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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도 안 좋았다’ vs ‘결과적으로 좋았다’

박태균 서울대 교수와 조우석 전 <중앙일보> 기자 ‘유신’ 대담… “목적과 수단이 전도된 종신독재” vs “고뇌에 찬 결단 이해”
등록 2012-10-20 15:05 수정 2020-05-03 04:27
박승화 기자

박승화 기자

참석자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한국현대사)
조우석 도서출판 기파랑 편집주간·전 문화전문기자

저널리스트의 상상력과 역사학자의 오성(悟性)은 각자의 궤도를 공전하는 행성들처럼 조우의 기회를 좀체 마련하지 못했다. 관심의 권역이 근접하는 순간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시선은 사건과 상황의 해석을 두고 멀찍이 비껴가기 일쑤였다. 직업상의 척도와 습속의 차이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그것은 ‘박정희와 그의 시대’에 대한 평가를 둘러싸고 형성된 정치적 자장이 그만큼 크고 강력하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대담은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와 도서출판 기파랑의 조우석 편집주간이 참석한 가운데 지난 10월8일 오후 4시부터 2시간 남짓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회의실에서 진행됐다.

조우석(이하 조) : 사실 난 박정희에 대한 평가와 관련해 어떤 의무감 같은 걸 갖고 있다. 무엇보다 1980년대를 전후해 주류 지식사회가 보여준 강박적인 ‘반(反)박정희론’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래서 3년 전 이란 책도 썼다. 이 과정에서 유신세대인 난 리버럴한 박정희 비판자에서 적극적인 옹호자가 됐다.

박태균(이하 박) : 나 역시 처음엔 박정희라는 인물에 대해 무작정 비판적이었다. 민주주의 문제와 관련해선 특히 그랬다. 그런데 박정희를 연구하면서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박정희 시대엔 성장이 시대정신”

조 : 박정희에 대한 기존의 시각은 사실 진부한 면이 있다.

박 : 인간은 변하기 마련이다. 박정희를 두고 ‘구국의 지도자냐, 권력욕의 화신이냐’ 식의 이분법으로 접근하는 것은 너무 정태적이고 평면적이다. 박정희 시대를 연구하며 그가 쓴 글이나 주변의 회고록 등을 읽다보니, 박정희의 생각이 한군데 머물러 있던 것은 결코 아니더라. 시기에 따라 변한 것인데, 다른 사람 얘기를 들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차이가 컸다. 개인의 퍼스낼리티에 대해선 잘 알 수 없지만, 그의 생각은 일정한 변화를 겪은 게 사실이고, 그 변화는 집권기에도 있었다.

조: 물론이다. 집권 초기의 민족주의적이고 자립경제적 지향이 1963~64년을 거치며 바뀐다. 수출지상주의를 밀고나간 건 60년대 중반 이후부터고, 남의 말을 듣지 않기 시작한 건 유신을 전후해서다. 사실 난 유신에 대한 판단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 박정희의 고뇌에 대해 글을 쓴 사람은 종종 있었다. 그런데 유신에 얽힌 고뇌에 대해선 다들 침묵한다. 집권 당시의 핵심 관료들도 그랬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걸 보면 확실히 한국이 정상적인 사회는 아니다. 과연 박정희가 그렇게 후안무치한 독재자였나. 그것 때문에 우리가 불행해졌나. 결과를 두고 볼 때 그렇지 않은 측면이 많다. 5·16은 긍정하는데 왜 유신은 부정하나. 이건 사회적·정치적 위선이다. 내가 볼 땐 5·16이 유신이고, 유신이 5·16이었다.

박 : 내 생각은 다르다. 세상에 고뇌가 없는 사람이 있겠는가? 중요한 건 그것이 현실에서 누구를 위한 고뇌로 구현되었는가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의 삶과 역사의 흐름에 긍정적으로 작용했는지를 살펴야 한다는 얘기다. 히틀러도 독일을 구하겠다는 생각으로 전쟁을 일으켰다. 하지만 독일 국민과 인류에 얼마나 큰 고통과 희생을 가져왔나.

