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두루뭉실 ‘시대정신’,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 있다

연설 속 단어로 살펴본 대선 의제… 모두 ‘통합’을 주장하고 ‘경제민주화’ ‘복지’ ‘일자리’ 외치지만 정책과 프로세스 제시 태부족
등록 2012-09-28 14:32 수정 2020-05-03 04:26
박근혜 · 문재인 · 안철수 후보 셋 다 ‘통합’과 ‘경제문제 해결’을 과제로 내세웠다. 그러나 해법은 다를 것으로 전망된다. 똑같은 현충원 참배도 세 후보는 미묘한 차이를 드러냈다. 한겨레 강창광

박근혜 · 문재인 · 안철수 후보 셋 다 ‘통합’과 ‘경제문제 해결’을 과제로 내세웠다. 그러나 해법은 다를 것으로 전망된다. 똑같은 현충원 참배도 세 후보는 미묘한 차이를 드러냈다. 한겨레 강창광

국회사진기자단

국회사진기자단

말보다 행동이 중요하다. 정치인의 진면목은 그가 떠드는 말과 슬로건보다 그가 해온 선택과 결정을 통해 드러난다. 전두환 전 대통령 시절 정부 슬로건은 ‘정의사회 구현’이었다. 그러나 정치인의 말은 적어도 단면은 된다. 정치인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엑스레이 사진은 아니지만, 특징의 일부를 포착하는 스냅사진은 된다. 박근혜·문재인·안철수 후보의 연설문을 비교했더니, 공통점이 도드라졌다. 세 후보가 내세우는 시대정신과 과제가 비슷했다.

대통합, 소통과 화합, 통합의 정치…

일단 ‘시대정신’이 비슷했다. 박근혜·문재인 후보의 대선 후보 수락연설과 안철수 후보의 대선 출마선언에서 반복된 단어와 문장, 제시된 의제(어젠다) 등을 분석한 결과, 세 후보 모두 2012년 한국 사회의 핵심 과제로 ‘통합’과 ‘경제민주화 및 복지’를 과제로 꼽았다. 같은 정당 소속으로 보일 정도다. 다만, 문 후보가 대립적 정치문화와 관련해 재벌, 검찰, 집권세력 등의 책임을 좀더 따져물었다.

먼저 자주 구사한 단어를 분석해봤다. 박근혜·문재인·안철수 후보는 ‘통합’이라는 단어를 각각 2번, 1번, 4번 구사했다. ‘국민이 하나되도록’과 같이 ‘통합’이라는 뜻으로 사용된 단어 ‘하나’는 3번(박근혜), 2번(문재인), 1번(안철수) 구사했다. 박 후보는 지난 8월20일 수락 연설에서 통합을 강조했다. “먼저, 국민 대통합의 시대를 열어가겠습니다. 대한민국의 새로운 도약을 위해서는 국민의 힘과 지혜를 하나로 모아야 합니다.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드는 큰 길에 모든 분들이 기꺼이 동참하실 수 있도록 저부터 대화합을 위해 앞장서겠습니다. 이념과 계층, 지역과 세대를 넘어, 산업화와 민주화를 넘어, 모두가 함께 가는 국민 대통합의 길을 가겠습니다”와 같은 문장을 여러 번 말했다. “우리 대한민국은 위대한 역사를 만들어왔습니다. 산업화로 기적의 ‘경제성장’을 만들었고, 민주화로 성숙한 ‘정치 발전’을 이뤄왔습니다”라는 문장에서는 이른바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화합을 도모했다.

