배한 이인제 의원은 노무현의 대통령 후보 사퇴를 주장했다. 무소속 정몽준 의원이 때마침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민주당 안에서 정 의원과 단일화하라는 목소리가 나왔다. 노 후보는 대북정책, 재벌정책 등에서 가치와 정책이 다르다며 거부했다. ‘후보단일화추진협의회’(후단협)가 노골적으로 노무현 흔들기를 시작했다. 민주당을 탈당한 김민석 의원의 이름은 두고두고 거론된다. 2002년 11월 등 떠밀린 노 후보와 정몽준 의원이 단일화에 합의했다. 텔레비전 합동토론을 벌인 뒤 국민 상대 여론조사로 결정하자고 합의했다. 그해 11월25일 여론조사 결과 노 후보는 46.8%의 지지를 얻어, 42.2%를 얻은 정몽준 의원을 누르고 단일 후보로 확정됐다. 그러나 가치와 비전을 나눠갖지 않은 단일화는 허약했다. 여론조사 결과에 승복했던 정 의원이 말을 뒤집었다. 유세장에서 노 후보의 발언을 빌미 삼아 투표를 하루 앞둔 12월18일 공조 파기를 선언했다. 노 후보는 자신의 지지층 결집으로 겨우 승리했다. 단순히 이기기 위한 ‘공학 단일화’는 허약하고 위험하다는 점을 보여준 사례다.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는 여러모로 현재 대선과 비교할 만하다. 민주당 후보로 박영선 의원이 나섰고 무소속 박원순 후보가 맞붙었다. 정치인과 시민운동가로 다른 삶을 살았지만, 두 후보는 큰 틀에서 비슷한 가치와 비전을 갖고 있었다. 거칠게 표현해 ‘우리 편’ 안에서 단일화 경쟁이 펼쳐지게 됐다. 승자는 박원순 후보였다. 2011년 10월3일 박원순 후보는 52.2% 합산 득표율을 기록해 45.6%를 얻은 박영선 의원을 이겼다. 박원순 후보는 참여경선에서 46.3%의 득표율로 박영선 의원(51.1%)에게 뒤졌으나, 일반 여론조사(57.7%)와 배심원 평가(54.4%)에서 우위를 거둬 최종 점수가 더 높았다.
당시 민주당의 충격이 큰 것처럼 보였다. 경선 패배에 책임지겠다며 손학규 대표가 사의를 표명하는 소동도 있었다. 당이 쪼개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돌이켜보면 기우였다. 결국 박원순 후보는 당선된 뒤 민주당에 입당했다. 박영선 의원은 경선에서 패배했으나 유력 정치인으로 평가받게 됐다. 4·11 총선에서 패배했지만, 민주당은 여전히 제1야당이다. 비전을 공유하는 ‘가치 단일화’가 힘이 세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다. 문재인·안철수 캠프가 되새길 대목이다.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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