조 : 가끔 흥미로운 가정을 해본다. 만약 박정희가 1961년에 쿠데타를 안 하고, 1980년대나 1990년대에 집권했어도 무리한 성장 위주 정책을 펼쳤을까? 분배나 안정화를 내세웠을 것이다. 만약 김대중이 1971년 선거에서 박정희를 누르고 당선됐다면, 그때도 분배에 역점을 둔 정책을 펼칠 수 있었을까? 아니다. 그도 박정희처럼 성장 위주 정책을 펼쳤을 것이다. 우린 너무 개인의 캐릭터에 고착돼 있다. 핵심은 시대정신이다. 사람은 그 다음이다. 박정희 시대엔 성장이 시대정신이었다. 1980년대와 90년대엔 안정과 분배가 시대정신이었던 것처럼.

박 : 성장에 초점을 두더라도 정책을 추진하는 방식은 다를 수 있다. 이 문제는 ‘박정희 없는 성장이 가능했을까’라는 쟁점과도 관련된다. 나는 적어도 1960년대엔 박정희가 없었어도 한국 경제가 성장했을 것이라고 본다. 1950년대말부터 미국의 후진국 원조정책이 바뀐다. 그전까진 조건 없이 무상으로 주던 것을, 그때부터 개발 프로젝트를 요구하기 시작한다. 계획안을 내면 검토해보고 돈을 주겠다는 거다. 국내적으로도 1950년대 후반부터 경제개발계획이 필요하다는 사회적 공론이 형성됐다. 박정희도 이런 흐름과 시대적 의제를 읽었던 거다.

조 : 그 부분까지는 동의한다.

박 : 근데 그 흐름을 읽은 건 장면 정부나 1950년대 자유당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실제 5·16 쿠데타 당시 장면 정권의 경제관료들은 워싱턴에 가 있었다. 경제개발계획을 전달하면서 원조를 요청하는데, 일이 터진 거다. 그 사람들이 돌아와 계획안을 군사정부에 전달했고, 약간의 수정을 거쳐 정책으로 시행됐다. 속도와 성장률, 방식에선 차이가 있었겠지만, 전체적인 틀에서 성장을 해나가는 데는 차이가 없었을 것이라고 본다.



나 역시 국가주도형 발전이 제3세계에선 유일한 선택지였다고 본다. 하지만 그게 꼭 독재체제일 필요는 없었다. 속도와 성장률의 차이는 있었겠지만, 최소한의 민주주의 시스템을 갖추고 사회적 동의에 기반해 정부가 계획을 주도해가는 길도 얼마든지 열려 있었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한국현대사)

조 : 계획과 의지, 행정적 뒷받침만 있다고 경제발전이 되는 건 아니다. 중요한 건 누가, 어떻게 시행하느냐다. 서울대 가려는 의지가 충만하고 두뇌도 되고, 집안의 후원이 있으면 누구나 서울대 갈 수 있나? 장면이 경제성장의 중요성을 인식한 건 사실이다. 마스터플랜 짜서 미국에 보여주기도 했고. 그런데 그 허약한 장면 정권 아래서 박정희 시대에 거둔 만큼의 성장이 가능했을까? 전후(戰後) 제3세계에서 그런 식으로 경제개발 추진해 성공한 케이스가 어디 있나. 무리한 가정을 근거로 박정희 정부를 폄하하진 말자.

박 : 장면 정부가 오래 갔으면 얼마나 갔겠나. 5·16이 없었어도, 장면 정권이 지속되도록 용인할 만큼 국민이 우둔하지 않았다. 당시 집권 민주당은 당이 둘로 쪼개진 상태였다. 의원내각제라서 어느 시점에 내각이 바뀌었을 거다. 국민들이 필요를 느꼈으면 더 강한 지도자를 뽑았을 테고. ‘누가,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를 거론하셨는데, 사실 지도자보다 중요한 게 테크노크라트다. 그들은 이미 1950년대부터 성장하고 있었다. 50년대말에는 요직에 들어가기 시작했고, 60년대엔 더 상층부로 진입한다.

조 : 맞다. 하지만 그들이 박정희가 발탁하지 않았어도 요직에 들어가고, 절로 경제발전이 일어났을 지에 대해선 극히 회의적이다. 반복하자면, 1960~70년대의 기적이란 한국과 박정희에 허용된 거의 일회적 사건이었다.

박 : 송인상, 차균희, 정재설처럼 정부 지원으로 국제기구 경험을 쌓고 온 관료들이 5·16 이전부터 재무부·건설부 등의 요직에 상당수 진출해 있었다. 어떤 정부가 들어서더라도 일정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져 있었다.