문 후보도 지난 9월16일 수락 연설에서 통합을 강조했다. “‘협력과 상생’이 오늘의 시대정신입니다. 저는 ‘소통과 화합’의 리더십을 발휘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편가르기와 정치 보복, 더 이상 없을 것입니다. 야당과도 외교안보에 관한 정보를 공유할 것입니다”라고 밝혔다. 안철수 후보도 표나게 통합 의지를 내세웠다. 안 후보는 9월19일 출마 연설에서 이 점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분열과 증오의 정치를 넘어서 우리의 미래를 위한 에너지로 바꿔놓을 수 있을 겁니다. 누가 당선 되더라도 국민을 위해서라면 서로 도울 수 있고 또 함께할 수 있는 통합의 시작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정책 대결 속에서 제가 만약 당선된다면 다른 후보들의 더 나은 정책이 있다면 받아들이고 또 경청할 겁니다. 이것이 바로 국민들이 원하는 덧셈의 정치, 통합의 정치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사태와 서거, 2007년 경선 이후 이명박 대통령 쪽의 박근혜계 공천 ‘학살’ 논란 등의 역사가 이들이 통합을 내세우게 된 배경이다.

경제민주화, 박의 ‘내용 없는 처음’

세 후보 모두 어젠다로 경제문제를 내세우는 데 차이가 없었다. 셋 다 2012년 대선에서 경제문제의 핵심 어젠다로 ‘경제민주화’와 ‘복지’를 꼽았다. 경제와 민생이 시대의 화두라는 점을 세 후보 모두 인정한 것이다. 박근혜·문재인·안철수 후보는 ‘경제민주화’라는 단어를 각각 3차례, 2차례, 1차례 구사했다. ‘복지’는 4차례(박근혜), 12차례(문재인), 1차례(안철수) 말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경제와 민생 의제를 내세운 점에서 세 후보의 차이는 크지 않았다. 심지어 ‘일자리’와 ‘복지’를 함께 구축하겠다는 큰 틀의 해법마저 동일했다.

박 후보는 “경제민주화와 복지 그리고 일자리가 삼위일체를 이루는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하겠습니다. 어느 한쪽으로 과도하게 기울어진 구조에서 함께 나누는 방식으로 성장과 복지가 따로 가지 않고 함께 가는 방식으로 바꾸겠습니다”라고 주장했다. 경제민주화를 의제화한 것은 사실상 박근혜 후보다. 그렇지만 연설문에는 경제민주화에 대한 계획이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경제민주화는 국민 행복의 첫걸음입니다. 중소기업과 대기업이 함께 성장하고, 비정규직과 정규직이 차별 없이 대우받도록 하겠습니다. 경제적 약자도 공정한 기회를 갖도록 만들겠습니다”라고 원칙을 선언하는 데 그쳤다. 복지와 관련해 ‘5천만 국민행복 플랜’ 수립과 ‘국민행복추진위원회’ 구성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일자리 창출과 복지를 동시에 이끌겠다는 구상이다. 그러나 연설문에는 구체적인 각론은 등장하지 않는다. ‘정보통신’ ‘과학기술’ ‘소프트웨어 산업 같은 일자리 창출형 미래산업’ 등의 표현에서 어렴풋이 토건경제에서 벗어나려는 구상이 포착되는 정도다.

문 후보의 연설문은 조금 더 구체적이다. 경제민주화와 관련해 문 후보는 재벌에 대한 견제·규제 뜻을 분명히 밝혔다. 박 후보나 안 후보보다 이 점이 도드라졌다. “변화의 새 시대로 가는 세 번째 문은 경제민주화의 문입니다. 경제민주화는 시대적 명제입니다. 저 문재인이 그 문을 열겠습니다. 일자리 창출, 복지 확대, 지속 성장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겠습니다.” 특히 재벌 문제와 관련해 “재벌 관련 제도를 확실히 정비하겠습니다. 재벌의 특권과 횡포는 용납되지 않을 것입니다. 재벌과 중소기업이 상생하는 길을 찾겠습니다. 골목상권을 보호하겠습니다. 사용자와 노동자의 ‘공존·공생’을 통해 일하는 사람들이 제대로 대접받게 하겠습니다”라고 밝혔다. 일자리와 관련해 대통령 직속 ‘국가일자리위원회’ 설치 및 ‘청년일자리특별위원회’ 설치를 공약으로 밝혔다. 복지와 관련해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성과를 먼저 내세웠다. “시혜적이고 선별적인 복지를 뛰어넘겠습니다. 보편적 복지가 계획의 핵심이 될 것”이라며 비교적 분명히 표현했다.