“박정희 이후 지불 사회적 비용 커”

조 : 다시 묻는데, 장면 정부처럼 해서 성공한 사례가 있었나?

박 : 역사에서 찾기 어려운 건 사실이다. 차근차근 성장하던 나라들도 독재나 부패, 쿠데타 때문에 좌절을 겪었으니까. 필리핀은 양호하게 진행하다가 유신처럼 마르코스가 계엄령 선포하고 독재체제 구축해 망친 경우고, 칠레도 본 궤도에 오르려던 아옌데 정부를 피노체트가 쿠데타로 뒤엎었다. 두 나라 모두 독재로 망가진 케이스다. 한국·타이완·일본은 좀 다른데, 이 경우엔 미국의 정책과 냉전이라는 상황, 베트남전 특수 같은 변수들이 지도자 역할보다 더 결정적이었다. 문제는 이런 외적 조건 아래 속도전식으로 경제발전을 밀어붙인 결과, 이후 지불해야할 사회적 비용이 지나치게 커졌다는 점이다. 속도는 늦더라도 착실히 단계를 밟아 성장을 추진했다면 사회적 비용은 줄었을 것이다.

조 : 사회적 비용은 물론 계산해야 한다. 적법한 절차를 밟지 않고 발전을 추진하다보니, 사회의 많은 부분에 상처를 남겼다. 어느 원로 법조인은 지금은 박정희 시대를 긍정하지만, 당시 사법부에 몸담았을 때는 자신을 판사(判事)가 아닌 ‘반사’(半事)라고 자조했을 정도다. 그래서 사법파동도 일어났고. 그러다보니 박근혜라는 공당의 대통령 후보가 아버지 때의 일로 국민에게 사과하고 피해자 가족 앞에서 용서를 구해야 하는 상황이다. 40년이나 지난 사건이 대통령이 되려는 당시 지도자의 딸에게 정치적 업보로 작용하는 상황 자체가 심각한 사회적 비용 아니고 뭐겠는가. 그럼에도 나는 1960년대의 정치적 진행과정을 보면 유신은 불가피했다고 본다. 유신은 5·16의 배반이나 타락이 아닌, 연장이자 쇄신이다. 유신이 단행된 1972년을 전후해 북한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나. 수상제에서 주석제로 바뀐다. 그들도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 질서가 격변기에 들어섰다는 걸 감지하고는 상당한 압박을 느낀 거다. 우리가 유신으로 간 거랑 다른 게 없다.

박 : 구체적으로 무엇 때문에 유신이 불가피했다는 것인가. 유신이 아니라 민주화와 사회개혁이 더 필요했던 것 아닌가.

조 : 베트남 공산화 사례는 좀 진부하긴 하지만, 1970년대 초·중반을 지나면서 한반도 정세가 엄청난 불확실성에 휩싸이지 않았나. 우리가 어떻게 될지, 당시엔 아무도 몰랐다. 박정희라는 지도자가 선제적으로 유신을 단행하지 않았다면, 우리 일상이 어마어마하게 바뀌었을 것이란 지적을 새겨들어야 한다.

박 : 무리한 가정법으로 역사에 접근하면 곤란하다. 그런 뉴라이트식 논법 말고, 구체적 사실을 갖고 얘기해야 한다. 방금 사회적 비용을 말했는데, 박근혜씨가 감당해야할 정치적 굴레도 비용이지만, 더 큰 것은 유신과 군사독재로 인해 학업에 몰두해야 할 젊은이들이 반유신, 반독재 투쟁에 뛰어들면서 치러야 했던 희생과 기회비용이다. 최근 과거사 문제로 겪는 남남갈등 역시 또다른 사회적 비용이다.

조: 아직도 ‘박정희 반대로’를 외치고 있는 지식사회가 오히려 기회비용을 증폭시킨다는 생각은 안 해봤나?

박 : 기회비용의 문제인데, 경제적 비용은 또 얼마나 컸나. 경제사를 보면 1969년과 1980년, 두 차례의 중요한 경제위기가 있었다. 69년 위기를 겪은 뒤 청와대가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부실기업 정리작업에 착수한다. 그런데 이런 흐름이 1972년 ‘8·3 조치’를 거치며 뒤집혀 버린다. 사채를 동결해 부실기업을 살려두는 쪽으로 가버린 거다. 그리고 나서 두 달 뒤 유신이 선포된다. 경제정책에서 획기적 개혁이 필요했던 시기였는데, 그걸 막아버린 거다. 8.3조치를 통해 퇴출 운명에서 벗어난 기업들은 중동 오일달러를 통해 살아났다가 1970년대말 더 큰 위기에 직면한다. 경제관료들 진술을 보면, 1970년대 중화학공업의 과잉중복투자가 매우 심각했다. 기업은 투자받은 돈으로 부동산 투기하고, 그게 또 다른 채산성 위기를 부르고.

조 : 새겨들을 만한 문제제기다.

박 : 구조조정이 지연되면서 부실이 누적돼 결국 1997년 위기까지 가게 된 거다. 정부의 기업정책에는 시장논리가 적용되지 않았다. 보조금 주고 사채 동결해 생명 연장해주고, 그러다보니 1980년대말 개방이 본격화할 때 국내 기업들이 경쟁력을 갖지 못했다. 그 시작이 박정희 시대 중반인 1960년대 후반이다. 유신이 가져온 사회경제적 비용의 또다른 측면이다.

조 : 8·3조치에서 1997년까지는 거의 한 세대의 간격이 존재하는데, 박정희 시대의 정책 실패가 외환위기로 연결됐다는 건 무리한 추론 아닌가.

“독재 아닌 국가주도형 발전 가능했다”

박 : 그런 식으로 미봉한 게 몇 차례 더 있었다. 1972년에 이어 1975년 금리인하하면서 한 번, 전두환 시대에 구조조정을 정치적으로 하면서 또 한 번. 이게 탈이 나 휘청거리다 3저 호황 덕에 간신히 살아났고, 김영삼 정부 들어 기업의 건전성과 채산성을 고려하지 않고 무리하게 개방·자유화 정책 펼치다 결국 무너진 거다. 박정희 시대 청와대 자료를 보면, 1969년에 청와대에서 위기 원인을 정확하게 지적한다. ‘정부가 보증을 너무 많이 해 기업이 돈을 지나치게 빌려썼다. 심사해서 넘길 기업은 넘기자.’그런데 이 기조가 8·3조치로 무너졌다. 유신도 마찬가지였다. 1970년대초 광주대단지 사건, 전태일 분신 등으로 위기 징후들이 연이어 분출됐다. 뭔가 사회적 개혁이 있어야 했는데, 그걸 유신으로 틀어막아 버렸다.

조 : 역사를 너무 정태적·구조적으로 보는 것 같다. 역사는 무균 실험실 같은 공간으로 봐선 안 된다. 당시 박정희는 한국주식회사를 움직이는 회장이었다. 사장은 김정렴을 포함한 테크노크라트들이었고, 정주영·이병철은 공장장이었다. 외환위기 전까지 우리 경제가 보조금·관치경제였던 것은 사실인데, 한국 경제는 매우 역동적이고 가변적인 상황 속에 존재했다. 경제사령관 박정희는 모든 돌발변수가 완벽히 차단된 실험실 속에서 한국경제를 운용했던 게 아니다. 매우 일반적인 경로와 방식을 전제한 뒤 우린 왜 그렇게 못했느냐고 몰아세우는 식이어선 곤란하다. 유념할 대목은 한국이 고전적인 경제발전의 경로를 밟아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환자였다. 근육을 만들다보니 지방도 쌓였다. 그걸 덜어냈어야 하는데 못했던 건 사실이다. 그런데 공정한 평가를 하려면 당시 최고지도자의 위치에서 사고해보는 게 필요하다. 그럴 생각 해보셨나.

박 : 안 해봤다.

조 : 학자들 맹점이다. 이건 무리한 가정이 아니다. 내가 박정희였다면, 당시 상황에서 지방이 쌓였으니 떼어낸 뒤 링거 맞히면서, 차분히 갈 수 있었을까? 어렵다. 역사학자들처럼 이상화된 발전 경로를 가정해놓고 한국경제를 여기 들이대면 짜증나는 편차만 확인된다. 소모적이다.

박 : 왜 소모적인가?