전반적으로 경제와 민생 의제를 내세운 점에서 세 후보의 차이는 크지 않았다. 심지어 ‘일자리’와 ‘복지’를 함께 구축하겠다는 큰 틀의 해법마저 동일했다.

뒤처리 하느라 ‘쓸 돈’이 모자라는데…

안철수 후보는 지난 7월 출간한 저서 의 표현에 비해 경제민주화와 복지에 대해 많이 발언하지 않았다. 원칙을 천명한 수준이었다. “국내의 가계부채와 부동산 문제가 정말 심각합니다. 세계적인 장기 불황까지 겹쳐 한꺼번에 위기적 상황이 닥쳐올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제가 혼자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도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지만 부족하고 실수도 하고 결점이 많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명한 국민들과 전문가들 속에서 답을 구하고 지혜를 모으면, 그래도 최소한 물줄기는 돌려놓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위기의 시대에 힘을 합쳐 함께 어려움을 헤쳐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치가 바뀌어야 우리 삶이 바뀔 수 있습니다. 새로운 정치가 들어서야 민생경제 중심 경제가 들어섭니다. 대한민국은 새로운 경제모델이 필요합니다. 지금 논의되고 있는 경제민주화와 복지는 성장동력과 결합하는 경제 혁신을 만들어야 합니다.” 안 후보는 연설의 처음과 중간 부분까지, 시대정신과 그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기보다 먼저 자신이 왜 출마하며 어떤 경로로 결심을 굳히게 되었는지 설명하는 데 할애했다.

세 후보 모두 이구동성으로 ‘경제민주화’ ‘복지’ ‘일자리’를 의제로 받아들였지만, 구체적인 정책과 해법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2012년에 누가 대통령이 되든 이명박 정부의 과오를 뒤처리하는 데 돈과 시간을 투입해야 한다고 많은 전문가들이 지적한다. 특히 이명박 정부가 세수는 줄이고 4대강 사업은 일방적으로 강행해 재정건전성을 크게 악화시킨 사실은 진보·보수 학자들이 입 모아 지적하는 문제다. 한마디로 다음 대통령이 자기 공약에 ‘쓸 돈’이 모자란다는 이야기다. 세 후보 가운데 재정건전성 악화 문제를 거론한 것은 안 후보가 유일했다.

어젠다는 던졌지만 구체적 정책, 공약, 해법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비판이 제기된다. 의제만 있고 정책이 없다, 자신만의 정책 브랜드가 없다, 여러 정책을 나열할 뿐 구체적인 실행 순서와 프로세스가 없다는 반박이 주로 제기된다. 불행히 세 후보 모두 이런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한성대 교수)은 9월19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도서관에서 여야 국회의원 모임인 국회경제민주화포럼과 한국경제정책연구회가 공동 주최한 ‘경제민주화 대토론회’에서 박근혜·문재인·안철수 후보 3명의 재벌 개혁 정책을 혹독하게 비판했다. 박 후보에 대해선 구체적인 재벌 규제책이 없음을 근거로 재벌 개혁 의지의 진정성에 의심을 제기했다. 문 후보에 대해서는 정책 나열에 그치고 있으며 구체적으로 민주통합당의 에너지와 힘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지 밝히라고 조언했다. 안 후보의 큰 구상에는 동의하면서도 그가 정치 영역에서 지도력을 보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수술 실력에 생사 갈리는 같은 병 환자

소속과 이념이 다른 세 후보가 연설문을 통해 아픈 한국 사회의 병명을 동일하게 진단한 것은 유권자에게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악마는 각론에 숨어 있다. 중병의 경우, 같은 병이라도 의사의 수술 실력에 따라 환자의 생사가 갈린다. 수술은 말로 하지 않는다. 연설문 너머에 있다.



의제만 있고 정책이 없다, 자신만의 정책 브랜드가 없다, 여러 정책을 나열할 뿐 구체적인 실행 순서와 프로세스가 없다는 반박이 주로 제기된다. 불행히 세 후보 모두 이런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