조 : 답이 안 나오니까. 완벽한 건강체질이 없는 것처럼 경제발전의 고전적 경로란 것도 없다. 심지어 영국 산업혁명이나 프랑스혁명이란 것도 실체가 없었고, 기회비용이 너무 컸다는 학자들도 있다. 한국의 경제발전은 ‘신비’다. 외국에선 우리 경제가 여기까지 온 게 미스터리라고 한다. 한국 정치를 볼 때, 역대 대통령들은 다 불행했다. 망명하고, 총 맞아 죽고, 감옥 가고, 자식 감옥 보내고, 스스로 목숨 끊고. 그럼에도 한국경제가 이만큼 성장했다. 이 불일치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나는 거시적으로 보면 대한민국은 성공했다고 본다. 역대 대통령들은 한국경제라는 기적의 탑에 돌을 하나씩 얹었고. 학자들처럼 어떤 이념형적 경로를 머릿속에 넣고 보면 한국경제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나 마찬가지다.

박 : 이상형을 염두에 두고 말하는 게 아니다. 서구의 모델을 이상형으로 보지도 않는다. 나 역시 국가주도형 발전이 제3세계에선 유일한 선택지였다고 본다. 하지만 그게 꼭 독재체제였어야 가능했던 것은 아니다. 최소한의 민주주의 시스템을 갖추고 사회적 동의에 기반해 정부가 계획을 주도해가는 길도 얼마든지 열려 있었다.

조 : 내 말은 그렇게 해서 성공한 사례가 과연 있었냐는 거다.

박 : 한국도 1960년대엔 민주주의의 최소적 틀은 갖고 있었다. 1967년 선거에서 박정희가 압도적 표차로 당선된 것은 당시 국민들이 정부의 성과를 인정하고 재집권에 동의한 거다. 그러다가 1960년대말 위기가 왔다. 그리고 당시의 정부 문서들을 보면 그러한 위기에 대한 올바른 처방이 나왔다. 그런데 그걸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초기에 갖고 있던 상황을 보는 눈을 잃어버렸던 거다. 결국 1971년 국가비상사태, 72년 유신을 선포하고 종신독재로 치닫는다. ‘이 위기를 해결할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생각이 낳은 치명적 결과다.

조 : 유신이 민주주의의 최소 기제마저 없애버린 폭력적 대응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지나치게 정태적으로 보면 상황을 총체적으로 읽을 수 없다. 역사는 동태적으로 봐야 한다. 때론 최고지도자의 입장에서 바라볼 필요도 있고. 안 그러면 무기력한 사후진단밖에 안 나온다. 자기들이 무임승차해 통과해온 역사에 대해, 뒤에서 돌 던지는 게 과연 정당한가. 내가 유신을 옹호하는 건, 그 누구도 결단의 배후에 놓인 지도자의 고뇌를 헤아리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남의 말을 안 듣기 시작한 건 유신을 전후해서다. 유신에 대한 판단이 남과 다르다. 유신의 결단에 얽힌 고뇌에 대해선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과연 박정희가 그렇게 후안무치한 독재자였나. 그것 때문에 우리가 불행해졌나. 결과를 두고 볼 때 그렇지 않은 측면이 크다. -조우석 도서출판 기파랑 편집주간  

박 : 오히려 부족한 건 사실에 근거한 제대로 된 비판이다. 한국식 발전모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제3세계에서 한국을 많이 배우러 온다. 그런데 웬만해선 그들에게 좋은 얘기만 하려고 한다. 한국이 이만큼 빠르고 견실하게 성장을 했고, 그것을 추동한 강한 지도자가 있었다는 식이다. 발전 과정에 어떤 시행착오가 있었고, 정치사회적으로 얼마나 암울했는지에 대해선 얘기가 없다. 그들에게 정말 필요한 건, 성장 과정에서 우리와 같은 사회적 비용을 지불하지 않도록 교훈을 주는 것인데도 말이다. 게다가 40~50년 전 우리와 지금의 그들은 조건 자체가 다르다. 한국은 냉전 체제 아래 분단국가였고, 미국과 일본의 원조가 있었다. 지금 같은 부국들의 보호주의도 없었다.

“선발 자본주의 국가는 매끄러웠나”

조 : ‘후후발’ 국가의 핸디캡을 안고 산업화을 이룩하는 과정에서 최소한의 민주적 기제조차 없애버렸으니, 학자로선 지적하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같은 문제제기를 다른 방식으로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과연 선발 자본주의 국가는 매끄럽고 순탄한 발전 과정을 거쳤을까? 안 그랬다. 그들도 사회적 비용을 치를만큼 치렀다. 런던에 빈민들이 얼마나 많았나? 성장 과정에 수반된 도시문제, 대기업 집중, 양극화 다 거쳤다. 후발국가였던 독일은 국가주도형 경제의 부작용이 더 심각했다. 사회적 비용을 계속 강조하시는데, 그건 우리만 환자고 선발인 영국이나 후발인 독일은 별 문제 없었다는 논리나 다름 없다. 나이 들면 여기저기 아픈 데가 생긴다. 그런데 병원 가면 ‘왜 이제 왔어요?’ 한다. 근데 아프다고 바로 병원 찾는 사람이 얼마나 되나? 어딘가 이상이 있다는 걸 알지만 ‘좀 참아도 괜찮겠지’ 한다. 이게 현실이다.

박 : 의사라면 병을 키워 온 환자에게 왜 이제 왔냐고 비판하는 게 당연하다. 선발 산업화 국가들은 그들의 발전과정에서 나타난 정책 오류와 사회적 비용에 대해 성찰하고 교훈을 얻고자 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그런 얘기 하면 여지없이 ‘좌빨’ 소리 듣는다. 토론과 비판을 막는 분위기 자체가 심각한 문제다.

조 : 냉정하게 보자. 학계에서 ‘반(反)박정희론자’ 비율이 얼마나 되나.

박 : 많이 줄었을 거다.

조 : 아니다. 논문 쓰고 칼럼 기고하는 사람들, 압도적 다수는 ‘반박정희’다. 언론·비평계도 마찬가지다. 반박정희와 중도 비율이 각각 30~40%만 되어도 나는 그냥 관망하겠다. 사회적 비용 얘기도 해가면서. 그런데 상황이 안 그렇다.

박 : 학계에 반박정희가 압도적 다수라면, 왜 그 많은 학자들이 박정희에 대해 비판적인지에 대해 생각해보는 게 우선 아닌가?

조 : 공부를 제대로 안 하니 그런거다. 그 사람들, 박정희와 반대로 하는 게 경제민주화요 사회정의라고 말한다. 전두환 시절부터 시작된 관성이 김대중·노무현 시기를 거치며 지나치게 강해졌다. 박정희 시대의 디테일에 대해 연구하다보면, 판단은 달라질 수 있다.

박 : 진보든 보수든, 연구하지 않고 정치적 선입견에 사로잡혀 얘기하는 건 문제다. 박정희가 쓴 글, 연설문집, 청와대 문서 등을 꼼꼼히 봤는데, 의외로 정보가 많다.

조 : 의외가 아니다. 원래 많다. 당대 청와대는 사회의 모든 안테나가 집적된 곳이었고, 연설문집은 당대의 숨결과 시대인식을 함축하니까. 언제부터 읽으셨나?

박 : 2003년부터다. 그런데 읽다보니, 두 가지 부류가 보이더라. 그것도 안 읽고 얘기하는 엉터리 학자, 그것만 읽고 얘기하는 엉터리 학자. 그것만 봐선 안 된다. 팩트를 뒷받침하는 주변 자료들을 함께 봐야 한다. 안 그러면 정치적 프레임에 갇히게 된다.

조 : 사실 내가 박정희 책을 쓴 건 어떤 반발심 때문이다. 어느 순간 보니, 40대부터 60대까지 학계의 주류가 백낙청·강만길·리영희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로 채워졌더라. 그러니 그들에게 배운 젊은 세대가 균형감각을 가질 수 있겠는가. 이것이야말로 정말 심각한 사회적 비용 아닌가.

박 : 너무 많은 사람이 저리로 가니, 나는 이리 간다는 건 학문 세계에서 통할 법한 얘기는 아니다. 진보학계 원로들 말씀을 하셨는데, 그분들 영향력이 그 안에선 여전한지 모르겠지만, 학생들은 안 그렇다. 그들은 취직과 생존이 최대 관심사다.

조 : 안 그렇다. 내가 일하는 출판사에서 나온 이승만 책을 갖고 요즘 20대들 만나면 반응이 대체로 이렇다. ‘뿔달린 나쁜 독재자로 알았는데, 굉장히 잘생겼네?’ 이게 다 디테일을 가르치지 않아서다. 박정희에 대해서도 똑같은 얘길 한다. 정치군인, 헌정중단 가져온 나쁜 인물. 386세대의 그릇된 관점을 이식받은 탓에 그분들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거다.

박 : 문제는 관심 자체가 없는 거다.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다. 이번 정부 들어 한국사 교육시간을 확 줄였다. 국사가 필수 과목도 아니고, 교과서에서도 현대사 비율이 대폭 축소됐다. 사정이 이러니 대학 신입생들 만나보면 현대사에 대한 앎 자체가 일천하다. 박정희에 대한 지식도 ‘경제를 발전시킨 지도자’ 정도다. 교육을 제대로 해야 한다. 그런데도 사회적 비용 얘기를 하면 자학사관이라고 하질 않나.

조 : 자학사관은 일본 용어고, 정확히 말하면 역사 허무주의다. 그분들 공적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이렇게 했으면 사회적 비용 덜 치렀을 것이라고 하는 게 허무주의가 아니고 뭔가.

박 : 허무주의가 아니다. 그런 걸 가르쳐야 불필요한 비용을 다시 치르지 않게 된다. 안 그러면 나중에 유사 상황이 왔을 때 ‘구국의 지도자가 나와 쿠데타 하고, 유신 한번 더 가자’ 해도 할 말이 없어진다.

조 : 나는 솔직히 미국이 부럽다. 그들 건국사도 그리 쾌적하지 않았다. 진창물이 많이 튀었다. 그럼에도 건국신화를 만든다. 나라 세운 워싱턴, 땅 넓힌 제퍼슨, 분열 치유한 링컨, 강국 만든 루스벨트, 이런 식으로. 부끄러운 역사는 가급적 감춘다. 근대 국가 건설 과정이 원래 그런 거니까. 우리는 반대다. 곡해하고 폄하하기 바쁘다. 진흙탕이 튀었어도 다 우리 대통령들이다. 사회발전, 경제기적의 탑에 돌 하나씩 얹은 그들을 왜 존경하면 안 되나. 프레임 자체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신화 프레임 안에도 비판할 건 다해”

박 : 폄하·곡해란 말을 그렇게 쉽게 쓰면 안 된다. 어찌된 게 비판만 하면 죄다 곡해·폄하로 몰아붙이나. 미국이 과연 그들을 일방적으로 칭송만 하나? 미국의 공립 중등학교 교과서를 직접 봤다. 신화의 프레임 안에서도 비판할 건 다 한다. 그것을 허용하는 게 미국사회의 건강성이다.

조: 내가 아쉬운 건, 며칠 뒤면 10월 유신 40년이다. 지난해는 5·16 반세기였다. 영미권에선 ‘시사’(時事)의 영역을 대략 20년 정도로 잡던데, 이렇게 보면 유신도 5·16도 시사의 영역이 아니다. 40년쯤 됐으면 한 사람이 성장해 중견이 됐을 세월 아닌가. 그런데 아직도 우린 시비곡절을 묻는다. 이건 우리가 갖고 있는 근본주의적 심성과 관련된 거 같다. 성리학적 근본주의다. 성리학적 질서 안에서 포폄은 항상 가려져야 하니까. 심지어 지난 정권 시절엔 100년도 더 된 동학농민운동을 갖고 정치적 갑론을박을 벌였다. 이제 40년·50년전 사건들에 대한 평가는 역사학자한테 맡기자. 87년체제나 IMF위기 같은, 우리가 논의해야 할 시사문제들이 산적해 있지 않은가.

박 : 사실 어떤 국가 지도자든 개인의 권력욕만 갖고 통치하진 않는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 어떤 방식으로 나라를 잘되게 할 것인지에 대해 고뇌가 다 있다. 박정희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문제는 목적과 수단이 전도되어버렸다는 거다. 잘 살아야 한다는 게 시대정신이었던 건 맞다. 그런데 그것 말고 또 있었다. 당시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의식이 상당히 신장되고 있었는데, 경제성장시키겠다며 그런 사회적 열망을 외면하고 짓밟아 버렸다. ‘그래도 결과가 이만큼 좋지 않았느냐’고 반문하는 분도 있다. 그건 무슨 짓을 하든 전교 1등만 하면 된다는 논리다. 이런 의식이 자꾸 재생산되는 건 심각한 문제다. 박정희 시대가 우리 사회에 남긴 어두운 유산이다.

진행·정리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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